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성폭력 첫 진상규명…부마항쟁 성폭력 등 향후 조사에 시사점 되길” [우리는 서로의 증언자③]

임아영 기자 2024. 5. 20.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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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국가 폭력 속 성폭력’을 규명한다는 것
윤경회 조사팀장·이다감 상담전문가 인터뷰
피해자 사연 듣고 공감한 ‘조사’
너무 늦은 40년 만의 ‘치유 과정’
부마항쟁 성폭력 피해자 연락도

지난해 12월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는 일부 계엄군 등이 자행한 강제추행·강간·성고문 등 피해 사건 중 16건에 대해 ‘진상규명’ 결정을 내렸다. 과거사 조사에서 정식 조사 대상으로 성폭력 피해를 명시하고 종합적인 피해 실상을 규명한 건 처음이다. 피해자의 증언이 담긴 조사보고서가 공개된 것도 처음이다.

처음 길을 만들어내는 일은 많은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조사위는 출범 후 ‘성폭력’을 조사 범위에 포함시키는 법률 개정을 해냈지만, 조사 방법론, 진상규명 판단 기준을 만들어내는 일련의 과정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처음 길을 만들어나간 윤경회 조사위 조사4과 3팀장과 이다감 상담전문가의 이야기를 지난달 27~28일 광주 전남대에서 만나 듣고 이후 전화로 인터뷰했다. 윤 팀장은 고양성폭력상담소,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에서 일했고 지난해 3월 조사를 본격화했다. 이다감 상담전문가는 조사위 전문위원으로 성폭력 피해 조사와 상담을 지원했다. 두 사람의 인터뷰를 질의·응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윤경회 팀장(오른쪽)과 이다감 상담전문가가 지난달 28일 전남대학교 김남주홀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 하고 있다. 2024.04.28. 정효진 기자
‘5·18 성폭력 피해의 특수성’
“국민을 지켜야 할 ‘국군’이 가해자…
더 괴롭고 용납하기 어렵다”

-5·18 성폭력 피해 진상규명을 처음 해냈다.

윤경회(이하 윤)=5·18 성폭력 피해자 19명이 조사에 응했고, 이들을 통해 피해 사실뿐만 아니라 치유와 명예회복 방안에 대한 견해까지 청취할 수 있었다는 점이 성과다. 40년 만에 조사한다는 것은 일련의 사태가 일어난 책임을 규명하는 게 목적이다. 개별 가해자를 특정하여 처벌하려는 것이 아니다. 총상 입은 사망자의 피해를 규명할 때, 경우 총을 겨눈 사람을 찾지 않는다. 그런데도 조사 시작 후 상당 기간 성폭력 가해 군·경 등을 특정하려는 내외의 압력이 있었고, 이는 조사 과정에서 가해자의 복장과 인상착의, 심지어 계급과 이름을 묻는 구조화된 질문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답할 수 없는 질문에 직면한 피해자들이 추가 조사를 거부하기도 했다. 조사의 목적이 불명확하게 설정됐기 때문이다. 조사위의 역할은 은폐된 피해 실상을 확인해 입증하고, 그에 부합하는 국가의 책임 있는 조치를 권고하는 데 있다고 본다. 국가는 피해가 발생한 상황뿐만 아니라, 사건 후 40년 만에 조사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책임이 있다.

-성폭력 사건에서는 피해자의 증언이 핵심 자료다.

윤=지난해 3월 조사를 이어받았을 때 피해자 증언이 구체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내가 경험한 피해를 어떤 언어에 실어서 말해야 하는지 모르는 단계였다. 5·18 성폭력 피해자들은 요즘 여성들과 다르다. ‘팬티를 벗겼느냐’ 질문하면 ‘그런 이야기까지 해야 하느냐’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또 40년만의 조사니까 오래된 삶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 이야기는 곧 신체적·정신적·사회관계적 피해에 대한 증언이기도 했다. 그분들의 기억과 언어로 풀어내는 피해 사실에 대해 서사적으로 청취하고 피해 후유증을 생애사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조사관이 피해자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두 번째 조사 방법은 핵심 진술에 부합하는 사실 자료와 정황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핵심 진술은 ‘몇 부대 누구였어, 이름이 뭐였어’가 아니다. 피해의 일시, 장소를 특정하거나 작전부대를 추정할 수 있는 ‘핵심 장면’이나 ‘감각 기억’을 말한다. 5·18 당시 피해는 집합성을 가지고 있어 패턴화된 경향이 있다. 5월 18일 수창초등학교 앞에서 강제 탈의된 사건 A에 부합하는 사실 자료와 정황증거는, 그곳에서 작전을 수행한 군 기록, 공용터미널과 충장로에서 대검에 의해 강제 탈의된 사건 B의 피해자, 목격자, 그곳에서 작전을 수행한 계엄군의 진술이 될 수 있다. 모두 사건 A의 목격자는 아니지만 여러 곳에서 일어난 상황의 집합성을 따져보면 A라는 사건에 부합하는 정황 증거가 된다. 이는 진압작전 상황이 지시와 명령으로 이루어지고, 작전반경이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핵심 진술을 배척하는 사실 자료와 정황 증거가 찾아지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하겠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그 자리에 없었다고 입증하는 자료가 있거나 ‘핵심 진술’을 배척하는 작전기록이나 참고인의 증언이 있다면 배척하는 것이다.

5·18 성폭력 피해자 간담회가 열린 지난달 28일 전남대학교 김남주홀에서 조사위 윤경회 팀장이 이야기하고 있다. 2024.04.28. 정효진 기자

-5·18 성폭력의 피해 유형은 일반 성폭력 범죄와 다른 특수성이 있을 것 같다.

윤=피해자들 대부분은 가해자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군복을 입었기 때문에 봤다 해도 식별할 수 없었다. 피해자들은 당시 눈을 뜨면 죽을까봐 눈을 뜨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일반 성범죄와 다른 점이다. 또 집단 강간이 많다. 계엄군은 3인 1조, 5~6인 1조로 다녔다. 예를 들어 3명이 끌고 갔지만 2명은 강간했고 1명은 하지 않은 사건이 있었다. 나머지 1명이 “저는 안 하겠습니다”라고 한 말을 피해자가 들었고 그 군인은 부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피해자는 그를 ‘좋은 군인’으로 기억한다. 지휘체계 안에서 저항은 못했어도 암묵적 동조자일 수 있는 사람에게조차 고마운 감정을 가지는 것이다.

이다감(이하 이)=피해자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자책’이었다. 정조 관념, 순결 이데올로기에 의해 내면화된 통념이다. 한편 자국 국인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의 복합적 피해도 볼 수 있었다. 어떤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가 자국 군인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용납하기 어렵다고 했다. 피해자들에게는 ‘군복 트라우마’가 공통적으로 있다. 국민을 지켜야할 자국 군인이 가해 행위를 했다는 점에서 더욱 괴롭다는 진술을 들으면 ‘5·18 성폭력’ 만이 갖는 특수성을 정의할 수 있다.

“무엇이 ‘40년만에 말하기’를 가능하게 했는가”

-성인지 감수성와 5·18 트라우마에 대한 이해가 조사관에게 필요하다고 했다.

윤=성폭력 사건을 다루는데 중요한 성인지 감수성만으로는 부족했다. 5·18 상황에서 겪은 트라우마를 이해해야 했다. 1980년 5월 27일은 ‘도청 재진입 작전’을 통해 도청이 진압된 날이다. 그날 연행된 피해자들의 진술이 처음에는 불투명했다. 자신이 탄 트럭이 어떤 이동 동선을 경유했는지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27일 새벽에는 긴 시간 M16 기관총으로 인한 총격이 있었다. 도심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던 상황에서 사람들은 ‘공포 상태’에 오래 있었는데 그 공포감 속에서 기억할 수 있는 게 무엇이었을까. ‘내가 탄 군용트럭이 몇 인승인지 기억 안 나요’라고 대답한다고 조사를 끝낸다면 이 피해자는 구체적 진술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성인지 감수성 외에도 5·18 트라우마와 공포를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조사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40년 만에 조사하면서 피해자들의 신체적·정신적·사회관계적 후유증이 길어지게 됐다.

이=후유증도 40년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사건 이후 신체적·정신적·사회관계적 복합 피해 실상이 어떤지 재정의가 필요했다. 사건 당시 죽음의 공포와 성폭력 피해가 교차됐다. 이후에도 말하면 ‘폭도’가 되거나 ‘시집 못 간다’고 생각했다. 복합외상증후군(CPTSD)을 겪은 분들이 많다. 대부분 피해자들이 이른 결혼을 하거나 남성과의 관계에서 낮춘 결혼을 하거나 여성으로서의 삶을 놓았다. 성폭력 피해에 대한 낙인 때문에 5·18 피해자들 안에서도 소외됐다. ‘전두환을 죽이고 싶다, 그런데 성폭력 피해자는 부끄러워 얼굴을 내밀면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한 피해자는 12월 진상규명 결정을 받은 후에 처음으로 5·18 묘역을 참배했다. 44년 만에 묘역 참배를 할 수 있다 생각한 게 마음 아팠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이다감 상담전문가가 지난달 28일 전남대학교 김남주홀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 하고 있다. 2024.04.28. 정효진 기자

-16건을 진상규명했다고 언론 보도가 많이 나왔다.

윤=과거 피해자들은 성폭력 피해에 대한 자극적 보도에 대해서, 조사위가 몇 건을 조사했는지 실적 위주의 활동보고에 상처를 받았다. 몇 건을 조사했는지, 몇 건을 진상규명했는지보다 중요한 얘기를 해야 한다. 40년이 지난 국가폭력 속 성폭력 사건을 진상규명한다는 것의 의미를 잘 봐주셨으면 좋겠다.

-‘무엇이 40여년 만에 말할 수 있게 했는지’ 봐달라고 했다.

이=무엇이 말하지 못하게 했는가도 중요하지만 40여년만에 무엇이 말하게 했는가를 같이 봤으면 좋겠다. 2018년 김선옥씨가 공개 증언을 통해 성폭력 피해가 ‘개인적 수치’가 아닌 ‘국가폭력’이자 ‘성범죄’라는 인식 변화를 보여준 것이 중요했다. 김씨 경우를 보면 자신의 피해를 대하는 인식이 계속 변화했다. 처음에는 ‘수모’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비난하던 단계에서 ‘성폭력’이라 명명하고 공적 조사에 임했다. 자신의 피해가 ‘국가폭력’이자 ‘인권침해’라는 인식 전환이 일어나자 자신이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 ‘목격자’이자 ‘증언자’로서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국가로부터 ‘내 피해가 사실이라 인정받은 것’의 의미는.

윤=피해자들은 자신의 두서 없는 말, 회피하고 싶었던 말이 공적 기록인 보고서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됐다. 국가의 진상규명에 자신이 기여했다고 인식하는 ‘역량 강화’도 엿보였다. “내 피해를 말하는 게 부끄럽지 않은 피해자”가 생겨난 것이다. 군복만 보면 구토 증상이 나와 힘들게 살던 여성은 군인이 된 아들에게 자신의 피해에 대해 말할 용기가 생겼다고 하기도 했다.

조사 과정이 곧 ‘치유의 말하기’

-조사와 상담을 병행했다.

이=피해자들은 5·18 피해에 성폭력 피해가 편입되지 않아 늘 소외돼왔다.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데 이미 늦었다는 분, 아플 만큼 아팠다는 분, 보상해준다 해도 40년간의 의료비도 안 될 거다 하신 분들도 있다.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 개인의 피해가 아니라고 알려드리려고 노력했다. 삶의 서사를 듣는 방식으로 진술을 청취했고 상담할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일어서게 하고 회복하게 한 요인은 무엇인가’를 파악했다.

-조사 과정이 ‘치유의 말하기’ 과정이었다.

이=가부장제라는 사회적 맥락을 들여다볼 수 있는 상담 접근이 필요했다. 몇몇 피해자들은 저희 조사관들에게 자신의 상처를 ‘끄집어낸’ 유일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게 치유 요인이었던 것이다. 조사와 상담이 결합된 ‘치유적 말하기’다. 조사관은 들어줬고 물어줬고 공감해줬다. 본인도 몰랐던 더 깊은 속의 이야기를 끌어냈고 그를 토해낸 경험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진상규명 결정이 나오고선 ‘종결상담’을 했는데 한 분 한 분 연락드려 ‘43년 만에 나온 진상규명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대화하고 이 결과에 대한 의미화도 도와드렸다. 후련하시단 분이 많았다.

-“단 3명이었으면 입증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이=조사 중에 연행 이후 상무대 화장실 문을 열고 볼 일을 보게 했다는 진술이 나왔다. 강간 피해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조사가 끝날 무렵 한 피해자가 강간 피해에 대해 꺼내놨다. 강제추행에 대해서만 진술했던 피해자였다. 예상대로 화장실에서 병사에 의한 강간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이처럼 모든 힘은 당사자로부터 나온다. 당사자가 움직이지 않으면 어떤 것도 시작할 수 없다. 그결과 서로가 서로의 피해를 증언해줄 수 있었다.

-피해자들 일부가 만나고 싶어했고 조사위가 간담회를 마련했다. 그리고 자조모임으로 이어졌다.

이=혼자만 피해 당한 줄 알고 외로웠다는 분이 많았다. 조사위가 문을 닫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분도 계셨다. 지난달 28일 이분들이 처음 만났고 집단의 장으로 나오게 됐다. 다른 피해자를 실제 만나면서 서로가 서로의 증인이라는 걸 깨닫는 과정을 걸어가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이 자신의 삶의 서사를 새롭게 구성해가는 과정이다. 이제 사회적 맥락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적극 내주신다면 또다른 서사를 만들어가게 될 것이다.

“1979년 부마항쟁에도 성폭력 피해자가 있다”
가해 군인·수사관들의 양심선언은 나오지 않아
“조사에 응해준 계엄군들에게 감사하다”

-부마항쟁 피해자가 피해를 호소하는 전화를 걸어왔다고 들었다. 기사에 언급해도 되나.

윤=그렇다. 김선옥씨에게 부마항쟁 때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는 피해자가 ‘부마에서 같은 피해를 입었다. 우리를 도와달라’는 연락을 해왔다. ‘우리’라고 복수를 사용했다 한다. 김씨가 당시 공개 증언 이후 트라우마가 심했고 연락을 이어가지 못했다. 다른 과거사 성폭력 피해자들도 침묵의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는 분들이 많지 않았을까. 형제복지원 조사 결과에도 성폭력이 만연했다는 내용이 담겼지만 피해자의 증언을 충분히 청취할 수 없었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된 것으로 알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법에는 성폭력이 조사 대상으로 규정돼 있지 않다. 5·18 성폭력 진상규명조사 보고서가 향후 다른 과거사 조사에 참고 자료가 되었으면 좋겠다.

5·18 성폭력 피해자 간담회가 열린 지난달 28일 전남대학교 김남주홀에 참가자들이 가져온 물품이 놓여 있다. 2024.04.28. 정효진 기자

-가해 군인들과 수사관들의 양심 선언은 나오지 않았다.

윤=처벌 목적의 조사는 아니지만 가해자를 특정한 사건이 있었고, 피해자에게 참회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했다. 그러나 마지막 조사에서도 자신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한 명이라도 진심으로 사과해주길 원했는데, 대단히 아쉽다. 그러나 적지 않은 군인들과 경찰이 조사에 참여했다. 1980년 당시 제7공수여단에 복무한 298명 중 29명의 진술을 청취할 수 있었다. 계엄군의 진술을 통해 5월 18일 투입 직후 발생한 여성에 대한 강제 탈의가 대대장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화니백화점 앞에서 군용트럭으로 10대 여성을 납치해 가는 걸 본 목격자의 제보 진술도 있다. A라는 사건의 직접 목격자는 아니지만 이러한 진술은 정황 증거가 됐다. 한편 조사 과정에서 현장에 투입된 계엄군들의 상당수가 죄책감과 수치심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 계엄군들은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이 완전무장한 상태로 시민을 유혈진압했다는 점에 대해서 자신의 명예가 실추됐다고 느끼고 있었다. 광주시민과 피해자들을 위해 자신의 떠올리기 힘든 기억을 증언해주신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5·18 성폭력 진상조사의 한계가 있다면.

윤=52건의 피해 의혹 사건 가운데 피해자의 동의를 얻어 진상규명 여부를 판단한 사건은 19건에 불과하다. 조사를 거부한 사건들이 피해 양상이 더 심각하다. 또 사건 후 사망하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한 피해자, 현재까지 정신병원에 입원 중인 피해자와 가족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위로할 방안을 찾지 못했다. 저희는 첫 발을 뗀 거라고 생각한다. 다음 바통을 이어받을 분들이 나타나 남은 숙제를 할 거라고 생각한다.


☞ 잊히지 않는 소리 냄새…1명이 ‘기억’ 꺼내자 150명이 덧붙였다 [우리는 서로의 증언자③]
     https://www.khan.co.kr/national/gender/article/202405200600091


☞ 기획·연재 | 우리는 서로의 증언자
     https://www.khan.co.kr/series/articles/as393

임아영 젠더데스크 layk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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