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명은 그렇게 빛과 색이며 따스함이다

심정택 칼럼니스트 2024. 5. 19.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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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에너지를 도시인에게 전하는 허윤희 작가의 《여는 바당》

(시사저널=심정택 칼럼니스트)

한국의 전통 사찰은 대웅전에 이르기 위해 일주문(一柱門), 불이문(不二門) 등을 지나야 한다. '과정적 공간(processional space)'을 중요하게 본다.

허윤희 작가(53)가 이주한 제주도를 궁극의 작품 세계에 이르는 '과정'으로 이해한 건 잘못이었다. 이사는 자연에서의 삶과 함께 작업 공간을 얻는 게 현실적 이유였다. 천장 높은 60평 작업실을 갖게 되었다. 서울이나 외곽이면 얻지 못할 공간이다. 작가는 3년 전에 기존 작업실을 확장해 삶의 오랜 무대인 서울 종로구 평창동 일대 또는 교외에 얻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맘껏 작업할 수 있고 작품 보관 걱정 없는 공간은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기지(基地·베이스 캠프)다.

부산 동구 출생의 허윤희는 바다가 보이는 범일동 집 옥상에서 놀았다. 1995년 서울에서 예고와 미대를 졸업하고, 독일 북부 도시의 국립 브레멘예술대학(HFK Bremen)에서 유학(1995~2004) 시절을 보냈다. 당시 학교 옆으로는 강(운하)이 흘렀고, 바다를 매일 접했다.

ⓒ시사저널 이종현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문을 찾다

이주자로서 정체성을 고민하며 내면의 거울에 비춰보는 고독한 생활 가운데 매해 여름 스승이 예술아카데미를 연 남부 프랑스 툴루즈(Toulouse) 갈란에서 여름을 보냈다. 맨발로 다니며 민들레 잎을 따 샐러드를 만들고, 페퍼민트 잎을 우려 마셨다. 언젠가는 시골(자연)에서 살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허윤희는 2004년 졸업식에서 최고상인 브레멘예술대학상을 받았다.

허윤희의 목탄 작업 《별 밤》에서는 멸종되는 식물의 이파리가 별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대상인 화자(話者)는 얼굴을 감싸고 있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1932~2016)가 말한, "인생의 덧없음과 시간과 죽음이 삼켜버린 것을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깊은 비애감"을 표현한다.

허윤희는 인연 맺은 친구들의 초상화를 그리듯 멸종 식물을 하나하나 그렸다. 대상을 그릴 때 어떤 분위기로 자신의 마음을 담을까 고민한다. 절정의 아름다움, 사멸(死滅), 안타까움, 절망을 한 화면에 물이 떨어지는 모습으로 강렬하게 원색적으로 그려 넣었다.

2022년 12월 제주도에 정착한 후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방식의 작업이 필요했다. 2023년 10월부터 시작한 사생은 감각을 열고 관찰하는 게 우선이었다. 범섬과 강정 마을이 보이는 서귀포 중문 바닷가에 자리 잡았다. 누구나 그렇듯 작가는 매일 해가 뜨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에너지를 받으려 일출 사생을 시작했으나 해가 뜨지 않는 흐린 날도 있다. 파도 소리만이 들리는 새벽의 고요에 귀를 열었다. "비 오고, 구름 잔뜩 끼고,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도 좋은 날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사생은 12호(45.5ⅹ60.6cm) 크기 캔버스나 종이, 같은 장소 등 동일한 대상이지만 매번 새로웠다. 의식이 깨어있다는 느낌이 좋았다. 바다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우주에서 벌어지는 매번 다른 축제의 퍼포먼스를 보며 인간은 발붙이고 살아있음을 알게 됐다. 일출 사생을 위해서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했다. 어느덧 몸이 알아서 반응했다. 비로소 자연의 삶 속으로 스며들었다.

모든 실내 작업은 생각의 소산이다. 벽 한 면을 가득 메운 작품은 머릿속에 미리 디자인된 관념을 풀어 만든다. 스케치 없이 페인팅에 들어가는 사생은 원초적이고 감각적이다. 오랫동안 목탄을 재료로 사용했으나 작업실 밖 거대한 자연 앞에서는 색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매일 받는 빛의 광합성 효과는 식물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직접적으로 혜택을 준다. 태양과 자신이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자신이 생명이고 빛이라는 느낌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작가는 오랫동안 감정에 끌려가는 게 싫어 색을 끊어버렸으나 사생을 하면서 색을 불러냈다. 허윤희는 "제주도에 와서 온전하게 되는 것 같다. 요동치고 분출하는 내면의 감정도 받아들이게 됐다"고 했다.

ⓒ시사저널 이종현

붓 한 자루를 통해 먼 우주로 여행

제주로 이사 오기 전에 작가는 한 달 살기를 했다. 그때를 회상하며 "달과 태양이 반대편 하늘에 동시에 떠서 보여주는 색채의 향연은 황홀해 넋이 나갈 정도"라고 회상했다.

작가는 해돋이를 그리며 우주의 질서를 생각해 본다. 태양은 빛과 색이며 온기다. 우리 생명은 그렇게 빛과 색이며 따스함이다. 인간도 원래 밝고 빛나고 따스한 존재다. 어둡고 우울하고 차가운 존재가 결코 아니다. 겨울에 태양은 매일 1분씩 늦게 뜨더니, 동지를 지나서 1분씩 일찍 뜬다. 떠오르는 지점도 조금씩 이동한다.

작가는 회화, 비디오(영상), 설치 등 장르 스펙트럼이 넓다. 드로잉은 회화 작업의 주요 수단이다. 유화, 아크릴, 파스텔, 과슈 등 재료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일출 영상은 회화의 기록이다. 그 자체로 완성된 작품이다. 르네상스 예술가는 자연을 모방했다. 매너리즘, 고전주의 예술가는 자연을 초월하기 위해 자연의 사례들을 재구성했다. 19세기 예술가는 자연을 경험했다. 큐비즘 예술가는 자신의 자연 인식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윤희 작가는 스스로의 표현처럼 '붓 한 자루 들고 캔버스를 통과하여 먼 우주로 여행 가는 작가'다. 서귀포 중문이라는 우주 발사체 기지에 머무른 다음 행보가 기다려진다. 작가는 제주에서 받아들인 태양의 에너지를 도시인들에게 전한다. 전시 '여는 바당'은 6월12일까지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복합문화공간 '수애뇨 339'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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