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착취한 포주는 지원금 받는데… 미아리 텍사스촌의 역설 [추적+]

홍승주 기자 2024. 5. 2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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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심층취재 추적+
성매매 집결지 ‘미아리 텍사스촌’
재개발로 철거 작업 진행 예정
130여명의 여종사자 갈 곳 없어
성 착취한 포주는 지원금 받는데
착취 당한 여성은 보상도 못 받아
생계비ㆍ주거비 등 이주대책 필요

여성의 성을 착취해온 일명 '포주'는 지원금(이사비용)을 받는다. 반면, 성을 착취당해온 여성은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날 위기에 몰려 있다. 그런데도 정부와 지자체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세상 역시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재개발이 확정돼 철거를 앞두고 있는 서울의 마지막 성매매 집결지 '미아리 텍사스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더스쿠프가 이곳을 가봤다.

서울에서 마지막 남은 성매매 집결지인 미아리 텍사스촌의 한 골목.[사진=더스쿠프 포토]

지하철 4호선 길음역 10번 출구 앞. '미성년자 출입 금지'란 심상찮은 팻말이 붙어있는 이곳엔 '집창촌' 미아리 텍사스촌(서울 성북구)이 있다. 공가空家(빈집)란 빨간 글씨가 쓰여있는 집들 앞에는 유리조각, 천, 각종 쓰레기가 널려있다.

공가 사이 골목으로 들어가면 빽빽이 늘어서 있는 닭장 같은 업소들 앞에 한 사람이 겨우 앉을 만한 빨간 천막들이 즐비하다. 빨간 천막에는 텍사스촌의 '삐끼 이모'들이 앉아 있다. 오후 7시. 아직은 해가 남아 있는 시간이지만 차양이 덮여 있는 골목은 이미 어둑하다.

1960년대 만들어진 미아리 텍사스촌은 서울에서 마지막 남은 성매매 집결지다. 한때 300곳이 넘는 업소들이 뒤엉켜 불야성을 이뤘지만 2004년 성매매 특별법이 발효한 이후 쇠퇴의 길을 걸었다. 지난해 11월 관리처분계획 인가가 떨어진 이곳에선 현재 재개발 절차가 진행 중이다.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조합 측은 올해 초까지 이주를 마무리한 뒤 철거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문제는 재개발과 무관하게 이곳에 남아 있는 여종사자 130여명(경찰 추산)의 거취다. 이들은 갈 곳이 없다며, 지난 11월부터 현재까지 성북구청 앞에서 집회를 열고 '이주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텍사스촌 여종사자 대표 A씨는 "하루아침에 쫓아낸다고 하면 갈 곳이 없다"며 "우리가 이주 전 생계ㆍ주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시간과 이주대책이 필요하다"고 토로했다. 여종사자 B씨도 "우리가 쫓겨나 길바닥에서 죽든 말든 세상은 아무런 관심 없는 것 같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호객 행위를 하는 일명 '삐끼 이모' C씨도 "암담할 뿐"이라면서 하소연을 입에 담았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사람들은 미아리 텍사스촌에서 20~30년씩 있었던 사람들이에요. 못 배운 사람들도 많죠. 지금 밖에서 다시 시작하라고 하면 적응하기 어려울 거예요."

미아리 텍사스촌의 여종사자들은 이주대책을 원하고 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그렇다면 텍사스촌 여종사자들은 왜 보호망 밖으로 내몰린 걸까. 이유가 있다. 이곳에서 먹고 자며 일을 해온 여종사자들은 세입자도 주민도 아니다. 이 때문에 도시정비과정에서 어떠한 보상도 받을 수 없다.

정부가 성매매 피해자를 대상으로 '자활지원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긴 하지만 이주대책과는 거리가 멀다. 아이러니한 건 그동안 여종사자의 성을 착취해온 업주들은 보상을 받는다는 거다. 재개발조합에 따르면, 텍사스촌 업주들은 감정평가를 받은 후 업장 크기에 따라 2000만원에서 5000만원의 이사 비용을 받는다.

그렇다고 여종사자들을 지원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성북구청은 2017년에 제정한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매매 예방 및 성매매 피해자 등의 자활 지원 조례'를 근거로 성매매 여종사자들의 주거비ㆍ생계비 등을 지원할 수 있다. 각각의 조례를 근거로 성매매 여종사자의 자활을 지원한 사례도 많다.

2017년 전주 선미촌을 폐쇄한 전주시는 이곳에서 일을 해온 여종사자 한명당 생계비ㆍ주거비ㆍ직업훈련비ㆍ자립지원금 등 최대 2700만원을 지원했다. 2021년까지 총 여종사자 38명이 지원을 받았는데, 전주시는 이들 중 상당수가 자활센터에 연계된 사업장에서 근무하거나 판매직에 취업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대구 자갈마당도 2019년 성매매 집결지를 해체할 당시 여종사자 1인당 2000만원의 생계비ㆍ주거비를 지급했고, 91명이 지원을 받았다. 현재 철거 중인 파주시 용주골의 경우, 여종사자들에게 2년 동안 최대 4420만원의 지원금을 지급할 것을 약속했다.

그렇다면 성북구청은 왜 아무런 지원책도 내놓지 않고 있는 걸까. 이유는 알 수 없다. 구청 측은 "지원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말만 반복했다. 서울시는 "시민들의 부정적인 의견을 고려해 이주비 등 지원금 대신 자활 프로그램 등 장기적인 지원만 하고 있다"면서도 "관할 지역인 성북구청이 이주대책을 추진하면 함께 참여할 의사는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오랫동안 성매매를 묵인해온 국가나 지자체가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신박진영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정책팀장은 "성매매 집결지를 폐쇄하는 것은 단순히 낙후된 곳을 폐쇄하는 수준이 아니라 국가가 그곳에서 어떤 일을 저질렀고 방관했는지를 반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며 "사과와 배상이란 의미를 담아 여성종사자를 지원할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어 "국가가 여성종사자의 지원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당장 기댈 곳이 없기 때문에 또다시 포주들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이하영 여성인권센터 '보다'의 소장도 이렇게 설명했다. "성매매 집결지에 오래 있었던 여성종사자들은 다른 자원을 받을 수 없어서 당장의 생계가 막막하다. 더구나 이곳에서 쫓겨나면 더 열악한 성매매 환경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정부나 지자체가 성매매 여성종사자들에게 최소한의 생계비ㆍ주거비를 지원해야 하는 이유다."

'성착취의 공간' 텍사스촌을 어쩔 수 없이 삶의 터전으로 삼아왔던 사람들. 이들이 기다리는 건 엄청난 액수의 보상금이 아니다. 이곳을 떠날 준비에 필요한 시간과 도움, 그리고 대화다. "우리 얘기는 전부 묵살당하는 기분이에요. 미아리의 상황을 들어라도 줬으면 좋겠어요." 한 여종사자의 말이 텅 빈 텍사스촌 골목을 맴돌았다.

홍승주 더스쿠프 기자
hongsam@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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