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사형 확정, 그후 44년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김태훈 2024. 5. 20.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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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부장에게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김재규는 약 7개월 전인 1979년 10월26일 청와대 부근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시해한 혐의(내란 목적 살인) 등으로 기소됐다.

선고 당시에는 변호인조차 열람할 수 없었던 대법원의 김재규 사건 판결문은 나중에야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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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부장에게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김재규는 약 7개월 전인 1979년 10월26일 청와대 부근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시해한 혐의(내란 목적 살인) 등으로 기소됐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영섭 당시 대법원장은 선고일 오전 10시 8분 판결 요지를 낭독하기 시작해 주문까지 읽은 뒤 10시 17분 법정을 떠났다. 약 9분쯤 걸린 셈이다. “상고 이유가 없다는 것이 다수의견으로 결론을 내렸다”라는 문구가 주문 내용이다. 다수의견이란 표현을 쓴 것은 그와 다른 소수의견이 있었다는 뜻이다. 선고일로부터 정확히 나흘 뒤인 1980년 5월24일 김재규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세계일보 자료사진
10·26 사건 후 재판을 받는 내내 김재규는 유신 독재를 끝장내기 위해 박 대통령을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를 폈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는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고 굳게 믿더라도 하나뿐인 목숨이 사라지게 생겼는데 끝까지 대범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나. 어느 교도관의 회고에 의하면 교수형 집행을 앞두고 처음엔 의연해하던 김재규도 막상 사형장 10여m 앞에 서자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 결국 교도관들에 의해 형장까지 질질 끌려가다시피 했다고 한다. 김재규의 시신은 경기 광주시 오포읍에 묻혔다.

선고 당시에는 변호인조차 열람할 수 없었던 대법원의 김재규 사건 판결문은 나중에야 공개됐다. 소수의견이 있다는 점도 그제야 비로소 알려졌다. 대법관 8명은 다수의견에서 “내란 목적 살인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다. 반면 대법관 6명은 소수의견에서 “내란 목적의 살인으로 볼 수 없다”며 “일반 살인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내란죄가 성립하려면 어느 한 지역의 평온을 해치기에 충분한 폭동을 일으킬 만한 다수인이 동원되어야 하는데 10·26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사실상 김재규 혼자 일으킨 사건 아니냐는 뜻이다. 발끈한 전두환 신군부는 소수의견을 낸 대법관 6명을 대법원에서 몰아냈다.

김재규 사형 확정 후 정확히 44년이 흘렀다. 요즘 서울고법에선 김재규 유족이 낸 재심 청구 사건 심리가 진행 중이다. 유족 대표는 “당시 신군부의 불법적 개입으로 재판이 정당하게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유족 측 변호인은 “핵심은 내란 목적 살인이 아니라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부득이한 살인이었다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소수의견에 가담한 대법관 전원이 이후 쫓겨나듯 대법원에서 떠나야 했던 점으로 미뤄 신군부의 압박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견이 나왔다는 점은 대법관들 간에 나름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는 등 재판 자체는 정상적으로 진행됐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르면 6월 중 내려질 서울고법의 재심 개시 여부 결정에 이목이 쏠린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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