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가 화보 찍었던 그 섬···‘필리핀의 마지막 미개척지’로 남겠다는 팔라완

이윤정 기자 2024. 5. 19.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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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완 푸에르토 프린세사 지하강국립공원. 물이 맑아 보트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윤정 기자

BTS 화보 촬영지, 신이 숨겨놓은 선물, 천국의 조각…. 필리핀 서쪽 끝, 팔라완에 붙는 수식어는 찬란하다. 그만큼 팔라완을 다녀간 여행자들이 이 섬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는 뜻일 것이다. 장엄한 산맥, 투명한 바다, 울창한 열대우림을 품은 팔라완은 지상낙원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직접 팔라완을 경험해보니 이 섬을 특별하게 만든 건 자연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 관광지임에도 팔라완은 개발보다 보존에 무게중심을 뒀다. 관광객이 급증하던 1990년대부터 이미 지속 가능한 관광, 친환경 농업,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산업 등을 목표로 내걸었다. 생태관광지로 각광받은 지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팔라완의 노력은 이어지고 있다. ‘필리핀의 마지막 미개척지’로 남겠다는 팔라완의 자연 깊숙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2017년 팔라완 코론을 방문한 방탄소년단(BTS) 멤버들. 왼쪽부터 뷔, 제이홉, 슈가, RM, 진, 지민, 정국. 엑스(옛 트위터) 갈무리
공주의 항구···동굴 속 미지의 지하강
팔라완 푸에르토 프린세사 지하강국립공원. 이윤정 기자

필리핀은 섬의 나라다. 무려 7641개의 섬이 필리핀에 속해 있다. 팔라완도 필리핀 서쪽 끝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섬 1780개가 모여 있는 주다. 팔라완의 전체 면적은 제주도의 약 7배에 달한다. 동서 길이는 40㎞이지만 남북 길이는 600㎞에 달해 팔라완을 종단하려면 하루가 꼬박 걸린다고 한다. 일정이 여유롭지 못한 여행자들은 푸에르토프린세사, 엘니도, 코론 중 1곳을 중점적으로 돌아본다. 팔라완에서 허락된 2박3일을 푸에르토프린세사에 집중했다.

푸에르토프린세사는 ‘공주의 항구’라는 스페인어다. 스페인 식민 지배 당시 이사벨라 2세 여왕이 먼저 세상을 떠난 딸을 기리기 위해 붙였다는 기록이 남았다. 푸에르토프린세사에는 공항과 도심 인프라가 있어 팔라완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세계 7대 자연경관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지하강국립공원, 물에 잠긴 나무들이 만든 맹그로브숲 등이 관광 명소로 꼽힌다.

팔라완 푸에르토 프린세사 지하강국립공원. 이윤정 기자

푸에르토 프린세사에서의 첫 방문지는 지하강국립공원이었다. 가는 길은 험난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을 따라 1시간30분 이상 버스를 타야 했다. 산의 허리를 뚫어 터널을 만드는 대신 자연의 곡선을 따르려는 선택이었다. 멀미를 달래주려는 듯 창밖으로 웅장한 삼림과 조각 같은 절벽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방카. 이윤정 기자

사방비치 선착장에 도착한 뒤 다시 재래식 보트인 ‘방카’에 올라탔다. 방카는 지역 주민만 운영할 수 있다고 했다. 관광산업이 팔라완의 자연과 지역경제를 망치지 않도록 마련한 정부 정책 중 하나였다. 방카를 타고 20여 분 바닷길을 더 달려야 지하강을 만날 수 있다. 지하강 전체 길이 8.2㎞ 중 1.5㎞ 구간이 일반인에게 개방됐다. 보트를 타고 지하강을 왕복하는 데 40여 분이 소요된다. 생태환경 보호를 위해 하루 입장객은 1000명 정도로 제한한다.

팔라완 푸에르토 프린세사 지하강국립공원. 이윤정 기자

지하강국립공원에 다다르자 비현실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투명한 에메랄드빛 물길이 시커먼 동굴 안으로 이어졌다. 미지의 세계로 들어서듯 작은 보트에 몸을 맡겼다. 동굴 안에선 노를 젓는 사공의 랜턴 하나에 의지해야 했다. 지하강 생태계를 교란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세계 여러 나라 언어로 오디오 가이드가 제공됐다. 한국어로 제작된 가이드 이어폰을 귀에 꽂자 어둠 속에서 지하강에 대한 설명이 흘러나왔다. 사공은 노를 저으며 설명에 맞춰 랜턴으로 동굴 안을 비췄다. 대성당, 성모마리아, 샤론 스톤, 공룡, 땅콩 등을 닮은 다양한 형태의 석순과 종유석들이 방문객을 맞이했다.

팔라완 푸에르토 프린세사 지하강국립공원. 이윤정 기자

동굴 속에선 원시의 공포와 자연의 경이로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박쥐 수천 마리를 비롯해 동굴뱀 등 파충류, 각종 어류가 지하강에 서식했다. 박쥐들은 쉴 새 없이 머리 위로 날아다녔다. 방문객은 모두 헬멧을 쓰고 어둠을 존중해야 한다. 머리 위로 박쥐의 배설물이 떨어질 수 있으니 말을 하거나 입을 벌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팔라완 푸에르토 프린세사 지하강국립공원. 이윤정 기자

동굴을 나서자 원숭이들이 관광객 주변을 에워쌌다. 투어가이드인 딘 산루이스는 “원숭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안된다”면서 보호구역 내에서 어떤 동물도 접촉해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이곳에선 자연이 주인이고, 인간은 이들을 존중해야 하는 손님이었다.

팔라완의 원숭이. 이윤정 기자
맹그로브숲 보트 투어···여행자가 심는 나무 한 그루
맹그로브숲 보트 투어. 이윤정 기자

다시 배를 타고 인근 맹그로브숲으로 향했다.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고 숲을 이룬 곳이다. 물길을 따라 보트를 타니 마치 물속에서 나무들이 솟아난 듯 기이한 풍광을 자아냈다. 숲은 다양한 어류와 갑각류의 서식지일 뿐 아니라 해안 토지를 보호하고 침식을 방지하는 역할도 했다. 동물과 주민 모두에게 맹그로브숲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 존재였다.

보트를 운영하고 관광객을 맞는 이들 또한 모두 마을 주민이었다. 노를 젓던 한 주민은 “안녕하세요. 한국말 이제 따 까먹었어요”라며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뽐냈다. 팬데믹 이전까지 한국인은 팔라완에서 외국인 방문객 수로 1위였다고 한다. 인천-팔라완 직항 노선이 사라진 뒤 한국인 단체관광객도 자취를 감췄다. 관광 수입에 의존하던 주민들의 경제 사정도 어려워졌다.

맹그로브 묘목. 이윤정 기자

게다가 2021년 태풍으로 수천 그루의 맹그로브 나무가 쓰러졌다. 기후위기는 태평양의 낙원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2002년부터 2020년까지 잦은 태풍으로 팔라완에서만 16만3000㏊의 숲이 훼손됐는데, 이는 지하강국립공원 전체 면적의 7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숲을 보호하기 위해 벌채를 금지하고, 숲속에서 서식하는 생물을 잡지 않는다고 했다. 더 나아가 관광객에게 맹그로브 묘목을 심는 활동을 권장하고 있었다. 지역주민이자 플랜트 전문가로 활동하는 실리스티노 산탄데스는 방문객에게 10~20㎝ 길이의 맹그로브 묘목을 심는 법을 알려주면서 “이렇게 심은 나무는 첫해 1m 정도까지 자라난다”고 설명했다.

카마얀. 이윤정 기자

지역 농부들도 팔라완의 생태를 지키기 위해 농약을 사용하는 대신 유기농법을 도입했다. 지역민이 운영하는 농장에 가자 유기농으로 재배한 재료로 전통 잔치음식 상차림이 나왔다. 손(Kamay)으로 먹는다는 뜻의 ‘카마얀(kamayan)’이다. 긴 테이블 위에 밥, 생선, 고기, 나물, 파파야, 파인애플 등이 거하게 차려진다. 손을 깨끗이 닦은 뒤 긴 테이블에 둘러서서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 필리핀 군인들이 음식을 한데 모아놓고 계급에 상관없이 함께 먹으며 전우애를 다지던 것에서 유래했단다.

해가 질 무렵 사방비치로 돌아왔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사라지자 해변의 리조트들도 조명을 낮추기 시작했다. 팔라완의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한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팔라완에서 별빛은 더 빛났고, 파도 소리는 더 깊어졌다. 지상낙원은 문명이 숨소리를 죽일 때 더 찬란하게 펼쳐졌다.

사방비치. 이윤정 기자
☞알고 가세요
현재 한국에서 팔라완까지 직항 항공편이 없다. 필리핀 마닐라나 세부를 경유해 푸에르토프린세사 공항으로 가야 한다. 보통 12월부터 5월까지인 건기에 좀 더 쾌적하게 여행할 수 있다. 6월 말부터 8월까지는 비가 자주 내린다. 필리핀이 한국보다 1시간 느리다. 화폐단위는 페소(PHP)로, 100페소는 2370원(5월 기준)이다.
사방비치. 이윤정 기자

팔라완|글·사진 | 이윤정 기자 y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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