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증원' 사태가 던진 질문…사라진 대화·타협 '일상의 사법화'

황두현 기자 김기성 기자 2024. 5. 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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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고소고발]上 '의대 증원'마저 사회적 갈등 '법 심판대'로
사회갈등 해소 시스템 작동 안해…사전에만 존재하는 '양보··타협'
서울 서초구 법원 청사 앞으로 시민 등이 지나고 있다. 2024.5.16/뉴스1 ⓒ News1 박정호 기자

(서울=뉴스1) 황두현 김기성 기자 = "정치가 사법에 종속된 건 이미 상수다. 이제는 일상의 사법화가 진행되고 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행정 영역인 의대 정원 증원 문제가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게 된 상황을 이렇게 진단했다. 항고심 판단을 앞둔 시점이었지만 구 교수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법원이 의대 증원 문제에 대해 정부의 손을 들어줬지만 의료계는 재항고했고 대법원 판단이 나올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며 불복을 선언했다.

사회적 신뢰가 바닥나면서 구성원 간 갈등이 대화로 해결되지 못하고 모든 사안을 사법부 판단에 기대는 '일상의 사법화'가 가속화하고 있다. 법원에는 처리가 힘들 정도로 소송 서류가 매일 쌓이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주장이 대법원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승복 대신 법이 잘못됐다며 헌법재판소로 향한다. 판사의 신상을 털고 공격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이러다 사법 시스템이 붕괴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 수도 이전부터 의대 증원까지...'이슈 블랙홀' 된 법원

21일 법조계 등에 따르면 법원과 헌법재판소, 검찰·경찰·공수처 등은 의대 증원 관련 다수의 소송과 고소·고발 사건을 살펴보고 있다.

의대 증원 처분의 집행정지 신청 사건 등 법원에 제기된 관련 행정소송은 수십 건에 달한다.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헌법 소원도 제기될 예정이다.

수사기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의사단체는 조규홍 복지부 장관과 박민수 차관을 업무방해 등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고, 조 장관 등을 직권남용 등 혐의로 공수처에도 고발한 상태다. 박 차관은 여성 의사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도 고발됐다.

주요 사회적 갈등이 사법의 영역으로 넘어오는 사례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과거 정부와 이해당사자 간 협의되던 이슈들은 정치적 갈등이 첨예해진 2000년대부터 법의 심판을 받아왔다.

특히 민주화의 산물로 탄생한 헌법재판소가 '최종 심판자'에 오르는 일도 부쩍 잦아졌다. 신행정수도 건설 특별법(2004년), 호주제 폐지(2005년), 노무현·박근혜 대통령 탄핵(2004·2017년) 등 헌재는 주요 정치·사회적 이슈의 중심에서 정당성을 판단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전 사회 영역에서 각자의 이익만 생각하고 소통을 통해 공동선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결여되고 있다"며 "최소한 정치의 영역은 문제를 해소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오히려 우리 사회는 정치가 갈등이나 분쟁을 조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서울특별시의사회에서 열린 젊은의사 비상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비대위원장을 맡은 박지현 대한전공의협의회 비대위원장(왼쪽 셋째)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왼쪽 둘째부터 조승현 대한 의과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 회장, 박 위원장, 김지성 전임의 비상대책위 위원장. 2020.9.1/뉴스1 ⓒ News1 허경 기자

◇ 대화 대신 "법대로 하자"…갈등 장기화 불가피 사회적 갈등이 법원 판단을 받는 게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해당사자들 간 대화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의대 증원 갈등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지난 2월초 '의료개혁 민생토론회' 개최한 후 엿새 만에 '2000명' 증원 계획을 발표했고, 의료계는 증원 규모를 두고 구체적인 협의가 없었다며 반발하며 집단 사직했다.

이후 사직서 수리금지 명령이 내려졌지만 전공의는 사직을 강행했고, 정부는 "법적조치를 하겠다"며 엄포를 놨다. 그러나 의대 교수진마저 전면 재검토를 요구하며 갈등이 심화했다. 이 가운데 증원 집행정지 신청은 잇따라 각하됐다.

항고심 결과가 나온 지난 16일에도 양측은 승복하기는커녕 "증원 타당성이 입증됐다"거나 "대법원 판단을 받겠다"고 맞섰다. 이 과정에서 환자들의 예약은 취소되거나 뒤로 밀렸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번 사태의 핵심인 전공의 역시 현장에 복귀할 조짐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슈의 규모를 떠나 사법의 판단을 통해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며 "대화와 협상을 이어갈 역량도 없고, 갈등의 양상과 정도도 커져 주체적으로 해소하기 어려워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 진영 논리·국민 불신·사법부 자초…"3박자 결과물"

전문가들은 극심해진 진영 논리가 국민들의 정치 불신을 낳으면서 사법의 영역에서 갈등을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진단한다.

이른바 여·야가 '민주화 동지'이던 김영삼·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정치권의 소통이 활발했으나 탄핵 국면을 계기로 단절됐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정치권에 대한 국민 불신을 심화시켜 이슈 초기부터 사법부를 찾는 수순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아가 사법부가 이같은 세태를 자초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원이 법적인 문제와 정치적 사안을 구분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판단하면서 사법부 불신도 가중됐다는 얘기다.

지난달 30일 서울고법이 집행정지 신청 항고심에서 "모든 행정 행위는 사법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밝히며 "5월 중순 결론을 내리기 전까지 (증원 관련) 최종 승인을 멈춰 달라"고 말한 게 하나의 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치적 선택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는 의대 증원 문제까지 법원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법과 정치적 판단은 다른 건데, 법원이 개입할수록 같이 망가질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각각의 영역을 존중하고 소통 창구를 다변화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장 교수는 "정치권과 사법부 간 통일적인 잣대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한상희 교수는 "정치권 내 갈등 해결이 어렵다면 시민사회와 소통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ausur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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