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44주년⑤] ‘5월 일기’ 주소연 “전두환 복권, 5⋅18 왜곡 카르텔 만들어져”

나윤상 2024. 5. 21.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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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강자의 왜곡이어서 안 돼"
용기 내어 눈물로 쓴 기록물 공개
‘5월 일기’ 유네스코 기록물로 등재

주소연 씨의 '5월일기'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광주여고 3학년 때 5⋅18을 겪은 그녀는 부모 몰래 도청으로 갔다.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어서 그녀는 취사반에서 김밥을 말았다. 이후 그녀는 생존해 돌아왔지만 살아있다는 사실이 비겁하다고 생각해 울분과 느낌을 손으로 직접 써 10장 짜리의 글로 만들었다. 사진은 5⋅18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주소연 씨 / 광주 = 나윤상 기자

총칼 앞에서도 '죽음의 행진'을 마다하지 않았던 5월 광주의 정신은 무엇인가? 휴머니즘의 정수인 똘레랑스의 가치를 평생에 걸쳐 설파하며 살아왔던 인문주의자 고(故) 홍세화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사람이니까. 5·18민주화운동 44주기를 맞아 <더팩트>가 5월의 기억을 여전히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를 찾아 나섰다. 1980년 그날, 광주의 5월은 그랬었고, 또 앞으로도 여전히 숭고한 이들이 피를 바친 희생의 제단 위에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편집자주]

[더팩트 l 광주=나윤상 기자] "역사적 죄인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못 받으니 왜곡의 역사가 되풀이 되는 겁니다."

기록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는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 써진 문건이다. 관공서의 공식문건, 현장기록물도 중요하지만 또 다른 의미로 사건을 겪은 개인이 만들어 낸 기록물은 매우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6세의 소녀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지금까지도 참혹했던 홀로코스트를 대변해 주었다면, 5⋅18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주소연(61) 씨의 기록은 그날 광주의 좌절과 절망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그녀가 이 기록물을 세상에 공개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5⋅18시민군을 폭도라고 매도하는 상황에서 기록물이 공개될 경우 자신을 향한 세상의 비난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5⋅18민주화운동이 국가폭력에 맞선 시민들의 의로운 항쟁이라며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지만 아직도 5⋅18왜곡 세력들은 막강한 카르텔을 형성하며 기득권에서 버티고 있는 현실은 부정할 수 없다.

주 씨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배웠다. 대한민국이 해방되고 미군정에 의해 친일파들이 다시 중용되면서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다. 이후 4⋅19로 맞이한 민주주의는 5⋅16 군사 쿠데타로 무너졌다"면서 "10⋅29로 서울의 봄이 올 줄 알았지만 5⋅18로 민주주의는 다시 무너졌다"고 말했다.

주 씨는 오랫동안 감춘 기록물을 내놓은 것에 대해 "역사는 되풀이 된다. 되풀이 되는 역사에서 승자의 기록만 남게 된다면 진실은 왜곡에 의해 덮여지는데 후손들은 왜곡된 사실을 진실이라고 믿을 것이 더 두려웠다"면서 "어느 날 전두환이 ‘회고록’을 냈는데 학살자의 역사가 위대한 지도자의 역사로 둔갑해 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없던 가슴 속의 분노가 일제히 일어난 순간이었다"고 언급했다.

주소연의 '오월 일기'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사진은 5⋅18기록관 등재기록물 중 시민들의 성명서,일기, 취재수첩 부분 주소연의 5월일기(1권)가 들어 있다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그녀가 1980년 5⋅18을 맞이한 해는 광주여자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인해 6남매 포함 8명의 가족은 남광주 교차로 인근에서 왕대포집(현 학문외과 자리)을 하며 살고 있었다. 가게 앞이 넓은 도로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위대와 계엄군간의 모습을 접하게 되었고 노동자들이 술자리를 갖는 관계로 인해 많은 정보를 접하는 계기도 되었다.

주 씨는 "일 마친 아저씨들이 막걸리 한 잔 놓고 ‘군인들이 어디에서 총을 쐈다’, ‘어디에서 학생이 죽었다’ 등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지 못 할 온갖 소문이 들려왔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 소문의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일 저녁 그녀의 집 앞에서 공수부대원들과 시위대가 대치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녀가 목격했던 장면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주 씨는 "장갑차 문이 열리고 그렇게 빠르게 군인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랐다"면서 "가게 안으로도 시위대 두 명 정도가 들어왔는데 부모님이 가게 뒷문을 열어주고 피신시켰다. 이후 곤봉을 든 군인들이 시위대를 찾으면서 위협했다. 다행히 바로 떠나 다른 일은 없었지만 평범한 가족들 앞에서 곤봉을 휘두르며 압박했던 군인의 모습은 잊을 수 없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공수부대가 광주 외곽으로 철수한 다음 날인 22일 부모 몰래 도청으로 향했다. 도청을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학교에서 배웠던 모든 것이 부정당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 씨는 "군인들은 국민을 지켜주는 고마운 아저씨들이라고 배웠고 위문편지와 선물도 보내주고 그랬는데 왜 그들이 국민을 죽이려하는지 혼란스러웠다"고 말했다.

22일 도청으로 간 그녀 앞에 보이는 장면은 ‘관이 부족하다’는 누군가의 외침이었다. 그 외침에 광주시민들이 현장에서 60만 원 정도가 모였는데 그녀는 이 광경에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피가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고 그녀도 헌혈에 동참하려 했지만 많은 시민들이 서로 헌혈하겠다고 나서 간호사가 피가 많이 모였으니 학생은 헌혈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시민 모두가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고 그녀도 어떤 일이라도 돕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는 도청 옆 부속건물인 대강당에서 취사업무를 하게 되었다.

취사업무에서 맡은 일은 김밥을 마는 일이었다. 밥은 외부에서 가져왔다. 김밥이라고는 하지만 밥 위에 김치 한 가닥 들어간 것이 재료의 전부였다.

박병규 열사는 1980년 동국대학교 1학년 생으로 도청에서 학생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했다. 27일 새벽 총상으로 사망했다. 국립5⋅18민주묘지 1묘역 2-36번에 안장되어 있다 / 국립5⋅18민주묘지

취사반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10명 정도였는데 안전을 위해 서로의 신분을 묻지 않다보니 지금도 그들이 누구인지는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그녀를 취사반으로 데려다 준 오빠는 정확히 기억했다. 그녀에게는 생명의 은인과 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당시 동국대를 다니는 대학생이라고 해서 ‘동국대 오빠’라고 불렀다. 그는 박병규 열사였다.

박 열사는 동국대 1학년 신분으로 시민군에 참여했다. 27일 새벽 공수부대원들의 총격에 사망했다. 그는 국립5⋅18민주묘지 1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주 씨는 박 열사에 대해 "22일부터 26일까지 취사반에 있었는데 당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오빠가 시민수습위원회 회의 상황과 현재는 어떤 분위기다는 이야기까지 차분하면서도 친절하게 설명해줘서 고마웠던 기억이 있다"고 회상했다.

26일 군과 협상은 결렬되면서 들썩였던 도청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그녀의 말을 빌리면 ‘파장’ 분위기였다. 식사를 하러 오는 사람도 자연스럽게 줄어들면서 취사반도 해체되었다. 그녀는 5일 만에 집으로 갔다. 집에서는 딸이 없어졌다고 난리가 났는데 살아서 돌아오니 다시 못나가게끔 단속이 이뤄졌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있을 수 없었다. 군인들이 도청으로 들어온다고 하는데 본인 혼자서 피하는 것 같아서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어머니의 눈을 피해 다시 도청으로 갔다.

도청에 온 그녀를 만난 사람도 박 열사였다. 거기에서 그녀는 죽음을 각오하고 유서도 썼다. 나중에 그녀의 유서는 발견이 안 됐다. 유서가 발견되었으면 그녀 역시 잡혀서 혹독한 심문을 받을 수 있었다.

27일 새벽 2시 경 박 열사가 취사반 사람들에게 현재 군이 외곽을 뚫고 광주시내로 들어오고 있다는 상황을 전하며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그를 따라 간 곳은 동명교회였다. 박 열사는 그녀들에게 계엄군에게 잡히지 말고 아침이 되면 집에 가라고 했다. 자신의 유서가 발견되지 않은 것에 주 씨는 "박 오빠가 도청에 돌아가 없애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도청 상황과 27일 새벽 도청에서 동명교회까지 어떻게 이동했는지에 대해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는 주소연 씨 / 광주 = 나윤상 기자

주 씨는 "거리에 사람 한 명 없고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새벽이었다. 세월이 훨씬 지난 뒤 그 길을 다시 걸어보았다. 그 길은 지금도 변함없이 있었다"고 언급했다.

새벽 4시가 되었을 때 거리에서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새벽 4시로 기억한 그 방송은 기록에는 새벽 2시 30분으로 되어 있다. 박영순 씨의 목소리였다.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을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이 방송에도 그날 새벽 광주는 조용했다. 그녀는 아침이 되자 집으로 돌아왔다. 혼란으로 가득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참을 수 없어 그녀는 10장 정도로 그날의 일에 대한 소회를 기록했다. 나중에 잡힐까봐 세세한 이야기는 생략했지만 그날의 울분과 느낌은 정확하게 적었다.

그녀의 오월일기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남았다.

주 씨는 "그날 이후로 스스로 비겁했다고 생각한다. 살아남은 것 자체가 비겁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당시 글로 써서 숨겨둔 건데 5⋅18을 왜곡하는 세력들이 오히려 당당한 모습을 보고 너무 화가 났다. 세월이 지나 후손들이 ‘전두환 회고록’을 보면서 왜곡시킨 5⋅18을 기억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두렵다"고 전했다.

그녀는 교육공무원이라는 신분에 영향을 줄지 모르는 자신의 기록물을 공개했다. 그녀는 인터뷰 내내 자신이 비겁했다라고 하지만 그 누가 그녀에게 비겁했다는 멍에를 씌울 수 있을까. 그녀는 자신이 믿고 의지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을 뿐이다. 그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야 한다.

kncfe00@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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