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다음은 누구인가 [독서일기]

장정일 2024. 5. 19.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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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의 위기〉
차태서 지음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펴냄
ⓒ이지영 그림

〈철학과 국가〉(빈서재, 2024)는 도쿄제국대학에서 첫 번째로 철학을 전공한 학생이자 같은 대학 철학과에서 첫 번째로 교수가 된 이노우에 데쓰지로(1855~1944)의 논문 선집이다. 그는 두 가지 업적으로 일본 현대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하나는 천황제 가족국가의 이념적 틀을 제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주창한 ‘현상즉실재론’이 일본 최초의 독자적 철학이라는 교토학파에 논리적 기초를 제공한 것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윤리학’ ‘미학’ ‘언어학’ 등도 그가 만든 번역어다.

메이지 정부는 1889년, 국가주의와 유교주의를 기조로 하는 제국헌법을 공포하고, 이듬해인 1890년 교육칙어를 전국의 교육기관에 하달했다. “짐(朕)이 생각건대 우리 황조황종(皇祖皇宗)은 나라를 세움이 유구했고 덕을 베풂이 깊고 두터웠다. 우리 신민(臣民)이 충을 극진히 하고 효를 극진히 하여 억조(億兆)가 마음을 하나로 하여 세세토록 그 아름다움을 다하는 것은 바로 우리 국체(國體)의 정화(精華)로서 교육의 연원 또한 실로 여기에 있다”로 시작하는 교육칙어는 학생들에게 천황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을 명한다. 이노우에는 교육칙어에 대한 공식적인 해설서 〈칙어연의〉(1891)를 써서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수호했다.

이노우에는 교육칙어에 저항하는 기독교계를 공박하기 위해 〈종교와 교육〉(1893)을 썼다. 그는 기독교의 폐해를 이렇게 정리했다. 첫째, 국가를 제일로 삼지 않는다. 둘째, 충효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셋째, 출세간(깨달음의 경지)을 중시하고 현세를 경시한다. 넷째, 그들의 박애는 묵자의 겸애처럼 무차별적이다.

유교적 관점에 선 이노우에의 기독교 비판은 조선 개국 초기, 정도전(1342~1398)이 쓴 불교 비판서 〈불씨잡변〉(1398)의 논변과 일치한다. 하지만 앞서 본 교육칙어에서도 효보다 충이 먼저였듯이, 이노우에가 국민 윤리를 정립하기 위해 전유한 유교 또한 왜곡되었다. “중국에서는 충보다 효가 우월한 덕목이었지만, 일본에서는 충과 효가 하나의 뿌리이며 혹 충과 효가 갈등할 때에도 충이 우선시된다며 ‘충효’를 일본의 덕목으로 자리매김한다.” 박정희가 반포한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한 서울대학교 철학 교수 박종홍은 경성제국대학교 철학과 시절, 봉건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이노우에 철학을 학습했을 것이다.

미국 대선을 주의 깊게 봐야 하는 이유

‘탈단극 시대 미국과 세계질서’라는 부제를 가진 차태서의 〈30년의 위기〉(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24)는 실타래가 얽힌 것 같은 오늘의 국제 정세를 통찰할 수 있게 해준다. 지은이는 1991년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된 때부터 현재까지의 30년과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를 일컫는 전간기(戰間期, 1918~1939) 20년 사이에 평행구조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동서 냉전의 승리로 활짝 열린 팍스아메리카나(Pax Americana·미국이 지배하는 세계질서)는 10년밖에 지속하지 못했다. 2001년 9·11 사태는 미국의 힘과 이념적 통솔력(소프트 파워)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후 지속된 테러와의 전쟁이 실패하고 금융위기까지 맞게 된 2008년을 기점으로, 소비에트 해체 이후 현재까지의 30년을 전간기에 빗댈 수 있는 구조적 조건이 형성되었다. 지난 30년 동안 세계질서의 담당자였던 미국은 군사적 패권의 취약성과 중국의 부상, 신자유주의라는 미국식 이상주의의 한계로 내부 균열 및 외부의 도전을 맞게 되었다. ‘세계 경찰’ 노릇을 하는 미국 패권주의(자유국제주의 노선)와 그로 인한 세계화에 희생당했다고 생각하는 ‘(기독교) 백인 기층민’의 불만은 도널드 트럼프 현상으로 폭발했다. 트럼프가 2020년 대선에서 패배하자 그의 지지자들이 일으킨 2021년 1월6일 의회 점거 사태는 미국의 내부 균열이 남북전쟁 직전의 상황임을 보여준다.

전간기 20년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주도의 안정적 세계질서가 재건되지 못한 가운데 자유방임 경제와 자유주의적 이상주의가 몰락한 시기다. 그 결과 세계 곳곳에 파시즘이 날뛰고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파멸을 맞게 된다. 지은이는 소비에트가 해체된 1991년부터 현재까지를 소비에트 해체 이전의 구냉전과 앞으로 닥치게 될 신냉전 사이의 휴지기로 본다. 전간기가 끝나갈 즈음 가장 중요한 행위자가 아돌프 히틀러였다면, 지은이가 말하는 휴지기에서 신냉전으로의 이행기에 가장 중요한 행위자는 누구일까. 올해 11월5일에 치를 미국 대선을 지켜봐야 할 이유다.

〈당과 인민〉(사계절, 2024)을 쓴 브루스 J. 딕슨은 “중국 정치의 본질을 관통하는 책”을 써보자는 생각으로 이 책을 저술했다고 말한다. 일찍이 김용옥도 동일한 포부로 〈도올, 시진핑을 말한다〉(통나무, 2018)를 썼다. 그는 “마오의 권력은 임기가 없는, 오직 그의 신체적 종료만을 기다리는 황제의 권력이었다. 그러나 시진핑의 권력은 10년이라는 명료한 기한 설정이 되어 있는 권력이다. 10년 후에 그는 다음의 후계자에게 깨끗하게 백지수표를 물려주어야 한다. 이것은 이미 부동의 제도가 되었다”라고 썼다. 하지만 그의 장담은 실현되지 않았다.

딕슨 교수(조지워싱턴 대학 정치학과)가 대중 강연을 할 때마다 미국의 청중이 자주 하는 질문이 “중국의 민주화 전망”이라고 한다. “내 의견은, 당이 권좌에서 물러난다고 해도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쪽이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전 세계에서 일어난 정권교체 사례를 보면 한 권위주의의 몰락은 새로운 권위주의 통치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많은 학자들은 민주주의의 전망을 탐구하기보다 공산당 정권의 취약성과 안정의 근원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 대답은 최악의 권위주의 정권보다 현재의 중국공산당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해석을 부른다.

국가가 번영할수록 민주주의 국가가 될 가능성도 상승한다는 ‘현대화 이론’은 잘 정립된 사회과학 이론인데, 중국공산당은 이 이론의 중요성을 공산당의 존립에 이용한다. “덩샤오핑부터 시진핑에 이르기까지 중국공산당은 경제적 현대화를 추진하면 대중의 지지를 얻고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번영은 오직 당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중국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회적 태도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재산과 재정 자원을 보호받는 데 관심이 있는 중산층의 빠른 성장 때문이라고 한다(그러므로 중국의 민주화 요구는 ‘중국몽’을 꾸지 못한 계층에서 시작될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제도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결합한 자유민주주의 이념 이외의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미국발(發) ‘역사의 종언론’은 ‘중국 모델’로부터도 도전받고 있다.

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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