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의 즐거움 [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한겨레 2024. 5. 1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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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잉넛’ 기타리스트 이상면이 먼저 읽고 그리다.

한경록 |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이것저것 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는데 마음만 분주한 날들이 있다. 마음은 바쁜데 막상 일은 손에 잡히지 않을 때 나는 일단 정리 정돈을 한다. 몸을 움직이니 가벼운 운동도 되고, 효율적인 공간 활용을 위해 동선까지 염두에 둬서 물건들을 정리하려면 뇌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스트레칭한 기분이 든다. 그래도 마음이 안 잡힐 때가 있다. 그럴 땐 멍한 마음으로 베이스 기타를 목탁 두드리듯 둥둥거리며 연주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크라잉넛은 1995년부터 홍대 라이브 클럽 ‘드럭’에서 공연을 시작해 내년에 벌써 30주년을 맞이한다.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니 시간이 참 빠르게 느껴진다. 잠시 허공을 바라봤다. 시간은 사진처럼 멈춰있는 것 같은데, 계속 흐르고 있다니 참 신비롭다. 스무 살의 철없던 꼬맹이들이 음악을 한답시고 홍대 길거리를 바스락거리는 낙엽처럼 굴러왔다. 한 번도 쓰러져 본 적이 없는 팽이처럼 아직도 채찍질하며 신나게 돌고 있다. 아직까지 첫 직장에서 퇴사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대한민국에서 인디 뮤지션으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다. 꼭 주류 음악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하기 위해 독립적으로 헤쳐나가는 것이 인디인데, 이 과정을 지속하기란 만만치가 않다. 인디 뮤지션으로서의 자유와 낭만을 얻는 대신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다. 모든 과정을 직접 해나가야 한다. 작사, 작곡, 연주뿐 아니라 녹음, 홍보, 기획, 무대 연출, 공연까지 아티스트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소통하고 만들어가야 한다. 인디 뮤지션 중에는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많아서 대부분 순수하게 음악 작업만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다.

크라잉넛의 30주년은 대한민국 인디 30주년이기도 하다. 우리의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벌써 분주하게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가 자가발전기처럼 스스로 동력을 만들어 빛을 뿜지 않으면, 요즘같이 바쁜 시기에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상념들에 휩싸이고 괜한 초조함에 마음이 짓눌려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작업실에 있던 베이스 기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기다렸다는 듯이 무릎에 앉아 둥둥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베이스 기타 특유의 저음 주파수가 들떴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30년 넘게 매일 연주했지만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이었다. 합주나 공연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새롭게 찾아낸 쉼터 같았다.

그리고 며칠 동안 기초적인 프레이즈를 반복하고 멍 때리며 연습을 했더니 시간의 물살에서 벗어나는 듯한 고요함을 느꼈다. 고등학교 때 입을 헤 벌리고 몰입해서 기타 연습을 하다가 맑은 침이 쭈욱 하고 길게 늘어져서 ‘스읍’ 하고 빨아들였던 기억이 나서 혼자 피식 웃었다. 연습을 통해 기분이 한결 나아지고 생각도 정리됐다.

‘그래, 맞아. 음악이 재미있어서 시작한 거지’ 하면서 초심을 돌아봤다. 가끔 일에 지칠 때,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재미’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인가 일이나 취미를 시작했을 때 연습하면서 느낀 재미. 좋아하는 것을 연습할 때 치유의 힘이 있다고 믿는다. 새로운 운동을 배우거나 취미를 시작하거나 좋아하는 분야를 공부하고 지속해서 연습할 때, 고단한 일상을 잊고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 되는 것 같다.

악기 연습은 넘어질 때 예쁜 소리가 나는 도미노를 세우는 일 같다. 일정한 간격으로 크고 작은 색깔의 도미노를 세우는 일.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고 인고의 시간을 거듭해 무대 위에서 그 도미노를 쓰러뜨리면 짧은 시간이지만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그림을 만들어낸다. 그러면 사람들은 감탄하고 어떤 위로를 받고 그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공연과 달리 연습은 실수해도 괜찮다. 관객에게 혹평을 받을 일도 없고 동료에게 미안할 일도 없다. 연습은 도미노를 하나하나 세우는 과정이다. 어쩌면 나를 위한 작은 음악회인지도 모르겠다. 번뇌가 쌓일 때 뜨개질이든 운동이든 악기든 산책이든, 나만의 리듬을 찾아 연습을 해보자. 그리고 삶이라는 음악을 연주해 보자. 우울했던 자리에 초록 음표들이 채워질 것이다.

내년 크라잉넛 30주년과 인디 30주년을 즐겁게 준비하고, 많은 인디 뮤지션과 인디 문화를 사랑하는 분들과 기념하고 즐기고 싶다. 30년 동안 함께 쌓아온 도미노로 파도를 타고 싶다. 우리는 쓸쓸히 떨어지는 낙엽이 아니라 자유롭게 세상을 여행하는 꽃잎이라고…. 우린 아직 살아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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