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대사 못 보니 들으며 암기… 상대 표정도 기억해뒀다 끄집어내”

이강은 2024. 5. 19.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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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웃음의 대학’서 검열관役 송승환
황반변성 등 이유 시각장애 4급 판정
연기 60년 노련미·노력으로 난관 극복
정확한 발걸음수 세며 동선 짜고 연습
희극 대본 공연 허가하는 검열관 역할
대본 검열의 과정서 대립 담은 2인극
“희극 빠져들어 본성 되찾는 과정 그려”
지난 17일 저녁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연극 ‘웃음의 대학’이 공연되는 내내 극장 안은 유쾌한 웃음소리가 넘쳤다. 무대 위 ‘검열관’(송승환)이 희극 대본의 공연을 허가할지 말지를 놓고 ‘작가’(주민진)와 옥신각신하면서 주고받는 대사가 맛깔나서였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장면을 일부 활용한 극중극 등 곳곳에서 웃음을 유발한 두 배우의 찰떡호흡 연기도 일품이었다. 특히 송승환(67)은 시각장애가 있다고 믿어지지 않는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안정적인 연기로 극을 이끌었다. 데뷔한 지 60년을 코앞에 둔 배우의 노련미에다 작품 완성도를 위한 피나는 노력이 빚은 결과다. 그는 5년 전 황반변성과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각장애 4급 판정을 받고 운전면허도 반납했다.
송승환이 지난 17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연극 ‘웃음의 대학’에 관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연극열전 제공
공연 전에 만난 송승환은 “(의사가) ‘죽을 때까지 실명은 안 할 거다’라고 해서 안심이지만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며 “눈앞에 안개가 가득 낀 듯해서 30㎝ 앞만 볼 수 있다. 그 이상 떨어진 사람 얼굴은 안 보인다”고 말했다. 그래서 대사도 눈이 아닌 귀로 외운다. 대본을 읽을 수 없으니 낭독해준 걸 들으면서 암기하는 것이다. 송승환은 “(어떤 표정인지 안 보이는) 상대 배우와 교감하려면 대사로 반응해야 하기 때문에 귀가 굉장히 예민해져야 한다”며 “상대의 표정이 궁금한 순간에는 (연습할 때) 가까이 가서 해당 표정을 본 뒤 공연에선 그 기억을 끄집어내 연기한다”고 했다.

또 서서 돌아다니거나 앉아서 연기할 때 의자와 테이블 등 소품에 부딪히거나 무대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발걸음 수를 정확히 세며 동선을 짜 연습했다고 한다. 공연 내내 송승환이 퇴장은 한 번만 하고 계속 무대에 머무는 것도 공연 중 암전 속에 등장과 퇴장이 부담스러운 점을 감안한 것이다.

그는 “암전 후 퇴장할 때 관객들은 눈치채지 못하도록 작가 역할 친구가 조용히 나를 데리고 간다”며 “첫날 공연에선 발걸음을 잘 못 셌는지 무대로 나오는 입구를 못 찾아 3초 늦게 등장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최근 개막한 연극 ‘웃음의 대학’에서 송승환(오른쪽)이 군국주의와 전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연극은 공연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작품 검열을 하는 ‘검열관’ 역을 맡아 열연하는 모습.
송승환은 2022년 연극 ‘더 드레서’ 출연 이후 다음 작품으로 ‘웃음의 대학’을 꼭 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희극이지만 연극을 통한 인간성의 회복 등 주제가 강한 데다 대본 자체가 훌륭해서 코믹한 연기 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뛰어난 작품이에요. 검열관이 중간에 뛰어다녀야 해서 체력도 중요하기 때문에 더 늙으면 이 역할을 못 할 것 같았습니다.(웃음)”

일본 스타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미타니 고키(63)가 지은 ‘웃음의 대학’은 전시 상황이란 이유로 관객에게 웃음을 전하는 희극 작품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권위적 검열관과 공연이 절실한 희극 전문 극단의 작가가 대본 검열 과정에서 대립하는 내용의 2인극이다. 1996년 일본 초연 후 요미우리 연극대상과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고, 국내에서는 연극열전이 2008년 첫선을 보인 뒤 2016년까지 35만명 관객이 본 인기작이다.

검열관은 공연을 허가하지 않기 위해 “웃기는 대목은 모조리 삭제하라”며 작가가 들고 온 ‘로미오와 줄리엣’ 대본 수정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작가는 공연 허가를 받으려 무리한 요구를 계속 받아들인다. 작가가 제목을 ‘햄릿과 줄리엣’으로 바꾸고, “‘천황폐하 만세’를 꼭 집어넣어라”는 검열관 요구에 햄릿이 세 마리 말을 타는 설정을 한 뒤 이름을 각각 ‘천황’, ‘폐하’, ‘만세’로 지어 대본을 고치는 식이다.

이렇게 대본을 손질할수록 내용이 더 재밌어지고, 평생 웃음과 담쌓으며 국가주의의 하수인으로 살아온 검열관은 점점 연극의 매력에 빠지며 작가의 조력자가 된다.

송승환은 “공권력의 말단인 검열관 지위를 이용해 권력을 휘두르던 고압적인 관리가 검열하다 희극에 빠져들고 천진난만한 인간 본성을 되찾는 과정이 대사로 완벽하게 표현돼 있다”며 “배우가 대사와 그 상황에만 충실하면 코믹하게 보이는 좋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1965년 KBS 연속극 아역배우로 시작해 연기 인생 60년을 앞둔 그는 ‘난타’ 등 공연 제작자와 연출가, 2018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 등 축제·예술 총감독으로도 종횡무진했다. 송승환은 “지금까지 (배우 생활 등을) 할 수 있었던 건 주변에서 많은 사람이 도와준 덕분”이라며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르거나 의뢰를 받으면 최선을 다해 실천하는 쪽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예전에 장관직 등 각종 기관장 자리를 제안받기도 했지만 “양복 입고 넥타이 매는 건 체질에 안 맞아 10초 만에 다 거절했다”고 덧붙였다. ‘웃음의 대학’ 공연은 6월9일까지이고, 배우 서현철(검열관 역)과 신주협(작가 역)도 번갈아 출연한다.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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