세계 종교인 한 식탁에 모은, 서촌 모녀의 ‘채식 밥상’

한겨레 2024. 5. 21.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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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이 잡념잡상 _03
비건 밥집 주인 이춘필
“고기는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어요. 나는 고기 먹으면 죽어.” 야윈 몸에 허리는 굽고, 머리는 검은 것 한 올 없이 허옇게 센, 그러면서 안색에 복숭아 빛이 돌고, 귀 밝고 눈빛 맑은 이 밥집 어매, 팔십 가까이 평생 먹은 고기가 한 국자도 안 될 거라 한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하늘 저쪽에서 갑자기 짹짹거리며 참새 한 떼가 날아온다. 한 서른 마리 될까, 정신없이 뒤섞이더니 대문 용마루에 일렬로 정렬한다. 귀한 풍경이라 얼른 카메라를 꺼내 찍어대는데 처마 끝으로 내려오고, 다시 마당에 착륙한다. 거기 허옇게 몇 줌의 낱알들이 흩어져 있다. 새들은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순식간에 먹어치우고는 다시 하늘로 날아간다. 들 너른 시골집이 아니라, 5월 경복궁 옆 서촌의 기와집 풍경이다. 새들이 음식쓰레기를 주워 먹는 것을 보고 곡식을 주기 시작했다고 한다. 새떼는 밥때 세 번하고, 오후 3시에 한 번 더, 하루 네 차례 정확한 시간에 이집에 온다.

“저것들이 시계도 없는데 어찌 때를 딱 맞춰 오네요” 했더니, 주인 어매 “꽃은 달력이 있어서 제때 피나? 다 알아요, 1분도 안 틀려. 때를 모르면 굶는 거라. 밖에 나갔다 오면 집 앞 전깃줄에 앉아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대문으로 들어가고 새들은 날아 들어와서 뿌려주면 먹고 가요. 찹쌀이나 백미는 남길 때도 있는데 현미는 다 먹고 가요” 한다.

비건 음식점 ‘마지’. 대문에 ‘몸과 마음을 조화시키는, 건강을 위한 자연식 마지’라고 현판이 걸려있다. 채식주의자는 동물성 음식을 어디까지 금하느냐에 따라 유형이 다른데 비건(vegan)은 우유 꿀도 안 먹는 순 채식으로 가장 윗길이다. ‘마지’는 사시마지(巳時摩旨)의 준말로 오전 9~11시 부처에게 올리는 고봉밥이다. 이 집은 어머니 이춘필(77), 딸 김현진(54), 모녀가 꾸려간다.

어매는 다섯 살 나던 1950년 겨울, 흥남부두에서 문재인, 노회찬 가족이 탔던 그 배(LST, 전차상륙함)를 타고 월남했다. 부산 피난살이 중에 하루는 엄마가 소고기국을 끓여줬는데 누린내가 심한 데다 허연 기름이 떡처럼 엉겨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 이것은 못 먹는 거라고 각인이 되었나 봐. 그 뒤로 고기를 먹으면 속이 뒤집혀 다 토하고 온몸에 발진이 생겨요. 고기는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어요. 나는 고기 먹으면 죽어.” 야윈 몸에 허리는 굽고, 머리는 검은 것 한 올 없이 허옇게 센, 그러면서 안색에 복숭아 빛이 돌고, 귀 밝고 눈빛 맑은 이 밥집 어매, 팔십 가까이 평생 먹은 고기가 한 국자도 안 될 거라 한다.

1988년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2001년 구룡사에서 사찰음식으로 유명한 선재스님 밑에서 음식을 배웠다. 이듬해 서울 방배동에서 직원 다섯을 두고 사찰음식점 ‘마지’를 열었다가 5년 만에 다 털어먹었다. 2016년 지금 자리에 다시 ‘마지’를 열어 8년째다. 여기서는 단둘이, 장 담그기부터 모든 음식을 어매가 하고, 딸은 손님맞이와 뒷일을 한다. 음식이 달라졌고, 어느덧 채식주의자들이 손꼽는 집이 됐다. 그동안 채식에 대한 세상 인식도 크게 바뀌어 손님이 늘었다.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다. 티브이(TV)프로 ‘비정상회담’으로 유명한 파비앙(프랑스)과 줄리안(벨기에)이 최고 단골이다. 유럽의 여행자들, 수녀와 승려, 유대교인, 무슬림들도 많이 온다.

음식의 기본이 육수, 이 집은 채수다. 멸치 빠진 국물이 맛있을까 궁금하여 물어봤다. “맞아, 음식은 물이 시작이요. 무 당근 껍질, 파프리카 속, 시든 고추, 장아찌 담고 남은 줄기, 야채 뿌리, 그러니까 색깔 있고 좋은 것은 나물로 조림으로 찬이 되고, 나머지 것들이 채수가 되는 거지요. 이것을 끓이면 안 돼, 뜨거운 물에 우려요. 끓이면 떫은맛이 나거든. 차 우리듯이 은근히 우려야 본래 단맛이 배어 나와요. 거기다 된장 풀면 된장국이고, 아욱 넣으면 아욱국이고, 쑥을 뿌리면 쑥국이 되는 거지, 쉬워!”

소금은 천일염을 2년 간수 빼서 한주먹 쥐어보고 손바닥에 붙은 것이 하나도 없을 때 쓴다. 장은 매년 담근다. 입동 전에 메주를 쑤어 석 달을 두었다가 겉이 꾸덕꾸덕 마르면 정월에 띄운다. 물 한 말에 소금 세 되를 채에 걸러 독에 붓고 염도를 맞춘다. 덜 짜면 썩고, 너무 짜면 발효가 늦다. 독 안에 홍고추 말린 것, 숯, 대추를 넣고 뚜껑을 덮는다. 양지바른 곳에 40일 남짓 둔다. 해 좋은 날 뚜껑을 열어 볕을 쬐어주고, 비 오면 얼른 뚜껑을 닫아야 한다. 이 집 장독대에 된장이 세 독, 고추장이 두 독, 그리고 간장독아지가 여럿 있다.

“되는 집은 장맛도 달다고 하잖아요? 된다는 것은 금방 되는 게 아니라. 원래 짠 것이 장맛인데 단맛이 되려면 시간이 걸려.” 장은 내가 담지만 맛은 하늘이 내는 거라 한다.

말이 나온 김에 숙취에 제일인 싱건지 담는 방법도 물어봤다. “작고 단단한 무를 무청 떼지 말고 그대로 절여요. 잘 못 절이면 그냥 물러져. 이틀 정도 무가 가라앉을 정도로 절인 다음에 꺼내 씻어요. 거기다 갓을 넣어도 좋고. 생강 고추씨 조금, 사과 1개, 그리고 찰박찰박 물을 부어야지. 근데 맹물 말고, 연밥에 쓸 연잎을 오리면 꼭지가 남잖아요? 그것을 뜨거운 물에 우려요. 다 식거든 붓고, 사나흘 지나면 맛이 들지.”

요즘 나는 가사에 정진하고 있다. 하다 보니 설거지를 넘어 요리에 관심이 많다. 딱 한 종목, 싱건지는 자급자족을 넘어 시중에 내다 파는 수준까지 가겠다는 결심을 하여 가르쳐준 대로 해봤다. 여러 날이 지나 한 국자 떠봤더니, 이것이 물인지 물김치인지, 여태 밍밍하다. 잘못 절였나, 시간이 부족한가, 아니 첫술에 배부를 리 없다.

이 집 딸은 잘나가는 수학 일타 강사였다. 취미로 마라톤을 하면서 과일과 닭 가슴살만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혈압이 50까지 떨어지는 저혈압이 왔다. 닭 알레르기인가 했더니, 항생제 알레르기였다. 닭이 어떻게 길러지는지 살펴보다가, 공장식 축산에 충격을 받아 채식주의자가 됐다. 딸은 영어도 유창해 외국손님들과 얘기에 막힘이 없다.

“2019년 유엔(UN)세계 요가의 날 행사가 광화문에서 열렸어요. 그때 각국의 요가 하는 사람들, 종교인들이 대거 방한했어요. 인도의 요기(Yogi), 오신채 안 먹는 대만 승려, 코셔푸드의 유대교인, 할랄푸드의 무슬림, 버섯 안 먹는 자이나교인 등등, 이 사람들 갈 밥집이 없는 거예요.” 오신채(五辛菜)는 파 마늘 부추 달래 흥거, 불교에서 금하는 5가지 채소다. 날로 먹으면 분심(憤心)을, 익혀 먹으면 음심(淫心)을 일으켜 수행에 방해된다고 ‘능엄경’에 나온다. 채식전문점이 더러 있지만 오신채까지 금하는 집은 거의 없다. “이 까다로운 식성을 맞추어 줄 식당이 어디 있겠어요? 전부 우리 집으로 왔어요. 그해 6월의 며칠, 여러 나라 종교인들이 각양각색 옷을 입고, 두루 앉아 밥을 먹는데 정말 대단했어요.” 딸은 한 외신기자가 ‘이 작은 집 테이블 위에서 신들의 평화가 이뤄지고 있다, 처음 본 놀랍고도 아름다운 풍경’이라 했다는 말을 전하면서, 우리 집 프라이드이고,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이라고 했다.

‘마지’ 식단은 전통식 자연식 발효식이다. 그것은 고집과 정성과 기다림의 산물이다. 그러니 힘들다. “허리는 꼬부라지고, 손톱은 다 빠지고, 발가락은 물러터지고, 이 나이 먹도록 이 고생 하고 있으니, 내가 전생에 룰루랄라 하면서 베짱이처럼 살았나 봐, 이생에 그 업(業)닦음을 하는 거라”고 어매는 말했다. 취미로 서예를 시작한 지 20여년, 지금도 짬이 나면 붓을 들어 경전을 필사한다. 평생 술 담배는 입에 대지도 않았던, 비구니보다 더 비구니 같은 ‘마지’ 어매, “우리 집 오는 사람 다 부처님 같이 맞이하는 것이 내 업장”이라 했다.

음식은 기억이라, 바닷가 ‘뻘수저’ 출신인 나는 갯것을 워낙 좋아해서 채식주의자가 되기는 애당초 난망하다. 세상에 비만 인구와 기아 인구가 비슷하고, 육식 1인분이 채식 22인분에 해당한다는 통계, 생명의 존엄성과 육식의 폭력성, 그리고 기후변화 같은 거창한 문제의식 이전에, 채식을 하면 확실히 속이 편하고, 당뇨 걱정도 줄고, 얼굴이 맑아지는 좋은 점이 많다. ‘마지’에 다녀오면서 그동안 독이 되는 음식을 너무 많이 먹었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덩달아 오신채까지는 아니어도 이틀에 하루는 약이 되는 채식을 시작해볼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광이 ‘정말로 바다로 가는 길을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바다로 가는 노력을 나는 그쳐본 적이 없다’ 목포 김현문학관에 걸린 이 글귀를 좋아한다. 시는 소질이 없어 못 쓰고 그 언저리에서 ‘잡글’을 쓴다. 삶이 막막할 때 고전을 읽는다. 머리가 많이 비어 호가 ‘반승’(半僧)이다.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와 책 ‘절절시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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