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내의 문화전쟁’ 미국에 두고 가져오지 말라”

이유진 기자 2024. 5. 18.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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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학회·숙명여대 인문학연구소 주최 해외석학 포럼 로지 브라이도티 강연
로지 브라이도티 교수.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 기사는 “일론 머스크는 화성으로…지구를 돌보는 것은 우리 의무”(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517.html)에서 이어집니다.

2024년 5월3일 한국여성학회(회장 이현재)와 숙명여자대학교 인문학연구소(소장 박인찬)가 주최하고 한국연구재단·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아카넷이 후원한 국외 석학 초청 화상 포럼에서 로지 브라이도티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 교수의 강연이 열렸다. 브라이도티 교수는 <유목적 주체> <포스트휴먼 페미니즘>의 저자이며 ‘포스트휴먼’ 논의에서 가장 권위있는 이론가다. 이날 강연 이후 토론을 한국여성학회의 도움을 얻어 싣는다.

여성·LGBT·장애인 친화적인 기술

육성희 숙명여대 교수(이하 육):포스트휴먼 시대에서 페미니즘의 사고와 실천의 개입만으로 모두가 평등한 새로운 가치와 질서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이 질문은 현대 사회에서 기술을 개발하고 사용하고 활용하고 접근하고 통제하는 일련의 모든 상황들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제논리와 동떨어져 있지 않아 보인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간’이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용어가 아니었던 것과 같이, ‘기술’도 투명하거나 중립적이기보다는 편향되어 있을 수 있으며, 그래서 기존의 불평등을 강화할 수 있지 않을까? 포스트휴먼 시대에 ‘인간’에 대한 재정의를 시도하는 만큼 ‘기술’에 대한 비판적 사고도 동시에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로지 브라이도티(이하 브라이도티):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테크놀로지를 싫어하지 않지만 테크놀로지에 비판적이다. 유럽의 포스트휴먼 페미니즘은 기술을 규제하려는 유럽인들의 노력에 상당히 영향을 받았다. 정치나 경제 집단은 실제로 기술과 항상 함께 움직인다. 우리는 돈, 자본, 비용과 같은 문제를 보지 않고 기술에 대한 접근의 민주화를 말할 수 없다. 거대 제약회사나 농장들의 초과 이윤을 비판해야 한다. 유럽 의회는 두 가지 조처를 취했는데, 하나는 2018년에 페이스북이나 다른 해적 기업이 이용자의 정보를 훔치는 것으로부터 개인정보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첫 번째의 신중한 규제였다. 미국은 모순적이게도, 굉장히 개인주의적이지만 개인정보 보호를 거의 하지 않는다. 2022년에는 두 번째 기술 규제인 디지털 권리와 원칙 선언이 있었다. 이는 기술 접근, 비용, 세금, 거짓 뉴스나 프로파간다 그리고 포르노그래피의 규제와 관련된 것을 다루고 있다. 특히 프로파간다와 포르노그래피가 중점적으로 논의되었다. 규제하고 민주화하고 가격을 낮추며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 핵심이다.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성소수자와 장애인의 목소리 그리고 배제된 자들의 목소리를 여기에 가져올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온라인에서의 포르노그래피에 대해 쿨한 척 하는 것을 이제 그만해야 한다. 수백만의 이윤이 플랫폼에서 나오고 있다. 왜 우리는 기술이 이윤을 위해서 우리의 몸과 성을 약탈해 가도록 놔두는가, 우리는 우리가 거의 통제할 수 없는 지구적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여성 친화적, LGBT친화적, 장애인 친화적인 기술이 필요하다. 우리는 다른 알고리즘이 필요하다. 독일에서는 다른 알고리즘 문화를 위한 논쟁이 진행되어왔다.

한국여성학회 창립 40년을 기념해 한국여성학회(회장 이현재)와 숙명여자대학교 인문학연구소(소장 박인찬)가 주최한 국외 석학 초청 화상 포럼에서 로지 브라이도티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화면 갈무리

육: 지금 현재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그것의 파괴력을 생각하면 이러한 담론을 통한 사유와 실천의 영향력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긍정의 윤리’라는 실천을 통해서 우리 시대가 직면하고 있는 암울한 상황을 희망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달라.

브라이도티: 포스트휴먼 관점에서의 가자나 우크라이나 등 전쟁에 대한 문제이다. 나는 결코 평화를 알지 못한다. 나는 이제 68살, 베이비부머 세대로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경험했다. 어딘가에서는 항상 전쟁이 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기술전이다. 드론을 이용해 공격한다. 전쟁에서는 핵 폭탄도 사용했다. 그러나 죽는 것은 항상 인간의 몸이다. 이런 것이 바로 포스트휴먼 조건의 모순이다. 죽는 것은 인간이지만 고도의 기술에 의해 매개된 알고리즘에 의한 갈등과 혐오가 퍼져 나간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이 민주화에 반하는 것이라는 비판적 분석이 나오고 있다. 1940년 이래로 있던 새로운 경제질서와는 다른 인공지능(AI)과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의해 움직이는 새로운 국면의 포스트-글로벌리제이션의 국면이 나타나고 있다. 나는 단순히 전쟁의 종식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원한다. 문화적 평화는 전쟁의 부재 이상의 상태이다. 서로 존중하고 함께 살기 위한 하모니이다. 나는 소수자들이 혐오받고 차별받거나 주변화되지 않기를 바란다. ‘포스트 아메리칸’ 국면에서 한국과 같은 나라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 바란다.

최근 페미니즘 백래시의 요인들

이현재 서울시립대 교수(이하 이):백래시에 관한 질문이다. ‘여성가족부 폐지’ 등 정치권만의 일이 아니다. 더 이상 페미니즘은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대학의 학자들, 그것도 인문학자들의 입을 통해 듣고 있다. ‘페미니즘’은 이기주의와 비슷한 용어로 이해되고 있으며 비합리적인 포퓰리즘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인문학의 위기로 인해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는 학자들은 소수자 학문을 배려할 여유가 없다. 인문사회학이 대폭 감소되는 가운데 대학 내에서 여성학은 그 어느 때보다 설 곳을 잃고 있다. 또한 래디컬페미니즘의 일부는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토대로 성폭력에 반대하고 남성과 그동안 빼앗겼던 여성의 파이를 되찾으려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들이 평등권을 주장하는 것은 동의하지만 문제는 정체성 정치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으로 시급한 다른 사안들이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는 당신의 말은 어떤 상황을 의미하는가? 좀 더 설명해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당신은 최근 유럽의 디지털 페미니즘 등이 과거의 이슈를 소환하고 있으나 정작 시급한 다른 사안은 논의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에 대해 좀 더 설명해 달라.

브라이도티:백래시는 항상 있었다. 재생산권, 기본정보권, 항상 이런 주장이 주장될 때 백래시는 있었다. 페미니즘은 항상 이 흐름을 역행해서 나아갔다. 1980년대에 재생산권 투쟁, 이혼법 등도 이러한 백래시를 어렵게 헤치고 나아가 얻은 성과들이다. 페미니즘에는 래디컬 페미니즘, 엘지비티 권리 투쟁 등이 있지만 유럽 중앙은행의 크리스틴 라가르드와 같은 신자유주의 페미니스트도 있다. 최근 유럽의 백래시는 두 가지 요인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

첫째, 내가 포스트휴먼 합류라고 부르는 것의 공포에 의해 촉발된 포퓰리즘적 흐름이 있다. 포퓰리즘은 기술발전에 따른 기후위기와 같은 것을 과장한다. 그러면서 과거로 돌아가자고 한다. 이탈리아 조르자 멜로니 정부는 과거 1930년대의 ‘아버지 나라’, ‘가족’, ‘신’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이 정부는 평등부를 없앴다.

두 번째 백래시는 프로라이프 운동이다. 미국은 낙태법을 없애고 있다. 도널드 트럼트의 지원 하에 기독교인들의 반 낙태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배제도 진행된다. 페미니즘에 반기를 들고 있다. 나는 몸이 기술을 통해 변화하고 다양화될 수 있다는 운동을 강력히 지지한다. 그러나 많은 돈이 이성애적 몸을 유지하기 위한 기술에 투자되고 전형화된 몸이 강제된다. 나는 ‘페미니즘 내의 문화전쟁’과 같은 것은 그냥 미국에 두고 가져오지 않기 바란다. 트랜스젠더 적대 등 어디에나 적을 만드는 정체성을 둘러싼 전쟁은 원치 않는다. 우리는 내부가 아니라 외부의 적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인터넷 상의 혐오나 봇에 의한 프로파간다를 어떻게 할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우리를 관통하는 하나의 운동이 있는 것이 아니다. 릴렉스하고 다양성을 존중하기 바란다. 정체성 정치의 거짓에 속지 말라. 문화 전쟁은 우리의 길을 잃게 한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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