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섭권 빼앗으려…회사가 ‘어용노조 가입’ 노골적 압박

전종휘 기자 2024. 5. 20.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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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창간기획 노조탄압보고서-하
부당노동행위 1심 판결 168건 분석

“전략적 복수노조 설립 유도: 사용자가 기존 노조를 견제하거나 회사 입장을 최대한 반영하기 위하여 전략적으로 제2, 제3 노조의 설립을 지원함으로써 복수노조가 설립될 수도 있음. (중략) 사쪽에 우호적인 노조와 그렇지 않은 노조를 분리하여 차별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사쪽에 우호적인 노조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함.”

2011년 복수노조 허용 뒤 조합원 많은 쪽 ‘교섭권’

한 사업장에 복수의 노동조합 설립을 허용할지에 관한 논의가 이뤄지던 2004년, 한국의 대표 사용자단체인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작성한 ‘복수노조의 문제점과 대응 방안’ 문건의 일부다. 사용자가 노조 설립을 지원하거나, 노조의 성향에 따라 차별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노조 활동에 지배·개입하는 부당노동행위가 된다. 20년 전 경총이 세운 ‘어용노조 설립·지원’ 전략은 2011년 7월 복수노조 설립 허용과 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가 도입된 이후 대표적인 ‘부당노동행위’ 사례로 떠오르고 있다.

19일 한겨레가 2017~2023년 7년 동안 법원이 선고한 부당노동행위 형사 1심 판결 168건을 살펴보니, 회사가 어용노조를 직접 설립하거나 지원한 부당노동행위로 유죄가 인정된 사건은 16건이었다. 대부분이 기존에 설립된 노조를 와해할 목적으로 어용노조를 설립한 사례다. 어용노조로 피해를 본 노조의 상급단체는 14건이 민주노총으로, 민주노총 소속 노조 무력화를 위해 사용자들이 어용노조를 설립한 것으로 해석된다.

2011년 7월 복수노조 시행 직후부터 삼성에버랜드와 유성기업 등에서 시작된 ‘어용노조 활용’ 부당노동행위는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현행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는 한 사업장에 복수의 노조가 있는 경우, 조합원이 1명이라도 더 많은 노조가 ‘교섭대표노조’가 돼 단체교섭권을 모두 가져간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는 노조가 설립되면 그 노조의 교섭권을 빼앗기 위해 어용노조를 설립하거나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168건 중 유죄 16건…실형은 4건

유죄가 선고된 판결문으로 구체적 사례를 보면, 2020년 3월 초 골판지 제조업체인 대양판지에서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 소속 지회가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함에 따라 기존에 있던 다른 기업노조가 교섭대표노조 지위를 잃을 가능성이 생기자 어용노조를 새로 설립해 금속노조의 세력 약화에 나섰다. 회사는 어용노조 설명회에서 “회사가 민주노총에 대응하는 노조를 만들려 한다. 회사를 이기려 하지 말고 회사 쪽 노조에 가입해 줄을 잘 서라”며 노골적인 어용노조 지원에 나섰다. 회사가 특정 노조 조합원에게만 금전적 지원을 몰아주기도 한다. 한국도로공사에서 톨게이트 운영업무를 위탁받은 용역업체는 기존 노조가 교섭대표노조가 되자, 이 노조와 임금·단체협상을 하지 않기 위해 어용노조를 세운 뒤, 기존 노조의 조합원을 빼오기 위해 조합비를 대신 내주는가 하면, 어용노조에 가입하지 않으면 근로계약을 갱신하지 않겠다고 압박하기도 했다.

어용노조 설립·지원 등으로 사용자가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16건의 형량은 실형 4건, 징역형 집행유예 8건, 벌금 4건으로 다른 유형의 부당노동행위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사용자가 어용노조를 앞세워 기존 노조를 파괴하는 것이 일터의 평화를 깨고 오랜 후유증을 남긴다는 점에서 여전히 처벌이 가볍다는 지적이 나온다.

광주광역시에서 완성차업체에 자동차 차체를 납품하는 호원은 민주노총 금속노조 호원지회를 파괴하려 총괄사장이 나서 “민주노총 쪽 노조는 조합비도 비싸고 강성”이라며 어용노조 가입을 독촉한 혐의로 기소됐으나,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뒤 지난해 1월 항소심에서 벌금형으로 감형됐다. 신상곤 금속노조 호원지회장은 한겨레에 “법원 판결 이후에도 회사가 단체교섭에 응하지 않고 있다”며 “사용자에 대한 처벌을 자꾸 깎아주면 사용자는 돈으로 때우려고 한다.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용자의 어용노조 설립에 대한 처벌 강화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 자체를 손봐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상은 변호사(법률사무소 새날)는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로 인해 사용자가 ‘민주노조’의 교섭권을 빼앗고자 어용노조를 설립하고 있는 것이므로, 모든 노조의 교섭권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개편해야 한다”고 밝히는 한편, “고용노동부도 노조 설립신고 단계에서 사용자 쪽의 지원을 받은 것인지를 적극적으로 확인해 부당노동행위로 처벌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종휘 박태우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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