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는 벽에 미술품을 걸지만 노동자는 바닥에 LP를 쌓는다 [비장의 무비]

김세윤 2024. 5. 19.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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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등에 지고 시골길을 걷는 남자의 뒷모습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그들은 음악산업의 황금기를 상징해요. 음악이 예술로 인정받았고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예요. 이제는 음악이 상품에 불과하죠. 음악이 바꿀 수 있는 건 음반사의 주가뿐이고요. 그 시절 록스타들은 예술가였고 그래픽 디자이너도 예술가였죠. 누가 이런 훌륭한 말을 했어요. 'LP는 가난한 이의 미술 소장품이다.' 부자들은 벽에 미술작품을 걸지만 노동계급은 바닥에 미술작품을 쌓아두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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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
감독:안톤 코르빈
출연:오브리 파월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

무언가를 등에 지고 시골길을 걷는 남자의 뒷모습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허름한 창고에 들어가 앉아 짐을 내리더니 그 안에서 뒤적뒤적 종이를 한 장씩 꺼내 보인다. 피터 가브리엘의 〈카즈(Cars)〉와 10cc의 〈디셉티브 벤즈(Deceptive Bends)〉와 핑크 플로이드의 〈위시 유 워 히어(Wish You Were Here)〉 앨범 커버 이미지가 차례로 카메라 앞에 펼쳐졌다 땅에 떨어진다.

“힙노시스(Hipgnosis)는 이름 그대로예요. 힙하고 쿨하고 근사하고 현명하다는 뜻이죠.” 이렇게 말문을 여는 남자는 영국 디자인 스튜디오 ‘힙노시스’ 공동 창립자 오브리 파월. 그가 ‘LP 커버의 전설’로 남은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오프닝. 눈치 빠른 관객은 알아챌 것이다. 단정한 흑백 화면 안에서 오직 앨범 커버 이미지만 선명한 컬러로 표현되고 있다는 걸.

사진작가 출신으로 뮤직비디오를 찍다가 영화감독이 된 안톤 코르빈은 자신에게 작품을 맡긴 ‘힙노시스’가 아니라 그들이 만든 ‘LP 커버’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대중음악 앨범 커버가 현대미술의 경지에 이른 시대’를 증언하는 록스타를 흑백으로 뭉뚱그리면서, 그 짧고 멋진 시대가 담긴 자료 화면과 그 미치광이 괴짜들이 남긴 LP 커버를 컬러로 살아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컴퓨터 그래픽도 포토샵도 없던 시절이었다. 불붙은 사람 이미지가 필요하면 스턴트맨을 불러 연거푸 열다섯 번 실제로 몸에 불을 붙이는 식이었다. “고작 앨범 커버에 들어갈 사진 한 장” 찍으려고 사하라 사막에서 에베레스트까지 찾아다녔다.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일일이 손으로 오려 붙여 ‘앨범’을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하다 보니 재미있고 재밌어서 계속했고 계속하니 어느새 예술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음악산업의 황금기를 상징해요. 음악이 예술로 인정받았고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예요. 이제는 음악이 상품에 불과하죠. 음악이 바꿀 수 있는 건 음반사의 주가뿐이고요. 그 시절 록스타들은 예술가였고 그래픽 디자이너도 예술가였죠. 누가 이런 훌륭한 말을 했어요. ‘LP는 가난한 이의 미술 소장품이다.’ 부자들은 벽에 미술작품을 걸지만 노동계급은 바닥에 미술작품을 쌓아두는 거죠.”

밴드 오아시스 멤버 노엘 갤러거의 인터뷰를 가슴에 품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어릴 적 열심히 사모은 핑크 플로이드 LP를 꺼내 바닥에 늘어놓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핑크 플로이드 앨범을 사 모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힙노시스 작품을 사 모았구나. 나도 몰랐던 ‘내 인생의 아티스트’가 줄곧 내 곁에 있었구나.

영화 〈라라랜드〉에서 차가운 센강에 뛰어든 이모 이야기를 들려주며 미아(엠마 스톤)는 노래했다. “조금은 미쳐도 좋아. 지금까지 없던 색깔을 보려면. 그게 우릴 어디로 이끌진 아무도 몰라.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이 필요한 거야. 반항아와 이단아. 꿈꾸는 바보들.”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이 바로 그런 이야기다. ‘반항아와 이단아, 꿈꾸는 바보들’이 우리 삶에 더해놓은 ‘지금까지 없던 색깔’을 만끽하기 위해 ‘가난한 이의 미술 소장품’에만 선명한 컬러를 선물한 이유다.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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