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식 육아'에 반기…모유 수유 전도사 이근 명예교수 별세

이충원 2024. 5. 18.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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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 교수를 추억하는 사이트' 캡처]

(서울=연합뉴스) 이충원 기자 = "생애 첫 1년 동안 주양육자와 기본 신뢰를 바르게 형성해야 아이가 훗날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 독립심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너무 일찍부터 아이가 원하는 것을 제대로 해결해주지 않으면 아이는 무의식중에 불신을 품는다."

독립심 강한 아이로 키우길 원한 나머지 미국식 육아법을 선호하는 한국 엄마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모유 수유'의 중요성을 알린 이근(李根)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14일 오전 1시55분께(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18일 전했다. 향년 만 81세.

1942년 10월 서울생인 고인은 1967년 이화여대 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떠나 1972년 미국 소아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1974∼1975년 미국 사가모어아동병원 담당 의사를 비롯해 약 10년간 미국 소아과와 소아정신과 의사로 일했다. 1976년부터 이화여대 의대에서 강의하는 한편, 이화여대 동대문부속병원 소아과에서 진료했다. 1976∼1981년 소아과 과장을 맡았다.

고인의 한국형 DDST 발표에 관한 1986년 11월7일자 동아일보 기사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고인의 전공은 '소아발달-심리적 문제'였다. 1985년 7월∼1986년 10월초 이대부속병원 등 서울 시내 7개 병원 소아과에 온 생후 2주∼6년4개월의 아동 2천144명을 대상으로 선별발육검사(DDST)를 한 결과 한국 아동이 미국이나 일본 아동보다 발육이 앞선다는 것을 발견하고 한국판 DDST를 발표했다. 이는 국내 소아 발달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2000년 서울 영유아 발달 선별검사 결과를 발표했다. 1992∼2006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아기에게 친근한 병원 만들기 위원회 위원, 2005∼2006년 대한소아과학회장을 역임했다.

미국 의사 생활과 본인 스스로 세 아들을 키운 경험을 바탕으로 독립심이 강한 아기로 키운다며 울어도 모른 체 하는 '미국식 육아'에 의문을 제기했다. '맘&앙팡' 2011년 2월호에선 "생후 8개월이면 밤중 수유를 끓고, 배변훈련은 생후 18개월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등의 육아 공식은 잊으세요. 아이가 원할 때까지 밤중 수유를 하고 배변훈련도 아이가 스트레스를 가장 적게 받을 수 있게끔 배려해야 합니다. 다른 아이보다 몇 개월 더 기저귀를 차고 있는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잖아요. 약간 늦어지는 것일 뿐 아예 못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이든 아이를 믿고 점진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고 주장했다.

같은 기사에서 '생후 58일 된 아이 엄마입니다. 어른들은 아이가 울어야 목소리도 트이고 폐활량도 커진다고 아이가 울면 그냥 놔두라고 하시는데 어떤 때는 10분 넘게 울기도 합니다. 그래도 그냥 둬야 하는 건가요?'라는 질문에 "아이가 우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서 달래줘야 해요. 배고프다고, 안아달라고, 엄마 손이 그리워서, 기저귀가 젖어서, 옷 입은 게 불편해서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요. 이유를 잘 모르겠더라도 일단 안아서 얼러주거나 수유해도 좋습니다. 잠투정하면 달래서 재우고요."라고 답변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모유 수유 전도사'로 나섰다. 2003년에 낸 책 '똑똑한 엄마는 모유로 키운다' 서문에 "분유는 송아지 새끼를 위해 엄마 젖소가 만들어 내는 소젖이고 사람에게는 이물질일 뿐"이라고 적었다. 2004년 서울신문 인터뷰에선 "병을 달고 사는 애들이 모두 분유 먹고 자란 애들입니다. 감기, 아토피피부염, 정서장애 등등 셀 수도 없어요. 국민건강도 문제지만 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은 계산도 안 되지요. 또 소젖 먹고 자란 애들, 엄마젖 먹인 애들보다 IQ가 10쯤 낮아요.우리나라,소젖 먹인지 40년 만에 국민지능 많이 낮아졌어요. 애들 안경 쓰는 것,왕따 현상도 따지고 보면 분유 먹고 자란 세대의 특성이 나타난 겁니다."라고 주장했다. 분유 TV 광고를 금지해야 한다고도 역설했다. TV를 보다가 한 방송인이 처음엔 모유를 먹이다 시어머니의 강권으로 둘째 애에게 분유를 먹인다고 하는 걸 보고 방송국에 전화해서 따질 정도였다. 2006년 한국모유수유의학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런 자신도 사회 활동하면서 아들 셋을 키우느라 장남과 차남에겐 분유를 먹였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30대부터 하얘진 앞머리와 큰 귀고리에 부츠를 신고 강의하는 걸로 눈길을 끌었다. 원칙을 중시하고 쉽게 타협하지 않는 고집이 있었다. 아들들은 추모 페이지에 "자식들을 데리고 보육원에 가서 기부하는 걸 보이기도 했다"며 "매사에 빈틈이 없었지만 노래는 잘 못했다"고 적었다. 김모씨는 이 페이지에 "70년대 후반 아니면 80년대 초반에 엄마가 가벼운 감기로 아픈 저를 안고 이대 동대문병원 소아과에 갔을 때 '여기, 병원에 균이 얼마나 많은데 아이를 데리고 오셨어요? 얼른 집으로 데리고 가서 엄마가 간호해 주면 금방 나을거예요.'라며 약도 챙겨주셨다. 나중에 저도 아기를 키울 때 고인의 모유 수유 강의를 듣고 모유로만 두 아이를 키웠다."고 추모했다.

고인이 의학교육학회장으로 있을 때 총무이사를 맡았던 이윤성 서울의대 명예교수는 "선생님께 '옳지 않은 건 옳지 않다. 그래도 용서하지 못할 일은 없다'는 걸 배웠다."고 회상했다. '쩔쩔매는 엄마에게'(1989), '똑똑한 엄마는 모유로 키운다'(2003), '내아이, 캥거루처럼 키워라'(2010) 등 저서와 역서를 남겼고, 인당의학교육학술상(2002), 근정포장(2008)을 받았다.

유족은 아들 박상훈(내과 전문의)·박상엽(사업)·박상희(충북대 심리학과 교수)씨와 며느리 이은주(고려대 의대 교수)·윤혜원·심민선(인하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씨 등이 있다. 빈소는 이대서울병원 장례식장 특실6호실, 발인 19일 오전 7시. ☎ 02-6986-4456

['이근 교수를 추억하는 사이트' 캡처]

chungw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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