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라파 공격’에 뿔난 가자전쟁 ‘중재자’ 이집트[이세형의 더 가까이 중동]

이세형 기자‧전 카이로 특파원 2024. 5. 2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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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게 느껴지지만 우리와 뗄 수 없는 중동. 그 생생한 현장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카이로 특파원, 국제부 차장, 카타르의 싱크탱크 아랍조사정책연구원(ACRPS) 방문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중동을 취재했습니다. 단행본 <중동 인사이트>, <중동 라이벌리즘>, <있는 그대로 카타르>를 펴냈습니다.

지난해 10월 7일(현지 시간) 발발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전쟁에서 미국, 카타르와 함께 중재자 역할을 해온 이집트가 최근 노골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을 나타내고 있다.

14일 월스트리트저널 등에 따르면 이집트는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주재 중인 자국 대사를 소환하는 것으로 이스라엘과의 외교 관계를 격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또 가자지구 최남단 지역으로 피란민들이 대거 몰려와 있는 라파에 대한 구호품 전달에도 협력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집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지난해 12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한 대이스라엘 소송(집단학살 혐의)에 동참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이집트는 1979년 아랍권에서 이스라엘과 가장 먼저 평화협정을 체결했고, ‘가자지구 전쟁’의 중재자로 참여해 왔다. 하지만 최근 이스라엘의 라파 지역 공격이 시작되면서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이집트(왼쪽)와 이스라엘 국기. 아나돌루 통신 홈페이지 캡처

예루살렘포스트에 따르면 압둘팟타흐 시시 이집트 대통령은 16일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제33차 아랍연맹(Arab League‧AL) 정상회의에서 이스라엘의 라파 공격을 강하게 비난했다.

당시 시시 대통령은 “이스라엘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애매한 행동을 보이고, 휴전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에서 기만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스라엘은 광범위한 비판을 받고 있는 라파에 대한 군사작전에 단호한 태도를 보이며, 팔레스타인 쪽 라파 교차로를 이용해 가자지구 포위를 공고히 하려 한다”고 말했다.

● 가자전쟁 ‘중재자’ 역할에 적합한 나라

이집트는 라파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아랍권 나라 중 가장 먼저 이스라엘과 1979년 평화협정을 체결했고, 외교 관계도 맺었다.

동시에 이집트는 ‘아랍의 맹주’ 사우디아라비아와도 가까운 관계다. 22개 아랍 국가들의 모임으로 국제사회에서 ‘아랍판 유엔’으로 불리는 아랍연맹 본부도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 자리 잡고 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수교 했고, 아랍국가들의 모임인 아랍연맹 본부의 소재재이기도 해 ‘가자지구 전쟁’의 중재국으로서 적합한 조건을 지니고 있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 위치한 아랍연맹 본부. 동아일보 DB

여러모로 볼 때, 가자지구 전쟁의 중재자 역할과 구호품 전달을 담당하기 적합한 나라다. 실제로 이집트는 이번 전쟁 중 가자지구 주민을 위한 구호품 반입 창구 역할을 했다. 또 휴전 및 인질 석방 협상에도 참여했다.

● 이스라엘 라파 공격과 국경 통제에 불만

이집트가 이스라엘에 강한 반감을 나타내고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군이 최근 라파에 대한 공격 강도를 높이고, 대규모 지상전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로서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라파에서 이스라엘군이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고, 이 과정에서 하마스와 교전이 벌어지는 것 자체가 부담이다. 또 못 마땅하다.


특히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입장 변화에 불만이 많다. 전쟁 초기만 해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북부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전투를 벌였다. 라파는 피란민들의 대피 지역이었다. 이스라엘도 라파는 안전한 지역이라는 식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전쟁이 계속 진행되면서 이스라엘은 라파에 대한 공격을 늘렸고, 지상전을 감행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보이고 있다. 7일에는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쪽 가자지구 국경 검문소를 장악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쪽 국경 검문소를 통제하겠다는 메시지를 전날 이집트 측에 갑작스럽게 전달했다.

지난해 10월21일(현지 시간) 구호품을 실은 트럭들이 이집트 라파 국경 검문소를 통해 가자지구로 들어가고 있다. 그동안 라파 국경의 개방과 폐쇄를 결정해 온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최근 팔레스타인 쪽 국경 검문소를 장악한 것에 불만이 많다. 라파=신화 뉴시스

그동안 라파 국경의 개방과 폐쇄는 사실상 이집트의 결정에 따라 이뤄졌다. 이번 전쟁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집트는 라파 국경 관리를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는 수단으로 여겨왔다.

결국 이집트 입장에선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쪽 국경 검문소들을 장악하고, 통제에 들어간다는 건 자국의 권한이 축소되는 상황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또 가자지구 전쟁의 중재자인 자신들을 이스라엘이 무시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팔레스타인 난민 자국으로 유입될까 우려

라파 상황이 악화되면 팔레스타인 난민이 대거 이집트로 유입될 수도 있다. 이집트가 가장 피하고 싶은 시나리오다.

이집트 경제는 말 그대로 심각한 상황이다. 물가상승, 자국 화폐(이집트파운드) 가치 하락, 부채 증가, 외환 부족 등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15년 27.8%였던 이집트의 빈곤율은 2020년 31.9%로 올랐다. 올해 3월과 2022년 12월에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추가 구제금융 지원을 받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난민이 이집트로 유입되면 경제는 더 망가지고, 국민들의 불만도 커질 수밖에 없다. 또 하마스 구성원들이 난민 속에 섞여 이집트로 넘어 올 수도 있다. 가자지구 전쟁 초기부터 이집트가 ‘가자지구 난민 수용 불가’ 입장을 분명히 밝혀온 이유다.

12일(현지 시간) 팔레스타인 데이르알발라 임시 천막촌 전경.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라파 공격이 본격화되고, 이로 인해 피란민들의 피해가 커지는 것을 우려한다. 특히 피란민들이 자국에 유입될 가능성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데이르알발라=AP 뉴시스

그러나 가자지구에선 지난해 10월7일 이후 이미 3만5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식량, 의약품, 물, 연료도 크게 부족하다. 200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이 머물고 있는 라파에서 이스라엘군의 공격이 계속 이어진다면 사상자는 크게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또 이집트의 부담 역시 커질 수밖에 없다.

● 중재국 모두 ‘라파 공격’에 부정적

이집트는 아랍권 나라 중 이스라엘과 가장 오랫동안 외교 관계를 맺어온 나라다. 사실상 아랍권에서 이스라엘에 가장 우호적인 나라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향력도 크다. 그런 만큼, 이집트와의 관계 악화는 이스라엘에게도 부담이다.

또다른 중재자인 카타르도 이스라엘의 라파 공격에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무함마드 빈 압둘라흐만 알사니 카타르 총리는 14일 도하에서 열린 ‘카타르 경제포럼’에서 “최근 라파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협상을 후퇴시켰다”며 이스라엘군의 라파 공격을 비판했다.

이스라엘의 우방국이며 역시 중재자 역할을 해 온 미국도 라파 공격에 부정적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라파 공격 방침은 확고해 보인다. 이스라엘군의 본격적인 라파 공격이 진행되면 아랍권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온 이집트와 카타르의 입장 변화 가능성도 중요한 변수로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이세형 기자‧전 카이로 특파원 turt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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