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현의 바다 스토리 <1>] 선박의 흘수는 국제무역의 출발점

김인현 고려대 법학 전문대학원 교수 2024. 5. 20.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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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수(吃水·draft)’만큼 중요한 선박 용어도 없다. 배가 물 위에 떠있을 때 물에 잠겨 있는 부분의 깊이를 말한다. 조선소에서 인도될 때 선박 외판에 바닥에서부터 높이가 얼마인지 표시된다.

선박은 부력과 중력이 같은 지점에서 멈춘다. 부력이 중력보다 작으면 선박은 침몰한다. 부력이 중력보다 크면 물 위에 떠 있게 된다. ‘하계만재흘수선(여름철에 최대로 실을 수 있는 흘수)’은 여름철에 선박이 물에 떠 있을 수 있는 최대 깊이를 말한다. 동계에는 만재흘수선이 더 낮게 표시돼 있다. 겨울철은 날씨가 나쁘기 때문에, 물에 잠기는 부분을 적게 해서 선박이 더 안전하게 한다.

흘수선은 두 가지 큰 기능을 한다. 첫 번째, 선박에 표시된 흘수선을 넘기면 배는 침몰한다. 그러므로 선장들은 출항 전 흘수가 얼마인지 꼭 확인한다. 두 번째, 흘수선을 통해서 선박에 실린 화물량이 결정된다. 화물 담당 최고 책임자인 일등항해사도 화물 작업을 마치기 전에는 당직 항해사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흘수 읽어오기를 지시한다.

사진 셔터스톡

선박 옆에 흘수선이 붙어 있기 때문에 당직 항해사는 곡예를 해야 한다. 선박 저 아래에 있는 숫자를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박 본체에 붙어있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다. 고개를 숙여 흘수를 읽고 올라온다. 바다에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밧줄을 몸에 감고 내려가기도 한다. 꼭 당직 타수로 한 명 보초를 서게 한다. 이런 일을 매 항해 시 화물을 실을 때 반복해서 해야 한다.

왜 이렇게 흘수에 목숨을 걸까. 물론 흘수를 지키면 침몰하지 않기 때문이지만, 보다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적재 화물 수량을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흘수를 읽어야 선박이 잠긴 부분이 나온다. 흘수 표시는 여섯 곳에 있다. 선박 앞의 좌우, 중앙 그리고 뒤의 좌우와 중앙 이렇게 각 여섯 곳의 흘수를 읽어서 평균을 구한다. 그리고 선박의 철판 무게, 청수, 선박에 실린 연료유 등을 제하고 나면 선박에 실린 화물 무게가 나온다. 흘수선은 선박의 깊이이고 여기에 폭과 길이를 곱하면 선박이 잠긴 수면 아래 부피가 나온다. 조선소에서는 미리 만들어진 표에서 선박의 깊이가 얼마일 때 ‘배수톤수(선박의 부피가 차지하는 물의 양)’가 얼마인지 정해둔다. 너울이 있을 때는 너울의 중간을 잘 읽어야 한다. 만약 10㎝라도 잘못 읽으면 화물 400t이 날아간다. 운임이 톤당 10만원이면, 4000만원의 운임을 더 받을 수도 있고 못 받을 수도 있다.

이렇게 흘수를 읽어서 구한 톤수가 선박에 실린 최종 화물 무게가 된다. 이 무게가 수출업자가 실어준 상품 무게가 되는 것이다. 이 무게에 따라 수출업자가 받을 대금도 정해진다. 운송인이 받을 운임도 이것으로 정해진다. 출항할 때 일등항해사는 ‘화물 수령증(Mate Receipt)’을 발행해 선장에게 보고한다. 선장과 대리점은 화물 수령증에 적힌 화물의 수를 선하증권(B/L)에 적어준다. 선하증권은 배에 실린 상품 그 자체로 인정된다. 수출업자는 이 선하증권을 가지고 신용장 발행 은행에 가서 상품 대금을 받는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 전문대학원 교수, 선장한국해양대 항해학, 고려대 법학 학·석·박사, 전 일본 산코기센 항해사·선장

흘수를 읽는 게 국제무역의 출발점이라는 설명을 선장에게서 들은 삼등항해사인 나는 우쭐해졌다. 힘든 흘수 읽기지만 보람을 느꼈다. 선하증권, 신용장 등 무역 용어를 익히면서 육상에 진출할 실력을 쌓았다. 이렇게 삼등항해사는 국제무역의 일원이 되어갔다. 선장 때는 하계만재흘수선을 초과하지 않도록 남은 화물을 싣지 않고 돌려보내기도 했다. 인생을 살아보니 자신이 할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역량의 한도가 있다. 화물을 너무 적게 실어도 손해가 된다. 흘수만큼은 실어야 한다. 좋은 기회가 왔을 때 너무 겸손해서 사양해도 안 된다. 3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바다에서 참 많은 것을 배웠다. 선박의 흘수를 통해서도 이렇게 인생을 배우면서 항해사였던 나는 성장해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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