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든 시인’은 왜 자신을 그었나… 인간, 그 영원한 이방인에 대하여 [2024 칸영화제]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4. 5. 20.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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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칸영화제] 벤 위쇼 주연 ‘리모노프: 더 발라드’
프랑스 칸영화제는 세계 영화의 가장 뜨거운 현장이자 지금 이 순간 세계인이 열광하는 시네마의 준거점입니다. 제77회 칸영화제 현지에서 칸 황금종려상 후보인 ‘경쟁 부문(In Competition)’ 진출작과 관련한 소식을 빠르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초반 도입부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는 ‘칼을 든 시인’이었습니다. 소련 시절의 러시아에서 태어나, 미국 뉴욕을 건너가면서도 그는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 실망해 다시 러시아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역시 실망하지요.

이 세계에 인간의 완전한 이상을 실현할 장소가 없다’는 절망과 환멸 때문에 그는 칼로 타인을, 그리고 자신을 베고 찌르기 시작합니다. 올해 제77회 프랑스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영화 ‘리모노프: 더 발라드’ 설정입니다. 이 영화를 20일(현지시각) 칸영화제 뤼미에르 극장에서 관람하며 살펴봤습니다.

칸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 ‘리모노프: 더 발라드’에서 주인공 리모노프 역을 맡은 벤 위쇼. 골든글로브와 에미상 남우조연상을 받은 그는 이번 작품에서 ‘잔뜩 화가 난 이방인’을 연기합니다. [칸영화제 웹사이트]
영화는 러시아의 작가이자 정치인이었지만, 이제 많은 이들에게서 망각된 한 남성의 전기영화입니다. 그의 이름은 에두아르드 리모노프.

리모노프는 소련 시절의 러시아(현재의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자신을 시인으로 여겼지만, 공산주의 사회 내부에서의 예술이란 언제나 전체주의의 이상 아래 놓여 있었고, 예술가란 작자들도 저항보다 순응에 익숙했습니다. 리모노프는 모스크바 체류 중에 평생의 연인이 될 엘레나와 사랑에 빠지고, 둘은 즉시 뉴욕으로 건너갑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심장’ 뉴욕에서의 삶도 엉망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초호화 부티크가 즐비한 소비의 천국이자 마약과 일탈과 일상화된 공간이었으니까요.

리모노프는 ‘공산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를 동시에 경험한 인물’로서 자신이 보는 사회의 현실과 이상을 책으로 써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됩니다. 하지만 세상은 장밋빛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모델 일을 택한 연인 엘레나가 ‘자본주의 성(性)문화의 상품’으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20일(현지시각)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은 영화 ‘리모노프: 더 발라드’의 출연진과 제작진들. 주연 리모노프 역을 맡은 벤 위쇼(오른쪽 네 번째)와 연인 엘레나 역을 맡은 빅토리아 미로시니첸코(왼쪽 네 번째). [EPA·연합뉴스]
리모노프는 현대의 자본주의에 강하게 질문합니다. “We‘re doing great?(우리 잘 지내고 있는 거 맞아?)” 리모노프는 뉴욕의 환멸을 가슴에 품고 다시 소련으로 돌아갑니다.

서방세계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다시 소련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고국은 열광하지만, 그것 역시 리모노프에겐 증오심 가득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는 냉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면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킬 사회로의 당 활동과 전복적 시도(테러 등)을 꿈꿉니다. 그는 결국 수감되고 유배생활 끝에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봅니다. 그 사이에 소련은 사라졌지만 말입니다.

20일(현지시각) 칸영화제 포토콜에 참석한 배우 빅토리아 미로시니첸코. 그는 이번 작품에서 자본주의 성문화의 ‘상품’으로 전락해가는 과정을 밀도 있는 연기로 보여줍니다. [AFP·연합뉴스]
영화 ‘리모노프: 더 발라드’는 성적 수위가 높습니다. 엘레나를 연기한 배우 빅토리아 미로시니첸코의 노출 연기가 과감한데, 실오라기 하나를 걸치지 않고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눕니다. 하지만 연인의 성관계보다도 리모노프가 자신의 절망을 온몸으로 견디기 위해 길거리의 노숙자와 성관계를 강제로 맺는 장면은 충격에 가깝습니다.

주인공 리모노프는 독특한 인물입니다. 냉전 시대의 두 체제를 동시에 경험했고 이를 글과 삶으로 알린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절반으로 쪼개진 두 개의 세상 속에서, 자신이 머무를 장소가 없다는 것, 리모노프의 그런 고민은 현재를 살아가는 관객에게도 유효한 것만 같습니다.

그는 저항가였지만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낭만적인 작가였습니다. 벤 위쇼는 깊게 따지고 보면 결국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불안을 표정과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그가 독백으로 “I’m nowhere(나는 어느 곳에도 없다)”라는 말은 이 영화의 중심을 이룹니다.

영화 ‘리모노프: 더 발라드’의 티켓. 20일(현지시간) 프랑스 칸 팔레 드 페스티벌 뤼미에르 극장에서 관람했습니다. 이날 상영은 2300석에 빈 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성황을 이뤘습니다.
20일(현지시각) 오전 8시경 칸영화제 본관인 팔레 드 페스티벌의 뤼미에르 극장 레드카펫 모습. ‘리모노프: 더 발라드’를 관람하려는 인파들이 몰려 아침부터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김유태 기자]
영화 주인공 리모노프 역은 배우 벤 위쇼가 연기했습니다. 한국에는 얼굴이 덜 알려진 편이지만 2019년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과 에미상 남우조연상을 받은 영국 배우입니다. 1970년대의 외모를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재현했습니다.

‘리모노프: 더 발라드’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인 경쟁 부문 진출작입니다. 세계적 명작가 에마뉘엘 카레르의 동명소설을 원작 삼았다는 점에서도 화제입니다. 최종 수상 결과는 25일(현지시각) 저녁 발표 예정입니다. 그날 벤 위쇼는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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