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과 사랑에 빠진 작가…글자를 해방시키다

송경은 기자(kyungeun@mk.co.kr) 2024. 5. 2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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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수 부산 OKNP 개인전
민화 ‘문자도’ 현대적 재해석
글자 해체하고 조합해 추상화
언어적 기능 넘은 한글 선봬
안상수 작가 개인전이 진행 중인 갤러리 OKNP 부산 전시장에 작품이 전시돼 있다. 우리 전통 민화인 문자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홀려라’ 연작이다. OKNP
한글의 마지막 자음 ‘ㅎ’이 문서가 아닌 캔버스 위에 홀연히 등장했다. 히읗(ㅎ)을 받치는 것은 한글의 다른 모음이나 자음이 아니다. 흐르는 물처럼 자유분방한 비정형의 곡선들이 히읗을 어디론가 이끌 뿐이다. 대표적인 한글 서체 중 하나인 ‘안상수체’를 만든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 안상수 작가가 한글 문자를 활용해 그린 작품 ‘홀려라’(2024)다. 문자를 해체하고 다시 조합하면서 한글이 의미 전달이라는 언어적 기능을 벗어던지게끔 한 것이다. 그의 작품 앞에서 관객은 한글이 얼마나 아름다운 ‘형태’였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디자이너가 아닌 작가로서 안상수가 걸어온 길과 그의 예술 세계를 조명한 개인전 ‘안상수: 홀려라’가 부산 해운대구 OKNP(오케이엔피) 부산에서 오는 6월 9일까지 개최된다. ‘홀려라’ 연작을 중심으로 한 신작 회화와 조각이 전시의 주를 이루지만, 1990년대를 전후해 그가 발간했던 예술잡지 ‘보고서/보고서’의 원본 등 작가의 과거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아카이빙 자료도 함께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그동안 국립현대미술관, 옛 로댕갤러리(현 리움미술관)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해온 안 작가가 상업 갤러리에서 여는 첫 개인전이이기도 하다.

이보성 OKNP 부산 총괄디렉터는 “타이퍼그래피 디자이너로서 안상수 작가의 업적은 어마어마하지만, 순수 예술을 하는 작가로서 안상수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 안상수에 대해 이해하고,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한글을 새롭게 마주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홀려라’ 회화 연작은 안 작가가 전통 민화의 문자도(문자의 획 안이나 그 주변에 그린 민화의 일종)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한글 자음과 민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했다. 글자로 이뤄진 이미지이지만 글자를 해체하고 조합했기 때문에 실제로 글자를 읽어낼 수는 없다. 추상화된 형상만 남아 있을 뿐, 한글 자음 ‘ㅎ’ 외에는 기존 글자의 형태를 완전히 벗어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의미와 무의미, 발성과 묵음이라는 서로 상반된 개념의 간극을 탐구한다. 동시에 글자를 의미가 있는 언어가 아닌 형태로서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일종의 해방이다.

안 작가는 “문자도 ‘홀려라’ 시리즈는 2017년 서울시립미술관 개인전 이후 계속해서 진행해오고 있는 작업으로, 우리 전통의 민화인 문자도의 동시대 버전이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총괄디렉터는 “안상수 작가의 작품을 보면 마치 글자를 모르는 어린아이의 글자 놀이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 중에서도 ‘홀려라’ 연작은 그가 살아온 삶의 방식을 대변하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안 작가는 이전에 사용하지 않았던 재료인 흑연과 곱돌 안료를 사용한 신작도 선보인다. 이전보다 더욱 과감한 형태의 해체와 조합이 두드러지는 것이 특징적이다. 또 다른 작품 ‘알파에서 히읗까지’(2024)에선 서양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그리스 문자의 첫 글자 알파(α)와 한글의 마지막 자음 히읗(ㅎ)의 연결고리를 풀어냈다. 문자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상상 속 외계인 문자 체계 ‘사페레’를 직접 개발해 이를 통해 힌두 여신 ‘샤크티’라는 글자를 화폭 위에 표현한 작품도 선보인다.

안 작가는 1980년대 기존의 틀을 벗어난 ‘안상수체’를 발표할 당시부터 이 같은 해체 실험을 거듭해왔다. 기존의 한글 서체는 일정한 네모칸 안에 문자가 들어갔지만 ‘안상수체’의 경우 마치 일부러 칸을 넘겨 쓴 것처럼 보인다. 이 역시도 일종의 해체다. 1988년부터 2000년 사이 안 작가가 편집·발간했던 예술잡지 ‘보고서/보고서’에서도 그의 도전적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활자가 가지런히 인쇄돼 있지 않고 사선으로 나아가거나 띄어쓰기 대신 마침표(.)가 찍혀 있기도 한다.

이처럼 안 작가가 한글에 지독하게 매달려온 것은 어느 날부터인가 한글이 그에게 특별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는 “익히 알아왔던 한글, 훈민정음이 ‘연애의 감정’으로 나에게 가까워진 순간을 잊지 못한다. 나는 한글과 사랑에 빠졌다”며 “상업화랑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기존의 다른 전시와 이것이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그동안 품어왔던 창작 활동을 마음먹고 펼쳐보일 생각”이라고 밝혔다.

안상수 작가는 홍익대 미술대학 시각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 응용미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1~2012년 홍익대 미대 교수로 재직했고, 2013년 대안미술대학 ‘파주타이포그래피배곳(PaTI)’을 설립했다. 금성사 디자인연구실 실장,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 소장, 안그라픽스 대표, 서울디자인재단 이사장, 세계그래픽디자인단체협의회 집행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 PATI 총장과 중국 중앙미술학원 특빙교수, 영국 런던왕립미술학교 방문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2002년 옛 로댕갤러리(현 리움미술관)에서 개인전 ‘한글상상’을 열었고 독일 라이프치히서적예술학교 미술관(2007), 홍콩 K11 뮤제아(2011), 서울시립미술관(2017)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안상수 ‘알파에서 히읗까지’(2024, 캔버스에 흑연·아크릴릭 복합재료, 116.8×91㎝). OK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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