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정원의 100년 후 미래를 그리다 [장인서의 컬처줌人]

장인서 2024. 5. 18.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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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에는 사람과 사회, 국가를 성장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한국 문화콘텐츠산업을 이끌어가는 인물들을 소개합니다."
ⓛ이준규편- 에버랜드 식물콘텐츠그룹장, 조경학 박사
이준규 식물콘텐츠그룹장. 에버랜드 제공

올해도 어느덧 5월 중순을 넘어섰다. 전국 곳곳 봄꽃들이 물러나는 자리마다 장미꽃 봉오리가 활짝 피어나면서 나라 전체가 장미 정원으로 변신한듯하다. 에버랜드의 대표 시그니처 행사인 ‘장미축제'도 17일 개막했다. 720개 품종 300만 송이 장미가 함께하는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화려하고 매혹적인 풍경을 펼쳐놨다. 이렇듯 탐스러운 꽃을 피워 세상에 보여주기까지 매일같이 정원을 드나드는 이들이 있다. 에버랜드 식물콘텐츠그룹을 이끌어가는 이준규 그룹장(49·사진)과 더불어 ‘꽃벤처스’라 불리는 직원들이다. 꽃 관련 페스티벌이 흔해진 요즘 1985년 국내 최초의 꽃축제로 명성을 쌓았던 에버랜드 정원의 이정표는 현재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다음은 이준규 그룹장과의 일문일답이다.

Q. ‘최초’ 타이틀을 가졌던 만큼 에버랜드 정원의 헤리티지를 유지, 발전시키는 부분에 고민이 많을 것 같다.

- 에버랜드는 용인자연농원으로 개장한 1976년부터 단순히 꽃을 심고 나무를 심고 앉아서 쉬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식물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문화를 담는 공간으로서 정원을 만들어왔다. 그리고 이 사실이 에버랜드 정원만이 가진 헤리티지와 정체성이라 생각한다. 에버랜드가 앞으로 가져가야 할 핵심 가치 역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 아닌 세계에서 가장 즐겁고 다양한 이야기, 즉 '문화를 담고 있는 정원'을 만드는 것이다.

- 정원 문화가 우리에게는 아직 생소하지만 유럽의 사례만 보더라도 정원을 중심으로 예술과 문학, 과학과 사회학이 발전했다. 또한 정원이 중심이 된, 숲이 중심이 된 교육도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요즘에는 상처를 치유받는 공간, 사람들끼리 소통하는 공간으로서의 정원도 만들어지고 있다. 새로 생긴 민간 정원들과 규모 있게 조성된 지자체 정원들과의 차별점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일회성으로 끝나거나 그 본연의 가치를 알기 어려운 공간들과는 차별화된 문화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100년 후에도 계속 성장하는 정원을 만들어가고 싶다.

로즈기프트 상품점 거리에서 내려다본 장미원. 에버랜드 제공

Q: 포시즌스가든과 장미원 등 5개 정원의 테마기획과 설계·운영에서 중요한 기준점은.

- 기획 단계에서는 ‘예쁜 정원이 아닌 즐거운 정원’을 가장 큰 기준으로 삼는다. 정원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은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즐거움에 초점을 맞출지에 대해 먼저 결정한다. 즐거운 정원이라고 하는 개념이 다소 피상적이고 쉽게 와 닿지 않을 수 있지만 어느 해는 시각적인 즐거움, 또 어느 해는 후각적, 촉각적, 또는 활동적 즐거움 등 다양하게 만들려고 한다. 부서원들에게는 '유명한 정원의 스타일을 복제하지 말고 본질을 복제하라'고 당부한다. 트렌드라는 것이 빠르게 바뀌는 이 시대에 호흡이 긴 정원이 유명한 스타일을 따라간다면 정원의 본질도, 정원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 설계 단계에서는 기획 콘셉트에 맞게 스태프 각자의 개성을 입혀 설계하도록 주문한다. 구체적으로 지시하기보다는 그들의 설계가 기획의도에 부합하는지만 검토해주는 것이다. 같은 기획의도를 가지고도 다양한 설계가 나올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운영 기준도 비슷한 맥락인데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이 현장에서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정원을 만드는 우리가 즐겁게 임하고 있지 않다면 아무리 예뻐 보이는 정원을 만들더라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이준규 식물콘텐츠그룹장(왼쪽 일곱번째)이 부서원들과 함께 실시한 현장 점검에서 기념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에버랜드 식물콘텐츠그룹은 원예, 조경, 산림 등 국내 최고 식물 전문가들로 구성된 정원계의 어벤저스, 일명 '꽃벤저스'로 불린다. 에버랜드 제공

Q: 에버랜드 정원들의 각 콘셉트는 어떤 과정을 거쳐 정하는지.

- 매년 한 가지 콘셉트를 정해 한 해 동안 정원을 만들어나간다. 연도별 콘셉트는 스스로 공부하면서 궁극적으로 만들고 싶었던 정원 만들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수립해나간다. 에버랜드가 정원을 오랜 시간에 걸쳐 가꿔나가는 목적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정원이라고 하는 공간은 유일하게 사람과 식물 그리고 공간이 함께 성장하는 장소다. 정원이 성장을 멈춘다면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과 고객들 역시 성장할 수 없게 된다.

- 2017년에는 '꽃도 사람이 있어야 꽃이다'라는 김용택 시인의 글귀를 모티브 삼아 '성장하는 정원'으로 가는 본격적인 여정에 들어섰다. 당시 가장 먼저 한 일이 에버랜드 포시즌스가든의 화단 펜스를 제거한 것이다. 꽃과 사람이 단절되어서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성장할 수 없고 정원은 그저 큰 액자에 들어있는 그림과 다를 바 없는 죽은 공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 사람들이 꽃과 가까운 곳에서 소통하기 시작하면서 큰 변화들이 나타났다. 가장 먼저, 화단을 발로 밟아 상하게 하는 고객들이 눈에 띄게 적어졌다. 동시에 정원을 가꾸는 직원들도 성장했고, 에버랜드 정원 역시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올해의 정원 콘셉트는 '더 클래식 이즈 모어(The Classic is more)'다. 현대적인 디자인이 난무하는 정원계에서 보다 고전적인 패턴과 식재 방법을 통해 지나온 성장 과정을 짚어보려고 한다.

720개 품종 300만 송이 장미가 펼쳐진 장미원. 에버랜드 제공

Q: 지난 어린이날에 비가 세차게 내렸다. 어린이와 에버랜드 모두 실망이 컸을 것 같다. 날씨 변수에 따른 운영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정원은 더 그렇지 않나.

- 에버랜드 정원은 가장 자극적인 즐거움을 제공하는 테마파크라는 공간에서 가장 자극적이지 않은 즐거움을 만들어내야 하는 어려움을 갖고 있다. 마치 남들은 뛰어가고 있을 때 홀로 멈춰서 "날 좀 봐줘. 정말 예쁘지? 뛰지 말고 나랑 놀자"라고 말을 건네는 상황에 빗대어 볼 수 있다. 특히 날씨가 궂으면 나와 직원들은 해야 할 일이 이것저것 더 많아진다. 비 예보가 있으면 큰 나무들의 죽은 가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미리 정리해줘야 하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전에 시약 작업도 해야 하고, 비료도 줘야 한다.

- 그럼에도 여러 난관을 풀어나가는 실마리 역시 정원에서 찾을 수 있다. 정원은 똑같은 공간, 위치라도 아침과 점심, 저녁에, 또 맑을 때와 흐릴 때, 비가 올 때 신기하게도 모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시시각각 달라지는 정원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거나 장화를 신고 천천히 정원을 거니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낭만적이다. 이런 과정이 있기에 모든 날, 모든 순간에 아름다운 정원이 탄생하는 게 아닐까.

Q: 정원에 대한 에버랜드의 비전과 목표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 업무적 비전 역시 '성장하는 정원'이라는 개인적 목표와 결이 같다. 다시 말해, 정원과 식물만으로도 충분히 즐길거리가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정원을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정원을 잠깐의 휴식 공간이나 주변을 장식하는 배경으로만 여긴다. 구체적으로는 정원 자체를 즐기러 에버랜드를 찾는 이들이 많아질 수 있도록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지난 3월 하늘정원길 단독상품 출시가 대표적인 예다. 장미축제 기간에는 장미원 이용에 특화된 '가든 패스'를 새롭게 선보일 예정이다.
유튜브 콘텐츠 '꽃바람 이박사' 시즌1 촬영 현장. 에버랜드 제공

Q: 에버랜드 유뷰트 채널에 ‘꽃바람 이박사’ 카테고리가 있다. 히스토리와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 식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질 무렵 영상 콘텐츠를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내부 의견이 있어 '꽃바람 이박사' 콘텐츠를 시작했다. 여러 차례 그룹 회의를 하다가 한 후배가 농담으로 "타이틀이 꽃바람 이박사 정도는 돼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라고 말했고, 다들 호응이 좋아 얼떨결에 크리에이터가 됐다. 부담감이 없진 않았지만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잘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열심히 제작했고 마니아층의 호평도 받았다. 각 영상의 주제는 에버랜드 정원의 규모와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것이 아닌 정원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이런 요소가 에버랜드 정원에 적용된 과정을 공유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 오는 6월부터 '꽃바람 이박사' 시즌2를 새롭게 시작할 예정이다. 시즌1이 개인적인 철학 중심으로 좀 진지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면, 시즌2는 한결 젊게,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정원 이야기를 많이 들려드리려고 하니 많이 봐주시면 좋겠다.

이준규 식물콘텐츠그룹장이 영상을 통해 공개한 탄생화 드로잉. 사진 출처=인스타그램(@dr.floralee)

Q: 탄생화 컬러링 영상을 SNS에 소개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 어느 날 문득 사람이 태어난 날에 식물들이 축하 메시지를 건네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우리나라에서 이용되는 탄생화를 매일매일 태어나는 아기들에게 선물한다는 마음으로 그려 개인 계정에 올리게 됐다. 그중 5월23일의 탄생화인 '풀의 싹'에 애착이 좀 더 간다. 대부분의 탄생화가 아름다운 꽃이 있는 식물들이지만 이날의 탄생화는 풀(잡초)의 싹이다. 사실 잡초는 우리에게 가치가 알려지지 않은 식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풀의 어린 싹을 보면 보이지 않는 힘이 느껴진다. 마치 "너도 네가 태어난 가치를 스스로 발견하면서 살 수 있을 거야'라고 속삭이면서 축복해주는 느낌이다. 벌써 눈치챈 지인들도 있을 텐데 내가 태어난 날이기도 하다.(웃음)

■정원계 ‘꽃벤저스’, 에버랜드 식물콘텐츠그룹

에버랜드 식물콘텐츠그룹은 원예, 조경, 산림 등 국내 최고 식물전문가들로 구성돼 정원계의 어벤저스, 일명 '꽃벤저스'로 불린다. 식물과 정원에 관해서는 국내에서 가장 훌륭한 지식과 경험,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있는 최고의 '그린썸'(Green Thumb, 원예에 재주가 있는, 식물을 잘 기르는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꽃벤저스를 이끄는 이준규 그룹장은 성균관대에서 조경학 학·석사 과정을 마치고 2002년 삼성물산 리조트부문에 입사해 조경 디자이너로 근무했다. 그러다가 2011년 영국 유학을 결심, 에식스대에서 정원디자인 석사, 조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6년 에버랜드에 복귀해 꽃축제와 식물 교육, 수목 관리, 장미 육종 등 식물 관련 모든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en1302@fnnews.com 장인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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