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에 스러진 형·동생 못 잊어"… 눈물 흘리는 5·18 유족 (종합)

최성국 기자 박지현 기자 2024. 5. 18. 13:52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어머니는 큰아들을 잃은 슬픔에 5·18 민주묘지에 오지 못하십니다."

18일 '오월, 희망을 꽃피다'를 주제로 열린 제44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소개된 고(故) 류동운 열사(사망 당시 19세) 유족들은 44년이 지난 지금도 가족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은 씨는 "1980년 5월 20일 (형과) 전남도청에 같이 나가 계엄군에 의한 참상을 목격했다"며 "형은 26일에 집에 들어왔지만, 아버지가 (다시 나가는) 형을 붙잡지 못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5·18 기념식'서 소개된 故 류동운 열사 동생 "지금도 보고 싶어"
24세 시민군 故 안병섭씨 누나 "동생 보내고 한동안 멍하게 지내"
고 안병섭 씨의 동생 안복희 씨가 18일 기념식이 끝난 뒤 동생의 묘지를 지키고 있다. 2024.5.18/뉴스1 ⓒ News1 박지현 기자

(광주=뉴스1) 최성국 박지현 기자 = "어머니는 큰아들을 잃은 슬픔에 5·18 민주묘지에 오지 못하십니다."

18일 '오월, 희망을 꽃피다'를 주제로 열린 제44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소개된 고(故) 류동운 열사(사망 당시 19세) 유족들은 44년이 지난 지금도 가족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류 열사 동생 동은 씨(61)는 이날 기념식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형의 묘비로 향했다.

류 열사는 1980년 당시 한국신학대 2학년생으로서 학교가 휴교하자 고향 광주를 찾았다. 이후 그는 전남도청에서 행방불명자 접수와 사망자 신원 확인 등 자원봉사활동에 참여했다.

류 열사는 목사인 아버지의 만류에도 끝까지 도청에 남아 희생자 수습을 도왔고, 결국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도청 진압 작전 과정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동은 씨는 "1980년 5월 20일 (형과) 전남도청에 같이 나가 계엄군에 의한 참상을 목격했다"며 "형은 26일에 집에 들어왔지만, 아버지가 (다시 나가는) 형을 붙잡지 못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당시만 하더라도 '형이 살아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차라리 (군·경 등) 어디에 잡혀 있기라도 해'란 마음이었다"며 "하지만 (5월) 30일에 형이 죽었다는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44주기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조명된 고 류동운 씨의 동생 동은 씨가 18일 기념식이 끝난 뒤 형의 묘지를 지키고 있다. 2024.5.18/박지현 기자

동은 씨는 "구 묘역에 가니 형이 입관한 상태로 있었다. 당시 날이 덥고 시신이 부패해 흉터와 치아 모양 등으로 형임을 알아차렸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류 열사 죽음 이후 그 가족들의 하루하루는 형언할 수 없었다고 한다.

동은 씨는 "어머니는 마음이 아파 이곳(5·18 묘지)을 찾지 못한다"고도 말했다.

동은 씨는 "올해 정부 주관 기념식에서 형이 조명돼 기뻤다"며 "내겐 무척 좋은 형이었다. 지금도 계속 보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5·18 정신은 헌법 전문에 진작 수록됐어야 한다"며 "지금이라도 헌법 전문에 수록돼 우리 형의 희생이 헛되지 않고 민주주의를 이끌어 가는 데 큰 도움이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다른 '오월 유족' 안복희 씨(70·여)도 이날 기념식이 끝난 후 동생 병섭 씨의 묘를 찾았다. 그의 손엔 술병과 과자 등 조촐한 술상을 차리기 위한 짐이 들려 있었다.

병섭 씨는 1980년 5월 23일 문화동 광주교도소 인근에서 총상을 입고 전남대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숨졌다. 당시 나이 24세였다.

44주기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집중 조명된 고 안병섭 씨의 동생 안복희 씨가 18일 기념식이 끝난 뒤 동생의 묘지를 지키고 있다. 2024.5.18/뉴스1 ⓒ News1 박지현 기자

운전원으로 일하던 병섭 씨는 또래 친구들이 계엄군의 군홧발에 짓밟히는 모습을 보고 시위에 나섰다고 한다.

안 씨 어머니는 그 당시 자식이 걱정돼 항상 집의 문을 잠그고 외출했지만, 그날은 뒷문 잠그는 것을 잊었다. 잠기지 않은 뒷문으로 나가 시위하던 병섭 씨는 그렇게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복희 씨는 "동생의 비보를 듣고 상무관에 달려갔는데 눈물조차 제대로 못 흘렸다"고 말했다.

그가 본 동생의 마지막 모습은 처참 그 자체였다. 총상으로 인해 피가 굳어 청바지가 벗겨지지 않자, 어머니와 삼촌이 면도칼을 사와 찢었다고 한다.

동생 다리의 커다란 총상을 본 이후 5월이 다가오면 복희 씨 꿈속에선 그 장면이 반복 재생된다.

복희 씨 가족은 1980년 5월 이후로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허무하게 먼저 보낸 아들을 생각하며 항상 활짝 웃고 지내지 못했다"며 "우리 가족 모두 동생을 보내고 한동안 멍하게 지냈다"고 말했다.

복희 씨는 갖고 싶은 물건이 있어도 형제자매를 생각해 부모에게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착한 동생을 생각하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그는 동생의 묘소에 술 한 잔 올리며 "꽃다운 나이에 하늘나라로 가버린 내 동생아, 사랑한다"고 닿지 못할 말을 전했다.

stare@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