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게 남한은 ‘고장난 ATM’…핵무기 관리가 유일한 희망” [정지혜의 린치핀]

정지혜 2024. 5. 18.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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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지배계층은 바보가 아니다…‘핵 포기’ 기대는 비현실적”
한미동맹이 가치외교? ‘국익‘이 핵심…경제 이익과 안보가 우선
尹 정부에 대한 반감, 외교정책에도 영향…대통령 여론 소통 문제
방위비 분담, 韓 경제 대비 비싸지만은 않아…日 과거사 극복할 때

“북한 입장에서 한국은 무엇일까요? 쉽게 말해 ATM입니다. 물질적 지원의 출처란 것이죠. 북한이 보기에 남한이라는 ATM은 고장이 났고, 쓸모없는 파철이 돼버렸습니다.”

모든 연결의 끈이 희미해지고, 사실상 ‘두 국가’가 되어가는 지금의 남북관계에 대해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는 이렇게 진단했다. “북한이 원하는 것을 전혀 하지 못하는” 한국이 아무리 남북회담과 교류를 하자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분석이다. 북한과 대화하자는 주장을 반복하는 야당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 근본적 영향은 없었을 것이라고 그는 관측했다. 

구소련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으로 1980년대에 북한의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수학했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이달 초 두 차례에 걸쳐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란코프 교수는 서구에서 북한 문제에 대해 가장 정통한 학자 중 한 명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대북정책에 대해 논의한 민간 전문가 다섯 명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한국에서 출간한 주요 북한 관련 저서는 『리얼 노스코리아: 좌와 우의 눈이 아닌 현실의 눈으로 보다』(개마고원), 『북한 워크아웃』(시대정신), 『소련의 자료로 본 북한 현대정치사』(오름) 등이다. 이들 책에선 외부인의 시선으로 남북관계를 본 객관적인 거리감, 진영화 된 한국 사회에서 굳이 들춰보려 하지 않았던 북한의 진짜 모습들, 북한 사회를 상징하는 각종 디테일, 러시아 출신이 비교한 북한과 다른 공산권 국가와의 차이 등이 흥미롭게 전개된다.

란코프 교수와 2024년의 한반도 정세, 대북정책의 향방, 윤석열정부의 외교안보 성과와 과제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북한 지배계층은 바보가 아니다”

-윤석열정부의 대북정책 평가는.

“약간 문제가 있다. 한국 보수파는 ‘강대강’ 정책을 굳게 믿고 있다. 군사력과 힘이 다시 중요해지기 시작한 세계에서 이는 이해하기 쉬운 태도다. 하지만 지난 2년간 한국은 필요없이 공세적인 대북 태도를 취하는 인상이 있다.

특히 군사 훈련 문제가 그렇다. 한미동맹과 군대의 즉응성을 위해 훈련은 당연히 해야 하지만 매번 이렇게 요란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원래 조용히 실시했던 훈련까지 강조하고 나설 필요가 있을까. 북한 지도부에 대한 공격 준비를 이토록 시끄럽게 공개적으로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이것이 북한을 자극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남북 모두 대화 의지가 없어 보인다.

“윤석열정부는 북한과의 교류에 열망이 없다. 북한도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다. 북한 입장에서 한국은 쉽게 말해 ATM이다. 유엔 안보리 제재를 위반할 마음이 조금도 없는 한국은 북한이 바람직하게 여기는 일을 전혀 하지 못한다. ATM이 고장나버린 상황에서, 북한과 회담과 교류를 하자고 주장하는 한국의 야당이 정권을 장악했더라도 별 영향은 없었을 것이다. 무역 의존도가 매우 높은 한국에서 국제법과 다를 바 없는 안보리 제재를 위반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보수파든 진보파든 이 점에선 같다.”

-현 정권에서 남북관계가 달라질 가능성은 희박한가.

“남은 3년 동안 대북정책에 영향을 미칠 큰 미지수라면 미국 대선 결과 하나다. 바이든 재선 시 거의 확실히 아무 변함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가 재선된다면 2019년 하노이식 타협을 다시 시도하며 큰 변화가 있을 수도 있다. 핵 시설 일부를 철거한 북한에 대해 제재가 많이 완화되고, 남북 대화도 가능해지는 식이다. 물론 트럼프 행정부가 하노이식 타협을 성공한다는 전제 하에.“

-비핵화는 실패했나.

“당연히 실패다. 20년 전부터 그렇게 주장해왔다. 북한의 1차 핵실험 이전부터 북한의 비핵화는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비핵화에 대한 희망은 늦어도 2000년대초 완전히 사라졌으며 원래도 그리 높지 않았다.

북한 정치 엘리트 계층은 핵무기가 체제 유지와 국가 유지를 위한 유일한 보장장치로 보고 있다. 비핵화는 집단 자살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북한이 물질적인 보상과 국제 안전을 보장받으면 핵을 포기할 수 있다는 얘기는 웃기는 주장이다.

북한 지배계층은 바보들이 아니다. 그들은 핵개발 프로그램이나 핵무기를 포기한 우크라이나, 리비아가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다. 핵 프로그램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적대 국가의 폭격 때문에 핵을 개발하지 못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어떻게 됐는지 잘 알고 있다.

북한 지도층은 핵을 유지해야만 북한이란 나라를 유지하고, 대를 이어 집권계층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 좋든 싫든 이것이 팩트다. 비핵화는 지금도,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유일한 희망은 ‘핵무기 관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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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 핵심은 가치 아닌 ‘국익’

-지난 2년 윤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에 ‘A-’, ‘B+’라는 다소 후한 점수를 줬다. <관련기사: “외교좌표 긍정적… 中·러 다자협력 해야” [심층기획-윤석열정부 2년 평가]>

“긴장감이 고조되는 오늘날 동북아와 세계에서 윤석열정부든 다른 행정부든 선과 악보다는 악와 차악의 선택에 직면했다. 이런 상황에선 실수하기도 쉽다. 윤 정부는 아직 확실한 실수로 보이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이만큼 불투명한 국제 정세에서 실수 없는 정책은 불가피하다.

윤 대통령은 외교안보 관점에서 운이 좋지 않은 대통령이다. 지난 4∼5년간 우리 대부분이 익숙했던 탈냉전 시대가 빠르게 무너졌다. 이 때문에 윤 정부는 적어도 30여년 전부터 한국 통치자들이 직면하지 않았던 도전과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한다. 윤 대통령은 제가 동의하기 어려운 과잉 반응을 하는 경향이 없지 않으나 대체로 합리주의적으로 보이는 외교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현 정부의 ‘가치외교’, 한·미·일 동맹 강화라는 큰 방향성에 대한 평가는.

“국제관계 이론에서 나라의 행동을 제일 잘 설명하는 것은 ‘현실주의’라고 본다. 이 이론은 외교에서 가치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미국도 가치외교를 주장하지만 민주 세력을 도와주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한국도 가치관이 비슷한 대만과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공유하는 사상이나 가치관보다 경제이익과 안보 우려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권위주의 정권인 베트남이나 사우디아라비아와 상호 이익 원칙에 따라 관계를 강화하려 노력하고 있지 않을까? 한국 입장에서 어느 나라와 더 가까운가. 민주정체인 대만인지, 권위주의 1당제 정권인 베트남인지.

이것은 한국이나 미국을 비판하기 위함이 아니다. 고금을 막론하고 외교는 가치관보다 국익을 기본으로 작동한다. 한미동맹은 공유하는 가치관에 일부 기반하고 있지만 핵심은 상호 일치하는 국익이다. 한국은 미중 대립, 블록화, 국제질서 혼란이 가져온 새로운 세계에서 미국과 동맹을 유지 및 강화하는 것 외에 아무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때때로 신중한 태도를 취하거나 미국을 지나치게 믿어서는 안 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한미일 동맹 강화라는 큰 방향성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한편 북·중·러 외교 실종에 대한 비판도 계속된다.

“이런 비판을 하는 것이 누구인가. 주로 야당, 진보파 사람들 아닌가. 이들은 야당이므로 책임성이 없다. 블록화가 갈수록 본격화하는 세계에서 한국이 미국과의 동맹 이외에 안보를 지킬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원래는 지나친 이야기로 생각했던 남핵(한국의 자체 핵개발)이 한국 안보를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최근 생각하게 됐다. 국제관계에서 어느 정도 자립성을 가져올 것 같아서다. 하지만 한국 사회와 정치 엘리트들의 상황을 감안하면 남핵 개발 의지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를 감안한다면 미국과의 동맹이 불가피한 선택이 된다. 이 동맹이 없다면 멀지 않은 미래에 ICBM, 전술핵을 배치할 북한을 억제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미국과의 동맹은 공짜로 얻는 것이 아니다. 미중, 미러대립 상황에서 수많은 경우 미국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3년차를 맞는 윤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에 조언을 한다면.

“정책 자체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 문제다. 예를 들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은 꼭 필요한 것이었는데, 국내 여론의 지지가 그리 높지 않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외교정책 문제보다 국내정책 문제로 볼 수 있다. 윤 정부는 국내에서 여론과의 커뮤니케이션 문제가 많다. 많은 국민이 정부의 외교정책에도, 국내정책에도 반감을 가진다. 대체로 이 반감은 객관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나 스타일 때문에 생긴 것 같다.

◆방위비 분담, 韓 경제 대비 비싸지만은 않아…日 과거사 극복할 때

-한국 외교가 직면한 위협요인은.

“3가지 기본 위기가 몇년 전부터 거의 동시에 전개되기 시작했다. 첫째는 미중 대립이다. 한국은 약 30년 동안 이른바 ‘안미경중’ 정책을 실시했지만 현 상황에선 이런 정책 기반이 빠르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국도 중국도 경제와 안보를 구별할 생각이 없어서 한국은 선택을 해야 한다.

둘째는 북한 국력, 특히 군사력과 핵 능력 급상승이다. 5∼10년 전만 해도 북한이 예측 가능한 미래에 무너질 수 있다는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다. 제2차 남침에 대한 우려는 극소수 극우파 사람들의 악몽처럼 보였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중국을 등에 업은 북한은 흔들렸던 주민 감시 능력을 완전히 부활시켰고, 남한을 위협할 능력을 갖게 됐다. 이제 한국은 냉전 말기 때부터 많이 경시해왔던 안보 문제를 훨씬 더 중시할 필요가 생겼다.

세 번째 위기도 쉽지 않다. 미국과 서방이 세계 경찰 역할을 할 능력도 의지도 많이 사라진 것이다. 미국의 태도는 상수보다 변수나 미지수가 되어버렸다.”

-신냉전 시대에 한국의 운명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소수 강대국을 제외하면 여러 나라들이 달라지는 역사의 흐름에 끌려가고 있다. 한국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 빠지고 있다.

미국의 동맹국가로서 한국은 다른 충돌과 대립에 연루될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중국과의 유리한 경제 관계를 상당 부분 희생하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위기를 초래할 대우크라이나 지원을 해야 한다. 제일 어려운 시나리오는 대만 사태에 말려드는 것인데, 큰 부작용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중립외교나 한국식 등거리 외교를 시도한다면 나라의 안보를 보호하기 많이 어려워진다. 더 큰 손해를 입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진짜 쉽지 않은 선택이다.”

-미국, 일본과 동맹을 강화하며 한국이 얻는 실익이 없다는 평가도 있다.

“동맹은 보험과 비슷하다. 돈 낭비라 생각할 수도 있고 평생보험 가입자 중 아무 문제 없이 일생을 사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큰 일이 생겼을 때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 동맹 가입은 실익이 없어보이는 때가 많다. 동맹을 위한 노력은 더 큰 보험료를 내는 것과 비슷하다. 더 많이 낸다면 필요할 때 받을 수 있는 보상 규모가 커지고 보상받기도 쉬워진다.

일본 문제는 복잡하다. 세계 역사에서 이웃나라 간 침략을 주고받고 강제 통치를 하는 게 드문 경험은 아니다. 과거사 문제가 미래에 지나치게 영향을 미치는 게 좋은 일일까. 오늘날의 새로운 세계에서 일본만큼 한국과 국가 이익이 비슷한 나라는 별로 없다. 이 때문에 과거사를 극복할 때가 왔다고 본다. 강제징용 문제는 객관적으로 말해 한국측이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다. 일본측에서 별다른 호응 조치가 없는 건 물론 아쉽다.”

-현실적으로 보자는 것인가.

“본질적으로 일본은 과거와 많이 바뀌었다. 과거사에 미안함을 가지고 있던 세대가 거의 죽거나 은퇴했고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오늘날 일본 엘리트 계층은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이미 끝났고 영원히 사과할 의무가 없다’는 입장이다. 한국이 과거사 문제를 계속 공격하더라도 일본에선 짜증스러운 반응만 있을 것이다. 갈수록 위험해지는 세계에서 한국은 새로운 일본의 태도를 용인하고 관계를 강화할 것이냐, 과거사로 계속 공격할 것이냐 선택해야 한다.

-미국과의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우리가 얻을 것을 얻으려면.

“미국 외교가나 학자들은 대부분 미국이 더 적극적으로 협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 세계에서 거의 모든 나라가 국방비를 증강시켜야 하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회피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주한미군 방위비 증가를 하지 않을 경우 한미동맹이 어느 정도 약해지고, 그 부작용 완화를 위해 다른 데서 돈을 써야 할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군사 지출을 증가시킬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해 한국 경제규모를 감안하면 방위비 부담은 그리 비싼 것이 아닐 수 있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은 옛날만큼 튼튼하지 않은 한미동맹에 더 많은 투자를 하기보다 자위적 핵억제력 개발에 쓰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마차나 수레의 축에 꽂는 핀을 뜻하는 '린치핀'은 대체불가능한 존재, 외교적으로 꼭 필요한 동반자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린치핀이 된 이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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