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큼한 봄 ‘춘천’…필름 카메라 젊은이들 골목 누비는 그곳 [ESC]

한겨레 2024. 5. 18.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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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의 작은 마을 여행 춘천
공지천 원두커피점 그대로…1970년대 멈춘 듯 망대골목
육림고개엔 내복집·참기름집…변하지 않은 풍경 고마워
벽화로 유명한 강원 춘천 효자동 낭만골목.

강원도 춘천에 다녀왔다. 며칠 동안 이어지던 봄비가 그치고 비로소 맑은 어느 날이었다. 집에만 있기엔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들어 차를 몰았다. 목적지는 춘천. 고속도로를 나와 국도를 달릴 때는 차창을 내렸다. 상쾌한 봄바람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여름이 오면 이렇게 바스락거리는 질감의 바람을 맞기가 힘들다.

봄날 여행에 춘천만큼 어울리는 곳이 있을까. 한때 경춘가도라는, 이름만으로도 낭만을 상징하던 그 길을 따라 혹은 경춘선이라는 덜컹거리는 열차를 타고 가야 만날 수 있었던 도시. 언제였던가, 서울과 이 도시를 잇는 고속도로가 생겨났고 정체시간을 피하면 1시간 반이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도시가 됐다.

그래도 춘천은 춘천. 물리적 거리가 줄었다고 그리움의 거리가 줄어든 건 아니다. 춘천의 좌표는 그리움과 추억과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 춘천은 서울에서 동쪽으로 100㎞ 떨어진 도시가 아니라 5년 전, 10년 전, 혹은 20년 전만큼 떨어진 도시다. 내게도 춘천은 옛날 방향으로 10년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 당시 40대 초반의 나는 커다란 카메라를 메고 삼각대까지 들고 전국을 쏘다녔는데, 춘천에서는 소양강 물안개를 찍는다면서, 남이섬과 고슴도치섬의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길을 찍는다면서 야단법석을 떨었던 기억이 난다. 참 열심히 다니고, 참 열심히 찍고, 참 열심히 쓰던 시절이었다. 4기가 메모리카드 두 개로 중간중간 노트북에 다운로드하며 찍곤 했다. 지금이야 뭐, 128기가 메모리카드를 2년째 비우지 않고 있지만.

“춘천은 이름 자체가 ‘바로 그곳’이다. 아직도 가보고 싶고 가서 살고 싶어지고 사랑해 마지않을 꿈속의 여인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바로 그곳. 고향 같으면서도 고향 이상의 상상 속의 어여쁜 도시.” 유안진 시인은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시인의 말대로 춘천에 가면 몇 시절 내내 그리웠던 누군가를 어느 골목 모퉁이에서 문득 만나게 될 것만 같지만, 이젠 그럴 일은 일어날 확률은 복권에 당첨될 확률만큼이나 희박하다는 걸 알고 있다. 살다 보니 상상은 대부분 상상으로 그치고, 기대는 끝내 기대로 끝난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이게 또 은근히 위안이 된다. 내 것이 아닌 걸 깨끗이 포기할 때 마음에는 평온함이 생겨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사자머리 문고리가 있는 집

공지천의 오리배.

춘천에 들어서자마자 공지천으로 갔다. 1980년대 연인들이 데이트를 하기 위해 춘천으로 달려가던 시절, 그들은 공지천에서 오리배를 탔고 ‘원두커피’를 마셨다. 믿지 않겠지만 그땐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나 카페라떼, 프라푸치노가 아닌 ‘맥심’과 ‘초이스’ 그리고 ‘원두커피’를 팔았다. 주문을 할 때 “전 원두커피로 주세요”라고 했다. 원두커피는 없어졌지만 그 시절 오리배는 여전히 남아 있다. 오리배는 딱 한 번 타본 적이 있는데, 페달을 젓기가 너무너무 힘들어 살면서 다시는 이걸 탈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던 것이 또렷이 기억난다.

아, 원두커피를 마시던 카페 ‘이디오피아 벳’도 아직 문을 열고 있구나. 우리나라 최초의 원두커피 전문점이다. 요즘은 찾는 이가 별로 없어 카페는 한산하다. 요즘 청춘들은 구봉산전망대 카페거리로 간다고 한다. 에티오피아는 한국전쟁에 6000명을 파병했는데, 이를 기려 1968년 에티오피아 한국전참전기념탑을 준공할 때 이곳에 온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가 이 카페의 이름을 지어주고 에티오피아 원두를 보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문을 닫은 적이 없다고 한다. 카페에서 커피를 들고 공지천을 따라 걸었다. 의암호는 봄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고 버드나무 가지 잎은 진초록으로 서서히 변해 가고 있었다. 호숫가에는 오리배가 선착장에 줄지어 늘어서 있다. 칠이 벗겨지고 눈에 띄게 낡았지만 봄바람에 한가롭게 흔들리는 오리배의 모습은 여전히 낭만적이다. 그래도 타진 않을 것이다. 크게 심호흡을 했는데 콧속으로 스미는 달큼한 봄 내음이 좋았다.

약사동 망대골목에 있는 가파른 계단. 마을 꼭대기에 화재를 감시하는 망대가 있어 망대골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공지천을 나와 망대골목이라는 곳으로 왔다. 10년 전 우리나라의 골목을 취재한답시고 전국을 헤매고 다닐 때가 있었는데, 사람 한 명이 지나다니기도 힘들 정도로 좁은 골목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은 적이 있다. 얼마나 좁았냐면, 삐죽 솟아나온 슬레이트 지붕에 어깨가 긁히기도 했다. 그 골목이 아직 남아 있다.

망대골목은 약사동에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산비탈에 하나둘 집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만들어졌고, 마을 꼭대기에 망대가 세워졌다. 그래서 이 골목을 망대골목이라고 한다. 망대는 화재를 감시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춘천에서 오래된 옛 건축물 중 하나다. 망대 앞에 서면 인근 약사동과 효자동 일대가 다 내려다보인다. 화가 박수근(1914~1965)도 망대골목 주위에서 막노동을 하며 첫 개인전을 열고, 조각가 권진규(1922~1973) 역시 춘천고보 시절 5년간을 망대골목 주변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당시 이 골목을 찾았을 때는‘기대슈퍼’라는 곳이 있었다. 이름이 신기해 주인 할아버지께 연유를 물었더니 “사람들끼리 서로 기대 살자고 해서 지은 이름이야”라고 답해주신 것이 기억난다. 지금 기대슈퍼는 없다.주변도 재개발이 되어 지금은 높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그래도 아직 10~20분 정도 돌아볼 수 있는 골목이 남아있는데, 풍경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라고 해야 할까.

골목에 들어서면 1970년대의 장면이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진다. 좁은 골목길 양편으로 시멘트 담장이 높게 이어지고 그 위로는 녹슨 가시철망이 쳐져 있는 경우도 있다. 전깃줄이 얽혀 있고 푸른 대문 앞에는 파와 상추를 심어놓은 화분이 놓여 있다. 대문 너머로 강아지 짖는 소리가 들린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차양은 햇빛을 받아 투명한 노란색으로 빛난다. 요즘 보기 드문 사자머리 문고리가 달려 있는 집도 있다. 초등학교 시절 살던 시골의 고향 집 대문도 이랬다. 그때만 해도 나름대로 꽤 괜찮은 집 대문이었는데…. 이 대문이 세워진 지도 내 나이만큼이나 된 것 같다. 초록색 칠은 벗겨지고 붉은 녹이 가득 슬었다. 가끔 필름 카메라를 목에 맨 젊은이들이 골목을 다니는 걸 볼 수 있다.

명동거리에 배용준-최지우 동상

춘천에서 가장 번화한 명동에 있는 드라마 ‘겨울연가’ 조형물. 배우 배용준과 최지우가 서로 안고 있는 모습.

망대골목을 나와 걸을 건너면 죽림동주교좌성당이다. 화강암으로 지어진 성당건물이 고풍스럽다. 성당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죽림동성당에서 내려오면 중앙시장이다. 소머리국밥이나 강원도식 메밀전병을 부쳐내는 집, 올챙이국수를 파는 집도 있다. 중앙시장을 나오면 곧바로 명동. 춘천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닭갈비 골목도 만들어져 있다. 명동에는 배우 배용준과 최지우가 안고 있는 동상이 서 있다. 옛날옛날에 ‘겨울연가’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그때 이 드라마가 엄청난 ‘한류 열풍을 일으켰다. 지금의 케이(K)-팝 열풍에 버금갈 정도였다. 진짜다. 일본과 대만, 홍콩에서 관광객들이 물밀듯 들어올 때다.

길은 육림고개로 이어진다. 이곳에는 옛날 분위기의 조그마한 가게들이 많다. 강냉이 튀기는 집도 있고 미싱집, 참기름집도 있다. 길을 걷는 내내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내복집, 건어물 가게, 철물점, 중국집, 이발관, 미용실 등 예스런 가게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아, 아직 옛 풍경이 남아있구나. 40년 넘게 이곳에서 가게를 했다는 한 아주머니는 “예전에는 장날이면 이 고갯마루에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옛날 분위기의 조그마한 가게들이 많은 육림고개 풍경.

육림고개를 내려와 약사천 수변공원을 따라 길을 가면 효자동 낭만골목이다. 걸어서 15분 정도 걸린다. 이 골목은 벽화로 유명하다. 효자동이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효자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조선 중기인 1554년 출생한 반희언이란 효자가 있었는데, 노모의 깊은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 한겨울에 산삼과 딸기를 구했다는 이야기다. 뭉클 코스, 레트로 코스, 상상 코스 등 세 가지 테마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뭉클 코스는 효자 반희언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레트로 코스에는 1970~80년대의 풍경이 그려져 있다. 상상 코스는 구름빵과 고양이 등 다양한 만화 캐릭터가 수놓아져 있다. 벽화가 재밌어 돌아보는 재미가 의외로 쏠쏠하다. 꼭 한 번 가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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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대 메고 다니던 그 시절 쪽으로

낭만골목을 빠져나와 스마트폰 만보계를 켰다. 중년이 되면 만보계를 습관적으로 확인한다. 1만보를 넘으면 숙제를 해치운 듯 마음이 편하다. 망대골목-죽림동주교좌성당-중앙시장-명동-육림고개-효자동낭만골목을 지나는 동안 1만236보를 걸었다. 옛날을 떠올리며 옛날 방향으로, 10㎏이 넘는 카메라 가방을 메고 맨프로토 삼각대를 메고 다니는 그 시절 쪽으로 걸었다. 무턱대고 렌즈부터 들이밀던 치기 어린 그 시절을 지나와, 이제는 내 셔터 소리가 누군가의 단잠을 깨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나이가 됐다. 찍지 말라고 하면 찍지 않는다. 35㎜ 렌즈가 달린 작은 카메라 하나만 들고 다니는데, 이 카메라로 찍지 못하는 사진은 내 사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억지로 찍은 사진은 아무 의미가 없고, 그렇게 찍어 봐야 쓸 데도 없다는 걸 12테라바이트를 찍으며 깨닫게 됐다.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걸 억지로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가지게 된다면 운이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나누려고 한다.

김유정역 바로 옆에 있는 옛 김유정역 역사.

마지막 코스는 김유정역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인명을 역 이름으로 사용하는 곳이기도 한데, 원래 이름은 ‘신남역’이었다가 김유정문학촌이 만들어지면서 김유정역으로 이름이 바뀌게 됐다. 김유정역 바로 옆에는 옛 김유정 기차역이 그대로 남아있다. 옛 모습 그대로 서 있다. 역 앞에는 무궁화호 기차가 서 있고, 실내는 카페로 운영 중이다.

오래된 역사 위로 구름이 흘러간다. 세계가 구석구석까지 아름다울 필요는 없겠지만, 오늘 춘천의 하늘은 너무나 아름답다. 여행을 떠나오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세상이 꼭 이해와 납득, 섭렵과 통제의 대상일 필요만은 없지 않을까. 때로는 세상을 감각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일도 필요하지 않을까. 오늘처럼 하늘이 예쁜 날에는 더더욱 그렇다. 역사 위 구름도 옛날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 같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중국집에 들렀다. 춘천 하면 닭갈비에 막국수를 떠올리겠지만, 전국구급인 냉면집과 중국집 그리고 순댓국집이 있다. 오늘의 선택은 짜장면이다. 이 집은 화상집인데 ‘백년짜장’이라는 옛날식 짜장면을 판다. 직접 담근 춘장으로 조미료를 넣지 않고 짜장 소스를 만든다. 고기를 듬뿍 갈아 넣는데, 맛이 자극적이지 않아 좋다. 단무지와 양파, 춘장이 담긴 접시가 나오고 곧 주문한 짜장면이 나왔다. 소스와 면을 따로 내주는데, 특이한 건 간 마늘을 준다는 것. 적당한 만큼 덜어 넣어서 비비면 된다.

오늘은 옛날 방향으로 딱 1만보를 걸었던 날이다. 변해 버린 풍경이 많아 아쉬웠지만, 그래서 변하지 않은 풍경에 대한 고마움이 더 크다는 걸 알게 된 날이다. 시간이 흘러 이 집 짜장면을 다시 먹게 된다면, 아, 이 집 짜장면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회영루의 옛날식 짜장면인 백년짜장.
여행 정보

남부막국수 본관(033-254-7859)은 1975년에 개점했다. 춘천의 수많은 막국수 식당들 가운데 단연 원조급이다. 소양호 가는 길에 자리 잡은 샘밭막국수(033-242-1712)도 유명하다. 닭갈비는 신북읍의 통나무집닭갈비(033-241-5999)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신북읍 가보자순대국(033-243-7607)은 내장 가득한 순댓국을 내는 노포다. 회영루(0507-1369-3841)는 ‘백년짜장’과 중국냉면으로 유명하다. 평양냉면(033-254-3778)은 진한 육수의 냉면을 낸다. 대원당(033-254-8187)은 춘천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이다. 1968년에 문을 열었다. 달콤한 잼을 바른 맘모스빵과 부드러운 크림이 듬뿍 든 버터크림빵이 가장 인기다. 소양강스카이워크도 걸어보자. 소양호 위에 투명한 바닥 구조물을 설치했다. 저물 무렵 풍광이 좋다.

글·사진 최갑수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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