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같은 한땀 한땀… 한국 근현대 자수, 예술이 되다

박동미 기자 2024. 5. 21.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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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170여점 전시… 눈여겨볼 작품 5점
안제민 ‘자수 지장보살도’
남성 자수장인 힘 서린 표현
김혜경 ‘정야’속 여성 모습
회화로 착각할 정도로 섬세
나혜석 조카 나사균 ‘죽계’
닭 깃털 입체감 공력 담겨
나사균의 ‘죽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김혜경의 ‘정야’.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근현대 자수 :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발견과 놀람, 그리고 감탄이 이어져서다. 자수는 흔히 여성의 일로 인식됐는데, 전시에선 명성 높았던 남성 자수장인들을 만날 수 있다. 또 작품에 손을 대고 싶은 충동에도 휩싸인다. 캔버스 위에 그려진 유화처럼, 매끄럽고 정교한 자수 작품이 많아서다.

19세기에서 현대까지, 주류 미술사에서 소외됐으나 한 땀 한 땀 ‘예술’의 세계로 들어선 한국 자수의 전모와 역사를 살피는 전시에서 절대 놓쳐선 안 되는 작품을 골라 소개한다. 전시를 기획한 박혜성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출품된 170여 점 모두 귀하지만, 예술사적·미술사적으로 더욱 눈여겨봐 줬으면 하는 것들을 엄선했다”며 5점을 추천했다. 전시는 8월 4일까지 이어지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관람료 2000원(덕수궁 입장료 별도).

안제민의 ‘자수 지장보살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자수 놓는 남자를 아세요?… 안제민의 ‘자수 지장보살도’ = 조선 시대 평안도에는 ‘안주수’라는 자수장인 남성 집단이 존재했다. 꼬임에 힘이 서려 있고, 표현도 과감해 품질이 보장됐다. 서울 창신동 지장암 소장 ‘자수 지장보살도’는 바로 그 안주수 출신 중 한 명인 안제민이 수를 놓았다. 가부좌를 한 지장보살의 왼쪽엔 무독귀왕, 오른쪽엔 도명존자가 자리한 형식으로, 박 학예연구사에 따르면 간략화, 소형화된 20세기 불화의 경향을 잘 드러낸다. 수를 놓기 편하도록 복잡한 표현은 생략하고 녹색, 황토색, 적색, 백색 등 단순한 배색으로 처리된 게 특징이다. 1917, 비단에 자수, 125.7×70.7㎝.

송정인의 ‘작품 A’.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만지지 마세요, 자수 맞아요…김혜경의 ‘정야’ = 김혜경(1928∼2006)의 이화여대 자수과 졸업 작품이다. 당시 미술대학에 재직한 김인승(1910∼2001) 교수가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김혜경이 수를 놓았다. 벽난로 앞에서 불을 쬐며 독서를 하고 있는 여성은 자수 소재로서도 당시 매우 드문 사례다. 한복 주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는 바늘땀, 소파의 촉감 등 자수의 매력을 한껏 살린 명작이다. 아주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회화로 착각할 정도로 섬세해 관람객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1945년 이화여대 자수과에 입학해 1960년부터는 후학을 양성한 김혜경은 ‘수(繡) : 기초기법’(1983) 등을 출간하며 수의 체계화에 일조했다. 1949, 비단에 자수, 92×66㎝.

◇나혜석 조카 나사균의 ‘죽계’ = 비단에 수를 놓아 가림막으로 사용한 작품이다. 고모 나혜석과 같은 일본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한 나사균(1913∼2003)의 졸업작품으로, 길상의 의미를 지닌 대나무 숲에 한 무리의 닭을 등장시켰다. 일반적으로 화목의 상징인 원앙이 아니라 닭을 선택한 것이 특이점. 대나무 잎의 광택감과 닭 깃털의 입체감 등이 작품에 들인 작가의 공력을 느끼게 한다. 나사균은 1937년 졸업 후 경성여자상업학교에서 수예교사로 근무했다. 학생들을 전국대회에 참여시켜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자신은 조선미술전람회에서도 입선했다. 1937, 비단에 자수, 113.5×114㎝.

최유현의 ‘팔상도’ 일부분.

◇국가무형문화재 자수장 최유현의 ‘팔상도’ = 1996년 자수장으로 지정받은 최유현(1936∼)이 10년 이상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것으로, 종교미술로서의 불교 자수의 입지를 넓혔다. 양산 통도사 영산전에 소장된 ‘팔상도’(1775)를 모본으로 제작됐다. 팔상도는 부처가 태어나 도를 닦고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압축해 묘사한 것이다. 최유현의 자수는 높이만 3m에 달하는 거대한 8폭 비단 자수로 그 웅장함과 정교함에 압도된다. 작가는 통도사 팔상도를 모사한 채색 원화 위에 천연 염색한 수실을 사용해 화면 가득하게 수를 놓았다. 1987∼1997, 비단에 자수, 각 282×178.5㎝.

◇추상화? 실험 자수 추구한 송정인 ‘작품 A’ = 1960년대 부산에서 자수와 회화를 동시에 배운 송정인은 전통적인 자수 기법과 도안, 재료를 거부한 실험적인 추상 자수 작가다. ‘작품 A’는 마대에 염색을 한 후 그 위에 수를 놓았다. ‘제14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공예부에서 입선하며 미술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게 된다. 그는 부산·경남 지역 화랑을 돌며 현대미술의 흐름을 파악했고, 전통자수의 재료·도안·기법적 한계를 넘어 현대적인 자수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도안 모사나 자연 풍경의 사실적 재현 대신 자수를 매개로 정신적인 풍경을 표현했다. 1965, 마대에 자수, 170×313㎝.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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