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전쟁]② “기술 강국 코리아, 국제 표준 논의 주도권 쥐어야”

윤희훈 기자 2024. 5. 21.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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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 분야 전문가 좌담회
표준 선도 기업에 대한 인센티브 방안 제언
“표준으로 기술 선점한 기업, 시장 지배력 인정해야”
5월 9일 서울 강남구 조선팰리스에서 첨단산업 국가표준화 전략 좌담회가 진행되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손승우 두산에너빌리티 부사장, 임채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진종욱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장, 이정준 LS일렉트릭 고문, 조성환 국제표준화기구(ISO) 회장, 이해성 전주대 교수. /박상훈 기자

빠르게 발전하는 첨단산업 분야의 표준 패권을 두고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하다. 과거 기술 영역으로 다뤄졌던 표준은 이제 기술패권 경쟁의 수단이 되고 있다. 디지털 전환과 기후 위기 등 산업 구조와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선 한국도 전략적인 표준화 추진이 시급한 상황이다.

표준 패권의 시대, 한국의 표준 전략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조선비즈는 정부와 기업, 학계 등 전문가 6인을 초청해 한국의 첨단산업 표준 전략의 미래를 논의하는 좌담회를 열었다. 지난 9일 서울 역삼동 조선 팰리스 강남에서 열린 좌담회에는 조성환 국제표준화기구(ISO) 회장, 진종욱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장, 손승우 두산에너빌리티 부사장, 이정준 LS일렉트릭 고문, 이해성 전주대 교수가 참여했다. 좌담회 진행은 산업부 관료 출신으로 지식경제부 차관,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임채민 법무법인 광장 고문이 맡았다.

임채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법무법인 광장 고문)이 9일 서울 강남구 조선팰리스에서 열린 첨단산업 국가표준화 전략 좌담회를 주재하고 있다. /박상훈 기자

참석자들은 표준 경쟁이 치열해진 지금 “중장기적으로 끌고 나갈 표준 전략이 필요하다”(진종욱 원장)며 “기술 강국 대한민국이 향후 첨단산업에서 초격차 역량을 유지하기 위해선 국제 표준 경쟁에서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이해성 교수)고 강조했다.

표준 분야에 대한 기업의 관심을 끌어올리기 위한 인센티브에 대한 제언도 나왔다. 이정준 고문은 “기술을 개발해 표준까지 제안한 기업에 대해선 해당 분야에서 일정 기간 선점할 권리를 인정하고,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좌담회 전문.

임채민 고문(이하 좌장) : 지금 세계는 바야흐로 ‘변화의 시대’이다. 변화가 빠르다는 수준을 넘어 변덕스러운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대가 변하면서 표준의 역할과 위상도 달라지고 있다. 기업도 생존을 위해서는 기술우위를 바탕으로 표준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국내에서도 표준에 대한 새로운 룰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는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가.

진종욱 국가기술표준원 원장. /박상훈 기자

진종욱 원장 : 미국과 중국 간 기술 경쟁이 치열하다. 나아가 인공지능(AI)과 디지털 혁명을 통한 산업 대전환을 앞둔 상황에서 기술 경쟁의 주요 수단인 표준 부분으로까지 국가 간 경쟁이 확대됐다. 지난해 미국이 백악관에서 국가표준화 전략을 발표했으며, 중국도 표준전략을 새롭게 내놨다. 전방위적으로 확산하는 자국 우선주의 정책이 표준 분야까지 확산한 것이다. 국내에서도 단기적인 대응책을 넘어, 중장기적으로 끌고 나갈 표준 전략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했다.

현재 정부는 기술혁신과 세계시장 선점을 지원하기 위해 12개 첨단산업 분야를 중심으로 국가표준화전략을 마련했다. 이번 표준화 전략의 차별화 요소는 민간 주도의 표준화 추진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간 정부 정책은 공공에 방점을 두면서 실행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또한 한번 수립한 전략을 줄기차게 밀고 나가기보다는, 기술 변화에 대응해 전략을 현행화하고 수정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차별화 포인트다.

좌장 : 민간 참여를 유도하고 상시로 유연하게 수정할 수 있는 표준 전략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우리는 이렇게 준비하고 있는데, 외국은 어떻게 대비를 하고 있나.

조성환 국제표준화기구(ISO) 회장./박상훈 기자

조성환 회장 : 과거 표준의 목표가 공익에 중점을 뒀다면, 지금 트렌드는 미래 사회를 주도하고, 기술 발전을 대비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특히 우리가 강대국이라고 부르는 선진국들이 표준 주도권을 강화하려는 준비를 착실하게 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물밑 경쟁도 치열하다. 현재 국제 표준 논의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북미권, 유럽권,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권역까지 총 3개의 권역이 숨 막히는 경쟁을 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ISO 회장으로서 국제표준화 기구를 이끌고 가야 한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좌장 : 한국의 표준 경쟁 참여가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오늘이 가장 빠른 날’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이제라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다. 학계에서는 표준 논의를 어떻게 보고 있나.

이해성 교수 : 우리나라는 학계에서도 표준의 중요성을 인식한 게 얼마 되지 않는다. 과학 분야에서는 나노 소재의 기준이 논란이 되면서 표준의 중요성에 관한 인식이 커졌다. 당시 국제 콘퍼런스에서 나노 표준 범위가 100나노미터(㎚) 이하이므로 100.1㎚는 나노 영역이 아니라고 결론이 난 것이다.

이해성 전주대 신소재화학공학과 교수. /박상훈 기

이러한 논의 과정을 보면서 표준이 특정 산업의 기준이 되기도 하지만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시장 접근의 제한으로 작용한다고 인식하게 됐다. 따라서 최근 학계에서는 표준 영역에서 기업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많이 나온다.

과거 우리 기업들은 미국이나 일본의 기술을 벤치마킹해 빨리 따라잡는 ‘세컨드 무버’ 전략을 취했다. 하지만 이제는 세계 일류 기술 보유국이 됐다. 표준 분야에서도 주도권을 쥐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좌장 : 기업 입장에선 표준 정책과 관련해 정부의 어떤 지원이 필요한가.

손승우 두산에너빌리티 부사장. /박상훈 기자

손승우 부사장 : 기업은 기본적으로 ’표준’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타사와 차별화를 하려고 한다. 표준 분야가 공정한 경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모든 기업이 독점 시장을 꿈꾼다. 기업은 ’하지 말라’고 해도 돈을 벌기 위해 자기 기술로 차별화하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표준을 앞세워 기존 시장의 진입을 막고, 시장을 규제하는 데 활용하려고 한다. 대부분의 선도국은 표준이라는 이름으로 소재를 제한하거나 규정을 신설해 자국산 소재나 제품만 쓸 수 있게 한다. 우리도 이런 방식으로 새로운 시장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정준 고문 : 국내 기업 중에선 우리 회사가 표준 분야에서 체계적인 접근을 하는 편이다. 표준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기업이지만, 여전히 전략적으로 어떻게 시장을 주도할지에 대해선 부족한 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기업이 시장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품개발과 시장출시에 드는 시간을 단축해야 한다. 이러한 적시성(time to market)을 위한 표준의 역할은 계속 확대되고 있다. 따라서 LS일렉트릭은 확보한 기술을 적시에 표준 구축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패스트 센터’를 운영 중이다. 모든 과정을 신속하게 해야만 시장이 원하는 속도에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정부 차원에서도 글로벌 표준 동향을 기업에 전달하는 역할을 늘렸으면 한다.

좌장 : 이러한 전략을 구체적으로 세우려면, 우리의 기술 수준이 어디까지 왔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게 선행돼야 한다. 또 세계 각국이 표준이라는 이름으로 실시하는 규제에 대해서도 정확히 파악하고, 제대로 알려줄 필요가 있다.

조성환 : 표준 영역과 기술 영역을 잘 구분해야 한다. 국가 차원의 표준화 전략을 수립하고, 첨단 산업군에서 산업정책, R&D 및 표준전략이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부 역할의 핵심이 돼야 한다.

좌장 : 국가 R&D 과제를 수행하면서 바로 표준 수립으로 이어지도록 프로토콜을 갖춰야 하는 것 아닌가.

조성환 : 정책 수립 과정에서부터 기업의 수요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을 핵심 사안으로 고려해야 한다. 삼성과 SK, 현대, LG 등 국내 대기업은 매년 수십조원을 R&D에 투자한다. 이 과정에서 ’정부와 협업을 하니 참 편하다’는 반응이 기업에서 나와야 한다. 그런데 특정 사례를 보면 세제 혜택을 얼마 해주겠다면서 수백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한다. 그런 절차나 후속 조치가 까다로워서 ‘안 받으면 그만’이라는 기업도 많다.

이정준 LS일렉트릭 고문. /박상훈 기자

이정준 : 기본적으로 국내 기업들의 표준에 대한 관심도가 낮다. 표준화 전략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우리 회사조차 회사 내 표준 관련 부서가 없다. 기업들의 관심을 끌어올리려면, 기업이 표준을 만들어 개발한 시장에 대해선 일정 기간 시장 지배력을 인정하고, 기업들이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조성환 : 맞는 말이지만 참 쉽지 않은 이야기다. 선제적인 R&D로 기술을 확보했더니, 중소기업과 상생하라며 기술을 공유하라고 하는 경우도 많다. 과감한 투자로 기술을 개발했는데, 시장에서 규제하면 기업만 손해를 입게 된다.

이해성 : 미국의 경우, 기술을 개발하고 표준을 수립한 기업에 대해선 몇 년간 해당 시장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상업적 이익을 보장함으로써 기술개발을 촉진하는 것이다. 미국의 사례를 연구해 국내 적용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좌장 : 의미 있는 이야기이다. 우선 정부는 지속적인 표준정책 홍보를 통해 표준에 대한 우리 기업의 인식을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 제언처럼 표준화 수단으로 배타적인 성공을 이루는 기업의 사례를 전파하는 것도 충격요법의 하나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현재 국표원을 중심으로 정부와 민간이 함께 첨단산업 분야의 국가표준화 전략을 수립해서 발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산업계 전반으로 표준화 인프라 확산의 계기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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