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잡힌 역사 시각… 영국사 내러티브로 담다

김용출 2024. 5. 18.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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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리던 英
엘리자베스 1세·올리버 크롬웰 등
역사의 인물들 전면에 내세워 조명
삶·고민 중심 내러티브적 접근 눈길
큰 흐름 속 애국주의 치우침도 자제
“거시의 흐름과 미시사가 균형 잡혀”

사이먼 샤마의 영국사 1, 2, 3권/사이먼 샤마/허구생·손세호·김상수 옮김/한울/각각 4만6000원·4만9000원·4만8800원

“(의사당) 하원에서 랠프 버니는 에지힐 전투가 승리였다며 낙관적인 주장이 담긴 에식스 장군의 긴급 공문을 읽으며 앉아 있어야 했다. … 랠프는 슬픔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적군인 자기 부친이 (찰스 1세) 국왕의 깃발을 들고 전사했던 것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또는 그의 시신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아무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엘리자베스 1세가 1603년 사망하고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위를 물려받으면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왕국은 하나로 통합됐다. 제임스 6세에 이어 차남 찰스 1세는 프랑스를 모델로 절대군주제를 지향했지만 의회의 반발에 부딪혔고 내전으로 이어졌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린 영국의 역사를 균형 잡힌 시각을 바탕으로 다양한 인물들을 전면으로 내세운 미시사로 재조명한 책이 최근 번역 출간됐다. 사진은 엘리자베스 1세(왼쪽), 청교도 혁명을 주도한 올리버 크롬웰. 세계일보 자료사진
절대군주제를 꿈꾼 찰스 1세를 중심으로 한 왕당파와 올리버 크롬웰을 중심으로 한 의회파 간 내전이 발발한 1642년, 의회파의 랠프 버니는 첫 교전에서 왕당파에 가담한 아버지 애니 버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큰 슬픔에 빠졌다. 그는 아버지 시신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부인, 어젯밤 저는 에식스 장군 부대에서 온 하인으로부터 저의 친애하는 부친의 시신을 찾을 가능성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부친이 평범한 병사에게 죽임을 당했다고는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전투에서 죽은 시신을 묻었던 몇몇 교구의 모든 성직자에게 사람을 보냈지만 그들로부터 시신에 관한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왕이 아닌 의회가 이끄는 나라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던 랠프 버니는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면서 신념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이듬해 완전한 승리를 겨냥한 동맹 체결에 서명하지 않고 가족을 데리고 프랑스로 망명해 버렸다. 랠프 버니의 사례처럼, 의회 민주주의로 향한 영국의 여정은 결코 ‘예정’된 것이 아니었다.

찰스 1세는 패배 끝에 1648년 퇴위한 뒤 이듬해 참수됐고,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한때 공화제를 시행했다가 다시 왕정으로 돌아간 뒤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나면서 의회가 통치하는 입헌군주제가 확립됐다.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국 의회가 통합법을 가결하면서 대영제국이 성립됐고, 마침내 현대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의회 민주주의가 성립되기 전이나 대영제국 성립 이후 영국 역사는 우리가 모두 아는 바이다.
나치에서 유럽을 구한 처칠(왼쪽), 현대영국문학에 큰 족적을 남긴 조지 오웰. 세계일보 자료사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리며 근현대 세계사에 큰 영향력을 끼친 영국의 역사를 다양한 인물들을 전면으로 내세워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재조명한 책이 번역 출간됐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했고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는 저자가 자신이 진행했던 영국 BBC 다큐멘터리 ‘텔레비전 영국사’를 바탕으로 보완해 저술한 3권에 달하는 ‘사이먼 사마의 영국사’가 바로 그것이다.
책의 제1권은 영국 선사시대에서 출발해 로마인들의 도래, 노르만 정복과 흑사병,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시대를 다루고, 2권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가 통합되는 과정부터 시작해 아메리카 식민지를 잃고 인도를 통치하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으며, 3권에선 1776년 빅토리아 시대 말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다룬다. 세 권 합쳐서 17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저작이다.
사이먼 샤마/ 허구생·손세호·김상수 옮김/ 한울/ 각각 4만6000원·4만9000원·4만8800원
책은 왕조 중심으로 서술한 앙드레 모로아 작가의 ‘영국사’나 옥스퍼드대 학부생을 대상으로 출간된 학술서 ‘옥스퍼드 영국사’ 등 국내에 주로 번역 출간된 기존 영국사와 관점이나 시각 등 여러 면에서 다르다. 우선, 책은 다양한 인물들의 삶과 고민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미시사적 방법으로 영국사를 조명하고 있다.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거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고민을 보여줌으로써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맛깔스러운 내러티브를 보여준다. 편집증에 시달렸던 위대한 철학가 루소, 그가 설파한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부모 덕에 고삐 풀린 망나니처럼 성장했으나 위대한 정치가로 성장한 소년,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부인을 찾아가 셋이 함께 살자고 제안했던 여성 지식인, 남편을 잃고 수십 년을 칩거하며 지냈으나 관 속에서는 다른 남자의 사진을 손에 쥐고 누웠던 여왕, 일부러 누더기를 걸치고 빈민 체험을 하다가 결국엔 결핵에 걸려버린 작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늘 열등감에 시달렸으나 결국엔 나치로부터 유럽을 구해내는 영웅이 되는 처칠….

아울러 영국사의 전체 구조와 큰 흐름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애국주의로 경도되지 않고 객관적이고 균형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도 돋보인다. 특히 “아주 특별한 영국만의 특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영국사를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필연적이고 영속적인 역사로 가정하는” 영국사의 함정을 피해갈 수 있게 해준다는 평가다. 즉 영국사 역시 우연적인 사건들과 외래적 제도와 문물의 영향이 뒤섞인 혼합적인 역사였음을, 간헐적인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점진적으로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역사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저자가 유대계 이민자를 부모로 둔 마이너리티이고, 20년 가까이 영국을 벗어나 있었으며, 학문 주제가 유럽 여러 나라의 역사와 예술사 분야로 확장돼 있어 영국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책을 공동 번역한 허구생(70) 전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은 세계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대전 사이 전간기에 영국 등으로 이민을 가서 공부했는데, 이들의 글들은 대체로 현란하다. 저자 역시 한 사람으로 중복문에 평소에 안 쓰는 단어들이 많아서 번역하는 데 애로가 많았다”며 세 권 모두 완역하는 데 6년 가까이 소요됐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사회 구조나 계층 문제 등 거시사의 주요 문제를 모두 포함하면서도 미시사를 다룸으로써 내러티브, 구체적인 디테일이 살아 있는 것 같다”며 “거시의 흐름과 미시사가 균형이 잘 잡혀 있고, 시각도 객관적이라는 점이 강점”이라고 호평했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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