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 말코 지휘콩쿠르 우승 이승원… “지휘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오케스트라 소리 달라져”

이강은 2024. 5. 20.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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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적으로 확신에 찬 노래가 속에서 술술 나와야 지휘대에 선다”
“지휘자가 아니라 연주한 음악의 작곡가가 주인공이 되는 지휘하고 싶어”

“(오케스트라에서 유일하게) 직접 소리를 안 내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오케스트라 소리가 바뀝니다. 그 사람 특유의 분위기와 성격, 인품, 호흡, 말투까지도 음악에 영향을 미쳐요. 같은 곡을 들어도 지휘자가 누구냐에 따라 음악이 아주 다른 이유죠. 이게 바로 지휘의 매력이기도 해요.” 

지난 4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말코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이승원이 우승 트로피를 들며 활짝 웃고 있다. 말코 지휘 콩쿠르 제공
최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이승원(34)은 실력파 비올리스트로 잘 나가다 왜 지휘자의 길로 틀었는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어려서부터 지휘의 매력에 반해 지휘자를 꿈꿨던 그는 뒤늦게 지휘 공부에 매달린 지 10년 만에 큰 결실을 거뒀다. 지난달 덴마크에서 열린 말코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 우승을 차지하며 지휘자로서 날개를 단 것. 덴마크 방송 교향악단을 설립한 러시아 태생의 명지휘자 니콜라이 말코(1883~1961)를 기린 이 대회는 1965년부터 3년마다 열린다. 이승원은 2만 유로(약 2900만원)의 상금과 댈러스 심포니, 오슬로 필하모닉, 말뫼 오케스트라 등 전 세계 24개 주요 교향악단을 지휘할 기회를 부상으로 받았다.  

그는 “초대받은 것만 해도 영광이라 여긴 대회에서 우승까지 해 정말 기쁘다”며 “무엇보다 24개 악단과 연주하고, 파비오 루이지 댈러스 심포니 음악감독한테 3년간 개인 지도를 받을 수 있는 부상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파비오 루이지(65)는 덴마크 방송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이자 이 대회 심사위원장이기도 하다.

이승원이 말코 국제 지휘 콩쿠르 우승 이후 첫 무대였던 지난 4월 27일 서울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에서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를 힘차게 지휘하는 모습. 예술의전당 제공
우승까지는 순탄치 않았다. 경연 곡으로 총 12곡이나 준비해야 했고, 이 중 라운드마다 어떤 곡을 지휘할지는 연주 직전 제비뽑기로 결정됐기 때문이다. 모든 곡을 완벽하게 공부하는 것과 별개로 더 자신 있는 곡이 뽑히는 운도 따라줘야 했다. 
첫 라운드에선 운이 좋았다. 1라운드용 3개 교향곡(하이든 49번, 모차르트 35번, 베토벤 4번) 중 내심 바랐던 하이든 49번을 뽑은 것이다. 이승원은 하이든 시대의 바로크 스타일이 어울릴 거란 판단에 하프시코드(피아노 상용화 전 건반악기) 반주를 곁들여 연주했다. “악보 편성에는 하프시코드가 있지만, 정작 악보에는 하프시코드가 없는 독특한 작품이어서 참가자에게 선택권을 줬어요. 대부분 참가자가 안전하게 하프시코드 없는 버전을 선택했죠.” 하이든 곡을 뽑은 참가자 중 이승원이 유일하게 현대 악기들을 가지고 하프시코드와 어울리는 시대의 소리를 만들어 낸 장면은 심사위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말러 5번과 차이콥스키 5번, 드보르자크 9번 교향곡 모든 악장 중 두 곡의 특정 악장 몇 마디를 연주해야 하는 2라운드는 ‘극악무도’했다고 한다. 난도가 제일 높아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 말러 교향곡을 뽑지 못한 것. 그래도 용케 통과한 후 사전 리허설 없이 관객 앞에서 전곡을 연주해야 하는 3라운드도 라벨의 ‘라발스’로 결선 진출자 3명에 들었다. 마지막 4라운드에선 다시 운이 작용했다. “브람스 교향곡 1번과 2번, 4번의 1악장을 연주해야 했는데 기대했던 2번이 걸리더군요.(웃음)” 루이지는 “이승원은 대회 기간 내내 오케스트라와 잘 소통하며 특별한 방식으로 사운드를 빚어냈다”고 극찬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비올라를 시작한 이승원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현악4중주팀 ‘노부스 콰르텟’의 비올리스트로 2009년부터 2017년까지 활동했다. 이 시절 경험은 지휘자로 성장하는 데 값진 밑거름이 됐다. “지휘자는 현재 소리에 반응하면서 다음 소리가 어떠해야 하는지 미리 제시해야 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듣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실내악 연주자로서 끊임없이 동료들과 소리를 섞고, 서로 맞추는 과정에서 귀를 섬세하게 열게 됐습니다.”

이승원이 지난 4월 27일 서울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에서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연주를 마친 뒤 인사하고 있다. 예술의전당 제공
그는 2014년 독일 베를린 한스아이슬러 음대에 들어가 크리스찬 에발트 교수를 6년 동안 사사하며 지휘의 기초를 단단히 쌓았다. 특히, 지휘자가 강한 음악적인 확신으로 똘똘 뭉친 노래를 속으로 부를 줄 알아야 그 노래에 맞춰 손(지휘) 동작이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걸 배웠다. 그래서 지휘대에 오르기 전 연주할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속으로 불러본다. “노래하다 한 군데라도 막히거나 헷갈리면 그러지 않을 때까지 다시 악보를 보며 고민하고 연습하는 거죠. 지휘자가 속으로 어떻게 노래하느냐에 따라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달라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2018년 지휘자로 전향하고 이듬해 이탈리아에서 다니엘레 가티(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음악감독)를 만나 마스터 클래스(맞춤형 지도)를 받은 것도 잊을 수 없다. 당시 가티는 “오케스트라가 언제 너를 필요로 하고 필요로 하지 않는지 구분해서 효과적으로 지휘할 줄 알아야 한다”며 이승원의 손을 잡고 멘델스존의 교향곡 4번 ‘이탈리아’ 2악장 전체를 지휘했다. “지휘자라면 수치스러울 수도 있는 상황인데 저한테는 지휘 인생을 바꿔준 순간이었습니다.”

이승원은 2022년 미국 신시내티 심포니 부지휘자로 발탁되자 독일 라이프치히 국립음대 비올라 종신 교수직도 과감하게 내려놓을 만큼 지휘에 진심이다. 지휘봉을 잡은 이후 협주곡 외에 1950년 이전 작품은 모두 악보를 외워 지휘하고 있을 정도다. 그렇다고 비올라 연주를 아주 멀리하는 건 아니다. 악기를 연주할 때만 느끼는 행복이 있는 데다 가끔 직접 소리를 내고 싶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비올라의 활약이 두드러진 베를리오즈 교향곡 ‘이탈리아의 해롤드’를 지휘하면서 비올라를 직접 연주하는 것도 희망사항 중 하나다. 

오래도록 지휘대에 서길 바라는 이승원은 “지휘자가 아니라 지휘한 음악의 작곡가가 주인공이 되게 하고 싶다”며 “관객들에게 작곡가와 음악에 대한 인상이 오래 남도록 하는 지휘자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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