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1호 학생인권조례의 운명은?…정치 지형에 휘둘리는 ‘교육’ [오상도의 경기유랑]

오상도 2024. 5. 18.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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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인권+교권 조례’ 놓고 경기 교육계 갑론을박
“교육공동체 통합 긍정적” vs “폐지가 능사 아냐”
일선 교사들, 통합 내세운 사실상 폐지 움직임 이해
일부 교사 반대 여론에 경기교육청 “축소·훼손 아냐”
임태희 교육감 “학생인권·교권 후퇴 아냐”…통합 의지
서이초 사건 계기로 학생인권조례 폐지 움직임 가속
조례 폐지가 답?…“실질적 증거 없어” 반대 여론도
#1.1980∼1990년대 중·고등학교를 다닌 이른바 ‘라떼(나때)’ 세대의 가장 큰 관심사는 두발 자율화였다. 영화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는 신군부가 정권을 잡자 두발 자율화를 비롯해 통금 해제, 해외여행 자유화 등 규제 완화책이 쏟아졌다. 여론도 나쁘지 않아 교복 자율화가 테이프를 끊고 두발 자유화가 뒤를 잇자 민심(民心)을 얻는 듯 보였다. 다만, 이런 당근책에도 불구하고 ‘귀밑 3㎝’, ‘염색·파마 금지’와 같은 규제는 살아남았다.
 
MZ세대는 달랐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나 2000년대 초반 중·고교에 입학한 이들은 문턱을 아예 없앨 것을 요구했다. 당당한 권리의 선언이었다. 2000년 ‘위드’라는 단체는 ‘노컷운동’이라는 두발 규제 반대 서명운동에 나섰다. 머리 길이나 모양에 국한되지 않고 염색·파마까지 허용하라며 교육 당국을 향해 ‘전면전’을 선언했다. 같은 해 출범한 전국 단위의 교육개혁 운동연합도 “두발 규제는 학생 인권 침해”라며 철폐를 주장했다.
 
이런 움직임은 ‘학생 인권’이라는 개념을 우리 사회에 각인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는 중·고교의 관행적 두발 단속과 제한에 대해 인권 침해라는 판단을 내렸다. 학생 인권을 사회 곳곳으로 퍼뜨리는 계기가 됐다. 
 
#.2 ‘학생인권조례’가 서울이 아닌 경기도에 처음 뿌리를 내린 데는 당시 정치 지형이 큰 영향을 끼쳤다.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이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완패하며, 민주당은 경기도의회를 사실상 장악했다. 때마침 시·도교육위원회까지 폐지되며 교육 행정의 주도권이 시·도의회의 교육위원회로 넘어왔다. 
임태희 경기도교육감이 학생인권조례와 교권보호에 관한 조례를 통합하는 새 조례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경기도교육청 제공
앞서 진보진영의 김상곤 경기도교육감 후보는 2009년 교육감 선거 직전 학생인권조례를 공약으로 내놓았다. 당선 직후 학생인권조례 제정위원회가 꾸려지고, 학생참여기획단이란 조직까지 등장했다.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타이밍 덕분에 학생인권조례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2010년 9월16일 경기도의회는 전국 첫 학생인권조례를 의결했다. 이후 광주 학생인권조례(2011년), 전남 교육공동체 인권조례(2012년), 전북 학생인권조례(2013년) 등이 잇따랐다. 서울에선 2012년 곽노현 교육감 당시 조례 제정이 이뤄졌다. 곽 교육감이 선거법 위반으로 같은 해 교육감직을 상실했지만 후임 보수 교육감조차 여론을 의식해 이 조례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진보 성향 교육감들이 대거 당선된 2018년 제7회 지방선거 이후 학생인권조례 제정은 다시 봇물이 터지듯 했다. 충남(2020년)과 제주(2021년)가 대열에 합류했고 인천(2021년)에선 학교구성원 인권증진조례가 등장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오른쪽 두 번째)이 이달 16일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 앞에서 열린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폐지조례 재의 요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 라떼 세대의 추억 ‘두발 자율화’…학생인권조례로 결실

최근 학생인권조례는 곳곳에서 논란을 키우며 부침을 겪고 있다. 학생 인권의 맞은편에 교권 추락을 놓는 프레임에 사로잡혀 ‘모두 학생인권조례 탓’이라는 마녀사냥의 늪에 빠진 지 오래다.

미숙한 인격을 지닌 일부 학생의 책임 방기와 오만에 가까운 학부모의 교권 침해 사례는 사태를 악화시켰다. 학생인권조례가 이들을 옹호한다며 ‘일진보호조례’로 불리기도 한다.

지난해 7월 학부모의 악성 민원에 시달리던 교사가 숨지는 ‘서울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은 학생인권조례 폐지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이에 충남도의회와 서울시의회는 지난 4월 폐지를 의결했다.

반면 교육 현장에선 2012년 강화된 아동학대처벌법의 일부 조항이 더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폐지 여론에는 종교적 색채도 깔린 것으로 보인다. ‘차별금지법’에 기반을 둔 학생인권조례가 청소년의 성적 지향과 동성애 등에 관대하다는 이유로 공공연히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학생인권조례가 자의든 타의든 보수·진보의 정치색을 드러내는 나침반이 됐다는 사실이다. 진보 성향 교육감의 등장은 관련 조례 제정의 시도로 이어졌다. 여전히 보수정당이 다수를 차지한 지역의 지방의회에선 이런 시도가 무력화됐다.
이달 9일 경기도의회에서 열린 ‘학교구성원의 권리와 책임에 관한 조례’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보수색이 강한 대구·경북 등의 지역에서 시행 움직임이 거세게 수면 위로 고개를 들지 못한 이유다. 강원과 울산에선 사회적 합의 부족으로 무산되거나 학부모 단체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이제 여론의 관심은 전국 1호 학생인권조례를 탄생시켰던 경기도에 쏠려 있다. 경기도 역시 2022년 제8회 지방선거에서 보수 성향 교육감이 당선되며 폐지 수순을 밟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이곳에선 여전히 이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학생인권조례는 법률이 아니며 말 그대로 조례에 불과하다. 상위법과 충돌이 우려됐지만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상위법 위반이 아니라고 판단하거나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 조례가 성별·종교·나이·용모·언어·성적·징계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 덕분이다.

최근 개정을 거치기 전까지 경기도 학생인권조례는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었다. ‘학교에서 체벌은 금지된다(제6조 2항)’거나 ‘학교는 학생에게 야간자율학습, 보충수업 등을 강제해서는 아니 된다(제9조 2항)’, ‘학생은 복장, 두발 등 용모에 대해 자기의 개성을 실현할 권리를 가진다(제11조 1항)’는 내용이다. 

직접 체벌 외에 기합과 같은 간접 체벌도 금지됐고, 방학 기간 시행하는 보충수업까지 학생이 참여 결정권을 갖게 했다. 완전한 두발 자율화를 연상시키는 내용까지 담겼지만 끝내 염색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달 13일 오전 경기교사노조가 경기도교육청 앞에서 조례 폐지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경기교사노조 제공
◆ 보수·진보 격전지로 바뀐 학생인권조례 폐지 논란

이런 경기도의 전국 첫 학생인권조례는 사실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가능성이 커졌다. 이미 9부 능선을 넘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학생인권조례를 문제 삼아온 교육부는 지난해 11월 각 시·도교육청에 학교구성원조례 예시안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조례안을 참고해 기존 학생인권조례 등을 대체하라는 제안이었다.

이 과정에서 경기도를 포함한 일부 시·도에선 통합 조례 제정을 목적으로 교권보호조례까지 함께 폐지하려는 움직임이 나왔다. 경기도교육청은 이달 3일 학생인권조례와 교권보호조례 폐지 조항을 담은 ‘학교구성원의 권리와 책임에 관한 조례안’을 입법 예고했다.

이 조례안은 학생과 교사, 학부모 등 학교구성원의 권리와 책임을 규정한 것으로 권리와 책임에 관한 내용 중 학생 부분은 기존 학생인권조례에서, 교사 부분은 교권보호조례에서 큰 틀을 가져왔다고 도 교육청은 설명했다. 통합 조례 제정이 확정되면 기존 학생인권조례와 교권보호조례는 자연스럽게 폐지된다.

도 교육청 관계자는 “새 조례에 기존 교권보호조례에 있던 내용 중 빠진 부분은 이른바 교원 4법과 중복되는 것들”이라며 “새 조례가 결코 교권을 축소하거나 훼손하지 않는다. 여러 의견을 듣고 시행규칙 등을 정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부 교사들은 “교권보호조례 폐지를 막아내겠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수많은 교사의 요구로 제정되고 개정됐던 교권보호조례가 하루아침에 없어진다는 건 현장 교사들의 의견을 전혀 듣고 있지 않다는 방증”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통합 조례안 탓에 오히려 교권이 축소될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통합 조례안에는 기존 교권보호조례에 있던 교육활동 침해행위에 대한 조치와 대응지원, 학생 분리교육, 민원대응지침, 행정업무 경감 등의 내용이 빠졌다는 주장이다. 반대 여론은 학생인권조례를 옹호하는 일부 학부모들에게 확산하며 여론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이달 9일 경기도의회에선 학생 인권·교권 통합 조례안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토론회에는 도의원과 교수, 교장, 교사, 학생, 학부모 등이 패널로 참석했는데 교육공동체 통합과 인권 보장이 ‘이해할 수 없는’ 대척점에 놓였다.

토론장 안 교사와 학생은 대체로 새 통합안에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들이 다수의 입장을 대변하는지를 놓고는 이견이 분분하다. 자신을 기독교계 인사로 소개한 한 시민은 토론회에서 “학생인권조례를 반대하는 쪽과 찬성하는 쪽을 다 만족하게 하려다 이도 저도 아닌 조례가 나왔다”고 혹평했다.
서울시의회 본회의가 열린 지난달 26일 서울시의회 앞에서 학생인권조례 폐지에 대한 반대 집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 정치 지형에 휘둘리는 ‘교육’…도의회 다수당 민주당이 의결

이달 13일 경기교사노조는 도 교육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학교구성원조례안이 교사의 교육활동보호와 학생 인권을 모두 현저히 축소·후퇴시켰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통합 조례안을 교육감과 학교장의 책무를 축소하는 ‘누더기 조례안’으로 규정했다. 

교사노조는 “교사가 안전히 교육할 환경을 보장해줘야 하는 책임을 방기한 경기도교육청을 규탄하며, 교권보호조례 폐지를 강력히 반대한다”고 했다. 한 교사는 “교권보호조례가 학교 현장에서 제대로 지켜지도록 애쓰기는커녕 적극적인 홍보 한 번 없던 교육청이 이제는 이 조례안마저 폐지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교육부가 학교구성원조례 예시안을 보낸 지 6개월 만에 교권보호조례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부실한 조례안이 등장한다는 주장이다. 

아예 일부 교사들은 임태희 경기도교육감에게 공개 질의를 던졌다. “평소 교육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반교육적, 비교육적이라는 입장을 내왔던 임 교육감이 교사의 교권과 학생의 인권이 서로 상충하는 개념이 아닌데도 굳이 학생, 학부모, 교직원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세 주체를 묶어 부실한 조례안을 만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앞서 이달 9일에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경기지부가 기자회견을 열어 “학교구성원조례는 서로 존중하는 학교문화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 간의 갈등을 증폭 시킬 여지가 많다”며 반대했다.

이에 임 교육감은 “학생인권과 교권을 후퇴시킬 마음은 추호도 없다”며 단호한 입장을 드러냈다. 그는 이달 14일 ‘제43회 스승의 날 정부포상 및 표창장 전수식’에서 “자율은 책임이 따르는 자유”라며 “권리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안내하는 게 교육에 필요한 관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보는 관점의 차이에 따라 균형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얼마든지 토론해도 좋다”며 새 조례 제정에 여러 의견을 반영할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이는 임 교육감이 통합 조례안 제정에서 물러설 의지가 없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경기도교육청 수원 광교청사
◆ 정치와 교육의 분리?…현장에선 ‘따로 또 같이’

교육계에선 교권 추락이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지 학생인권조례 때문이라고 볼만한 명확한 근거가 없다는 반론도 나온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발표한 ‘학생인권조례 바로 알기 안내서’에는 조례를 시행 중인 지역의 학생 100명당 교육활동 침해 건수가 2017~2021년 평균 0.5건으로, 미시행 지역의 0.53건보다 오히려 낮았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를 토대로 인권위는 조례와 교권 침해 간에 상관관계가 없다는 분석을 내놨다.

교권보호와 학생의 책임 강조는 다시 정치지형에 영향받을 것으로 보인다. 의결의 열쇠를 쥔 경기도의회에선 지난 4·10 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3석을 추가하며 다수당이 됐다. 그동안 민주당이 학생인권조례에 보여온 태도를 고려하면 새 통합조례 의결까지는 진통이 예상된다.

대한민국 헌법 31조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한다. 교육학자들은 이를 교육의 당파성 또는 편향성 배제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 그러나 현장에선 겉으로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교육이 정치와 ‘따로 또 같이’ 간다는 현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법률이나 조례는 도구일 뿐 이를 활용하는 사람의 판단과 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는 이번에도 빛을 발하지 못할 전망이다.

한 교육계 관계자는 “교권 침해는 극소수 학생과 학부모의 행동 탓이지 조례 때문은 아니다”라며 “대안 마련이 조례 폐지로 이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제1호 학생인권조례의 운명 역시 정치적 과정과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이해시키는 토대 위에서 결정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는 교육 본연의 임무인 미래세대의 가능성을 결정할 상징적 사건이기도 하다.

수원=오상도 기자 sdo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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