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증원 2천명, ‘과학’ 문제가 아니라 ‘합의’ 문제다

한겨레 2024. 5. 20.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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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의 의학과 서사(86)
의료윤리, 아직 진지하게 고려되지 못한 이름
의정갈등은 여러 관점과 견해, 고려 사항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는 문제여야지, 어느 한쪽이 힘으로 밀어붙여서 관철할 문제여선 안 된다. 픽사베이

“한국의 의대 입학 정원 증원을 둘러싼 갈등은 의료계, 법체계, 정부 정책 등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매우 다면적인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언론 보도는 이러한 변화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의대생과 전문가들의 반응과 이러한 정책이 직면한 광범위한 법적 문제에 크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고위급 정부 및 사법 기관의 참여는 이 논쟁의 광범위한 사회적, 정치적 차원을 강조합니다. 이 보도는 의료 정책과 전문 교육의 복잡성뿐만 아니라 이러한 중추적인 결정의 광범위한 사회적 함의를 반영합니다. 매체가 이들 핵심어를 통해 엮어낸 이야기는 당면한 전문가적 관심사와 장기적인 국가 보건 정책 목표 사이의 긴장을 포착하여 지속적인 투쟁과 논쟁의 시나리오를 묘사합니다.”

위 기술문은 5월15일부터 17일 오전까지 ‘의대증원’ 관련 기사를 수집하여, 기사 본문 핵심어를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인공지능에 현재 상황을 표현할 것을 요청한 결과문이다. 며칠, 아니 지난 석 달의 혼란이 잘 드러나 있는 글이라고, 역시 인공지능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실 것 같긴 하다. 그런데 혹시 윗글에서 이상한 점은 없는가.

마지막 부분을 나는 주목한다. 인공지능이 이상한 글을 썼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 상황의 역설적인 상황을 잘 드러낸 표현이기 때문이다. “당면한 전문가적 관심사와 장기적인 국가 보건 정책 목표 사이의 긴장”으로 인한 “지속적인 투쟁과 논쟁의 시나리오”라는 이 묘사는, 의사의 전문가적 견해와 국가 보건 정책 목표가 충돌하며 그것이 투쟁과 논쟁을 빚어낸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보건의료 전문가의 견해와 국가의 보건 시책이 가리키는 방향은 일치해야 한다고 많은 이들이 생각한다. 이때 한쪽이 다른 견해나 주장을 펼치면, 그것은 당사자의 이해를 반영한 주장일 뿐, 전문가나 정부가 견지할 만한 입장은 아니다. 따라서 이런 갈등은 이권을 반영한 ‘밥그릇 싸움’일 뿐이다.

정치나 경제에서 소위 ‘이해 충돌’ 사안, 이권 때문에 원래 해야 했을 일 대신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현실이기에 ‘밥그릇 싸움’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건의료 전문가의 견해와 국가의 보건 정책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킬 수 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코로나19 상황에서 수차례 경험했던 일이 아닌가.

그것은 의료가 수학이 아닌,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한편으로 의학과 사회의, 과학과 인간의 충돌로 인한 결과다. 다른 한편으론 여러 당사자가 연관된 보건의료의 문제에서 각자의 가치와 신념이 다르기에 나타나는 일이다.

이런 충돌을 조율하기 위해 현대 사회는 윤리라는 방식을 도입했고, 그때 출현한 것이 ‘의료윤리’라고 하는 신생 분야였다. 예컨대 존엄사·안락사 갈등이, 임신중절 논쟁이 그러했듯이. 이들 논쟁은 의학과 사회, 과학과 인간의 견해차가 어디까지 벌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였다.

설명을 위해 이들 사례를 검토하겠지만, 그 전에 먼저 결론을 내고 출발하자.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의료의 문제에서 윤리를 따져본 적이 거의 없는 셈이다.

존엄사 논쟁

죽음에 관한 결정권을 행사하고 싶다는 욕망은 태고의 것이지만, 이것이 ‘존엄사 논쟁’으로 굳어진 것은 우리에게 죽음의 순간을 연장할 수 있는 의과학의 방법이 생긴 다음이다. 신경학적 쇼크 상황에서 신체 상태 안정, 인공호흡기의 발명, 급식관의 설치 방법 확립 등은 이전 당연히 끝났어야 했던 생을 잠시라도 붙잡아 놓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붙잡기만 할 뿐, 다시 돌려놓을 수는 없는 경우들이 종종 벌어졌다는 데 있었다.

여기에서 갈등이 벌어진다. 기본적으로 의학이란 신체적(정신적) 상태를 특정 수준으로 유지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의학적 선택지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환자를 그냥 놓아두는 일은 없다. 의료인이라면 손상된 신체 앞에서 무언가를 하려는 자연스러운 동기를 갖기 마련이다. 소위 연명의료의 상황, 죽을 사람을 일단 붙잡아 놓는 데엔 성공했지만 그 이상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때에, 의료적 해답은 그래도 연명의료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의료의 본령이므로.

하지만 환자 본인이나 가족이 그렇게라도 생명을 유지하길 원할지는 별개의 문제다. 누군가는 그렇게 ‘유지만’ 되는 삶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기에, 누군가는 그런 삶의 억지스러운 유지가 너무 고통스럽기에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존엄사 요청, 최소한 지금 진행하고 있는 연명의료는 이제 멈춰달라는 요구는 여기에서 나온다.

사회는 또 관점이 다르다. 의학적 상황을 빼고 본다면, 생명 유지 노력을 멈춘다는 것은 죽음을 선택하는 일이고 이는 넓게 보았을 때 자살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연명의료 중단이나 존엄사를 허용하는 일은 자살 방조와 같이 취급해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사회적으로 자살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이런 선택은 오히려 자살이 법적으로 허용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퍼뜨리지는 않을까.

의료윤리학의 역사적 사건들을 꼽은 흐름도. 현대 의학의 발전은 보건의료의 여러 상황과 결정에 대한 질문을 만들어 냈으며, 이런 스캔들 앞에서 답하기 위한 방법으로 의료윤리학이 시작되었다.

의료윤리의 해법

이런 충돌하는 주장 중에 답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의학, 환자, 사회의 관점은 각자가 입각하고 있는 논리, 가치, 신념 등으로 인해 다를 수밖에 없다. 존엄사 문제를 놓고 갈등과 충돌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해답을 특정 관점, 이를테면 과학이나 법학이나 사회학이 줄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한쪽에서 답이 나오려면, 어느 한 학문만이 옳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학문이나 이론만이 옳을 수 없다. 특정 학문은 현실의 한 단면을 뜯어내어 자신의 이론 틀로 재구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답’은 여러 학문이 살핀 내용을 모은 그 어딘가에 있겠지만, 우리의 인식적 한계로 인해 그 답에 가닿는 일은 쉽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그렇다고 힘 싸움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므로, 도입된 것이 ‘의료윤리’였다. 의료윤리는 여러 학문과 견해들 사이에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을 그 출발점으로 삼았고, 그렇기에 여러 관점과 가치가 합의할 수 있는 지점을 몇가지 원칙으로 설정하고 그곳으로부터 답을 도출하는 방식을 취했다.

예컨대 의료윤리는 환자 자율성이라고 하는 원칙이 모든 당사자가 합의할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했다. 의학도, 환자도, 사회도 환자가 자신의 신체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는 합의하리라고 본 것이다. 이런 합의점을 찾은 다음에, 의료윤리는 다시 사례에 접근하여 해결책을 논의한다.

이를테면 연명의료 결정의 문제에서 환자 자율성의 원칙은 의료인으로 하여금 말기 환자에게 연명의료 중단의 의사를 묻는 절차를 도출한다. 환자는 상황을 분명히 인지할 것, 외압 없이 자유로이 결정을 내릴 것, 가능하면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의향을 밝혀놓을 것을 요구받으며, 따라서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 작성이 추천된다. 사회는 이런 절차를 법적, 제도적으로 확립하여 현실성을 보장한다.

그러므로 보편 윤리학과 의료윤리학은 꽤나 다른 학문이다. 철학-윤리학이 추상적인 층위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답을 찾는 것(따라서 철학적 탐구가 그 핵심 방법론이 된다)과 달리, 의료윤리학은 갈등 상황에서 합의 가능한 구역들을 찾아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국의 여러 보건의료 관련 논의들은, 그리고 현재의 의정갈등은 의료윤리를 살핀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부도, 의사 쪽도 마찬가지다. 의료윤리를 한다고 말하는 나는 늘 벽에 부딪힌다. 아무도 소환하지 않았는데 허공에서 떠드는 셈이니. 아, 소환은 한다. 자신들이 윤리를 담지하고 있다고 믿으니까.

지금이라도 의료윤리를

일전에 정부가 의료윤리 운운하는 것을 비판한 적이 있다. 위의 이유 때문이다. 의료윤리는 정부나 사회의 견해를 관철하는 논리도, 의사의 말이 옳다고 확증하는 작업도 아니다. 벌어진 보건의료의 문제에서 각자의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관점에 차이가 없으면, 애초에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사이에서 어떻게든 합의점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슬프지만, 나는 지난 석 달간 어디에서도 이런 노력을 찾아보지 못했다. 정부는 정부대로, 의사 쪽은 의사 쪽대로 자신의 관점을 상대방에게 강요하기만 했을 뿐, 어느 쪽도 상대에게 말을 걸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더구나 환자 쪽은 이런 장에서 완전히 논외가 되어 의견 개진이나 논의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왔고,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변화될 것 같지 않다.

이런 상황을 우리는 비윤리적인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의대증원이나 정책적인 방향을 놓고 전문가적 견해와 보건 시책에 차이와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서로가 전제하는 의료적 상황, 심지어 문제 인식 자체가 다른데 어떻게 둘이 같은 답을 내놓을 수 있나. ‘2천명’의 과학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으며, 앞으로 나타나지도 않을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아니 그것은 과학이 결정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향후 의사 부족 또는 과잉을 추산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추산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다. 무엇보다 그것은 여러 관점과 견해, 고려 사항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는 문제여야지, 어느 한쪽이 힘으로 밀어붙여서 관철할 문제여선 안 된다.

따라서 장외에 있는 의료윤리학자로서 나는 외친다. 우리, 이제라도 윤리적으로 문제에 접근할 수는 없나. 언제까지 힘의 논리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도록 놓아둘 것인가.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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