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부 교수의 지리로그] Seoul·Ousan…우리 지명을 서양에 소개한 180년 전 지도

파이낸셜뉴스 2024. 5. 20. 18:3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를 세계에 알리다
'동국지도' 바탕으로 직접 제작
울릉도·만주 등 조선 영토 표시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
김대건 신부가 1845년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조선전도는 영어로 'Seoul'을 표기한 최초의 지도다. 지도 오른쪽 빨간 동그라미 안쪽이 울릉도와 독도.

지난 2023년 9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성상이 처음 공개된 날 축복식이 열린 모습. 사진=연합뉴스
지난 2023년 9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성상이 처음 공개된 날 축복식이 열린 모습. 사진=연합뉴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학과 명예교수

김대건(金大建) 신부는 한국 최초의 사제다. 1821년 충남 당진 우강면 송산리 솔뫼마을에서 출생하고 1846년 9월 16일 서울 용산구 이촌동 새남터에서 25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최초 사제 업무는 전북 익산 나바위 성당에서 이루어졌다.

김대건 신부는 조선시대 명문 집안의 후손으로, 9대조 김의직 충청병마절도사에 이어 8대조 김수원 통훈대부 후기에 내포 솔뫼로 이전했다. 조부 김택현이 천주교 신자로 입신하면서 김대건 집안은 천주교 가문이 되었다. 김대건의 아명은 재복(再福)이었고, 나중에 신앙을 크게 세운다는 뜻으로 대건(大建)이 되었다.

김대건은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임시 설립된 조선신학교에서 신학생 과정을 시작해 1839년 필리핀 마닐라 인근 롤롬보이, 다시 마카오, 요동 인근 백가점(白家店), 상하이 등에서 신학교육을 받는다. 1845년 8월 17일 상하이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조선인 최초 사제 서품을 받았다. 10월 12일 금강 하구 강경포구 인근에 위치한 전북 익산시 망상면 나바위(羅岩) 성당에 안착하여 한국인 최초로 신부로 사제역을 맡았다. 나바위 성당은 일찍이 중국을 통한 프랑스 신부들의 충남과 전북 등 호서지역 선교를 위한 초입이었다.

이러한 세계화 경험을 통해 김대건 신부는 기독교 신앙 전파를 위해 독자적으로 '조선전도'를 연구·제작했다. 1845년작으로 알려진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는 조선 후기 최고의 지도학자였던 정상기(1678~1752)가 제작한 '동국지도(東國地圖)'의 필사본으로, 한성부 서고에 보관된 지도를 보고 필사한 것이라고 한다.

정상기는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1804~1866)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현재 진본과 사본을 포함한 5부의 지도가 '프랑스 국립도서관'과 미국의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소장돼 있다. 프랑스에 있는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는 1851년 신안 비금도에 표류한 프랑스 나르발(Narval)호 선원들을 구하기 위해 한국에 온 프랑스 외교관 사를드 몽티니에 의해 입수된 것으로,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김대건의 '조선전도'는 지도학적으로도 큰 기여를 했다. 당시 저명한 지도학자로 알려진 정상기의 지도를 바탕으로 하천을 중심으로 상세한 지형을 표시하고,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역으로 포함시켰을 뿐 아니라 당시 한국어 지명을 영어로 표기했다. 울릉도는 'Ouluengto', 독도는 'Ousan'으로 표기했다. 또한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인접한 만주 지역을 조선 영토로 선표시를 했다.

그리고 당시 수도 한성(漢城)을 '서울'로 표기하고 영어로 'Seoul'로 표기한 최초의 지도다. 영어로 지도를 만들어서 세계에 알리고자 했고, 외국인 선교사들이 조선을 더 편하게 다니도록 배려한 점도 있었을 것이다. 서양의 세계지도들을 조선에 소개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신앙에 기초를 두면서도 이를 위한 학문과 과학에도 열정을 다했다. 1709년 중국의 강희제는 조선에 사절단을 보내 궁중에 걸려 있었던 '조선전도'를 복사해 오게 했다. 중국에서도 잘 만들어진 '조선전도'에 큰 관심을 가졌다. 김대건 신부는 이 전도를 중심으로 프랑스어로 된 지도를 제작했고, 그 축소판이 1849년 '프랑스 지리학회지'에 재수록됐다.

지도에 대한 관심은 먼저 한국에서 선교를 위해서 조선의 여러 곳을 누벼야 하므로 선교용 지도의 필요성이 제기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국 지도를 놓고 보면서 선교 루트의 계획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가 중국의 마카오, 상하이 등지에서 신학교육을 받으면서 필시 세계지도, 중국지도 등을 보게 되었고 당연히 조선지도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사제교육을 받는 동안 조선을 세계에 알리고 조선 백성들도 역시 넓은 세계를 알도록 신앙과 함께 세계사와 한국의 지리교육을 통해 한국민을 깨우치겠다는 심정도 가진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조선지도를 영어로 만들어서 한국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청나라 후반에 들어서 가톨릭 선교를 위해 유럽의 많은 신부들이 중국에 왔고, 유럽에서 만든 세계지도를 중국에 소개했다. 중국 자체적으로도 지도 제작에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 사제들로부터 지도 제작을 배우고자 했다.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1552~1610)의 '곤여만국전도'는 중국어판으로 제작돼 반포되었다. 조선지도 연구자들의 지도 제작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당시 사제 서품 교육에서 성경과 신학 외에도 세계의 여러 언어, 세계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교육이 있었다고 한다. 사제로서 선교에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김대건 신부는 유럽, 특히 프랑스의 여러 신부들의 성장지 유럽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싶어했다. 이를 위해서 세계사, 세계지리, 지도학과 측량학 그리고 언어로서 필수어인 라틴어 외에 프랑스어, 중국어, 영어 등을 학습했다. 김대건 신부는 지도를 통해서 세계의 구조를 알고 유럽과 조선의 거리도 인식했다. 지금으로부터 180년 전의 일이다.

김대건 신부의 일생과 연관된 순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탄생지인 솔뫼성지(충남 당진), 최초의 사제 근무지 나바위 성당(전북 익산) 그리고 순교지 새남터(서울 이촌동)가 중심이다.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생애 기록이 전시된 절두산 성지(서울 합정동)도 있다. 연관된 해외 지역으로 신학교육을 받은 마카오 성당과 사제 서품을 받은 상하이 성당이 있다. 지난해 9월 교황청도 김대건 신부의 업적을 높이 인정해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바티칸 궁전에 김대건 신부의 조각상이 세워졌다.

김대건 신부의 집안은 조선시대 전통 있는 명문가였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9대조 김의직이 충청병마절도사로 재직하고 통훈대부를 지낸 8대조 김수원이 솔뫼마을에 이주한 뒤 조부 김택현이 천주교 교도가 되면서 천주교 집안이 되었다. 그 후 가세가 기울었다. 조선 말기 천주교 집안에서 자녀들 이름 항렬에 신앙의 발전을 상징하는 뜻을 많이 실었다고 한다. 당시 서구의 학문을 한국이 받아들이고, 한국을 서구에 알리고자 노력했다. 교황청은 2023년 9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에 '갓 쓰고 도포 입은' 김대건 신부의 성상을 세웠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Copyright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