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우크라이나 ‘코백이 춤’유행시킨 해삼위 학생공연단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4. 5. 18.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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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1921년 4월~6월 경성, 부산, 대구 등 15개 도시 돌며 23회 공연
1921년4월29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첫 공연을 가진 블라디보스톡 학생음악단은 당시만 해도 생소한 러시아 무용과 숙련된 연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남녀 학생 11명으로 이뤄진 공연단은 6월4일 경성의 마지막 공연까지 전국 15개 도시를 돌며 23회 공연을 가졌다. 개벽사 학예부장 현철은 해삼위 학생음악단 공연을 1921년 최고의 음악회로 꼽았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지난 29일 하오 8시부터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일행들의 주최로 음악무도회를 개최하였는데, 일행의 음악무도회의 개최될 것이 본지를 위시하야 각 신문에 발표가 되자 경성 일반의 인기는 모두 물끓듯이 일행의 음악무도회로 집중되어 29일 낮부터 입장권을 사러 오는 사람이 답지하였었다. 그리하여 정각 전부터 청년회관으로 모여드는 남녀 관중은 조수 밀듯하야 회장 아래위층에 발들여 놓을 틈이 없이 만원에 만원인 성황을 이뤄서 나중에는 입장을 거절까지 하야 여기 저기서 입장을 허락하라고 법석이 일어나기까지 하는 공전(空前·이전에는 없는)한 성황으로 이상재씨의 사회로 개막이 되었는데….’(‘공전성황리에서 眞音樂!!眞舞蹈’, 조선일보 1921년5월1일)

1921년 4월29일 밤 8시, 종로의 랜드마크인 붉은 벽돌색 3층 건물 기독교청년회관(YMCA회관)에 인파가 모여들었다.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톡)에서 건너온 교포학생 음악회를 보러 몰려든 관객이었다. 해삼위는 당시 블라디보스톡을 가리키는 말이다. 숙련된 서양음악 연주 실력을 갖춘데다 조선 관객들로서는 난생 처음 보는 서양 무용까지 선보인 이 음악회는’물끓듯한 인기’를 끌었다. 신문은 ‘만원에 만원인 공전의 성황’을 이룬 이 공연을 현장중계하듯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낱낱이 전했다.

해삼위 학생음악단이 1921년4월29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가진 공연 프로그램. 무용과 음악을 섞은 혼합 공연이었다. 매일신보 1921년 4월30일자

◇앞뒷문이 터질듯 밀려든 관객

YMCA가 주최한 29일과 30일 음악회에 이어 학생대회 주최로 5월2일 밤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음악회도 성황을 이뤘다.’1000여명 관람자는 시간 전에 모여들어 앞뒤문이 터질듯이 공전한 성황을 이루었고 아직도 입장하지 못한 관객은 문밖에서 문을 열어달라고 야단을 치며 문안에 있는 사람은 서로 어깨를 부비어 몸이 끼어서 용신을 못하게 되었고 중간에는 사람 다니는 길에까지 앉아 구경하게 되었고 한번 입장한 사람은 나가려고 하여도 나갈 길까지 막히었으며….’(‘학생대회 주최로 해삼위 학생단 음악회’,조선일보 1921년5월4일)

1921년 4월29일 해삼위 학생음악단 첫 공연을 자세히 소개한 조선일보 1921년 5월1일자 기사. 러시아 민속춤과 스페인 무용, 김 니콜라이의 바이올린 연주가 갈채를 받았다.

◇해삼위 음악단 소식, 매일 신문에 실려

해삼위 학생 방문단은 1921년4월22일 블라디보스톡에서 배편으로 출발, 원산을 거쳐 27일 밤 경성에 도착했다. 독립운동가 이강(李剛·1878~1964)을 단장삼아 러시아에서 나고 자란 한인 학생 11명(남학생 7명, 여학생 4명)이 고국 방문에 나선 것이다. 한두명을 빼곤 한국어를 못하는 이민 2,3세였다. 학비와 해삼위청년회관 건축비 모금을 위한 목적이었다. 당시 YMCA 초대 한국인 총무를 지낸 이상재가 초청했다.

해삼위학생음악단은 29일과 30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두 차례 공연을 시작으로 6월5일 경성을 떠날 때까지 한달 넘게 경성을 비롯한 전국 15개 도시를 돌며 23회나 순회 공연을 했다. 독립운동 기지인 연해주 동포학생에 대한 동정과 관심,’예술의 나라’로 알려진 러시아의 무용와 음악에 대한 선망에 ‘신생’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까지 섞여 이 단체의 일거수 일투족은 매일같이 신문에 실릴 만큼 주목을 받았다.

◇커튼콜만 네차례, 신기록

해삼위학생음악단이 어떤 공연을 선보였기에 주목받았을까. 당시 신문(매일신보 1921년4월30일자)에 보도된 공연 목록에 따르면, YMCA주최 음악회에선 리스트의 피아노곡’환상’을 비롯,’5부합주-행진곡 회향(懷鄕)’’3부합주-전원시 행운’, ‘무도곡-가봇’, ‘3부합주-왈츠’, 잡곡, 민요 등이었고, ‘수병무’(水兵舞), ‘비행선’(飛行船), 코사크족 민속무(호팍·Hopak dance) 등 러시아 무용과 보헤미안 춤, 스페인 무용을 선보였다. 몇몇 작품외엔 어떤 곡을 연주했는지 불확실하다. 김 니콜라이의 바이올린 실력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김군의 바이올린은 지금 경성에 있는 우리 음악계에는 군(君)만한 재능을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구동성으로 군의 신묘한 바이올린에 누가 감탄치 않는 사람이 없어 박수와 갈채는 쉬지 않음으로 김군은 다시 무대에 나오기는 네번까지 이른 것은 우리 음악계에 신기록이 되었으며….’(‘공전성황리에서 眞音樂!!眞舞蹈’, 조선일보 1921년5월1일)

◇백우용의 극찬 ‘조선음악가는 그를 당할 수 없을 듯’

대한제국 군악대, 이왕직 양악부를 계승한 경성음악대 지도자 백우용도 YMCA 음악회를 극찬했다. ‘내가 지금까지 매우 많은 음악단과 같이 함께 출연도 하였으며 또 듣기도 많이 하였으나 이번 해삼위 학생단의 음악같이 상쾌한 감상을 주는 악대는 별로 듣지 못하였소이다… 그 중에 김 니콜라이군의 바이올린은 조선에서 전문으로 몇해를 단련한 음악가 중에도 도저히 그의 자유롭게 내는 리듬은 당할 수 없을 듯하며 피아노의 주법도 이곳에서 연습한 사람과는 비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음조를 희롱합디다.’(동아일보 1921년5월1일)

1921년4월27일 밤 경성 남대문 역에 내린 해삼위 학생음악단. 이민 2~3세로 대부분 조선어를 못했다. 매일신보 1921년4월29일자

◇박태준 ’폴카 풍 무도곡 한동안 유행’

해삼위 공연단은 원산 평양 진남포 사리원 개성 인천 대구 부산 마산 군산 이리 광주 등을 순회했다. 평양 숭실전문을 나와 숭실중학교에서 교사로 있던 작곡가 박태준(1900~1986·전 연세대음대 학장)은 5월9일 평양 기독교청년회 주최로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공연을 봤다. ‘연주회 개막은 기독교청년회 음악부원 곽권응 (나의선배)의 간단한 소개가 있은 후에 남(南)셀게,김(金)니콜라이,박(朴)세묜,채(蔡)페오판의 4부합창으로 시작되었고 김(金)니콜라이의 바이올린은2~3회의 재청을 받았다. 그때 연주된 무도곡중 폴카풍의 2박자 멜로디는 그후로 한동안 유행되어 나는 지금도 외고 있다.’(‘폴카 멜로디는 유행까지’, 조선일보 1972년9월10일)

◇시골까지 대유행한’코백이 춤’

공연평론가 박용구(1914~2016)는 1921년 해삼위조선학생음악단의 내한공연을 ‘서양 음악이나 무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1920년대 제일 큰 사건’으로 회고했다. 현악4중주와 서양 무용을 소개한 첫 사례라는 것이다.(’박용구: 한반도 르네상스의 기획자’77쪽~87쪽)

박용구는 무용 프로그램에 더욱 주목한다. ‘음악단의 레퍼토리 보면 알겠지만 스페인 춤이 있고 러시아의 호팍 춤도 있고, 창작 무용이 아닌가 할 정도의 것도 있고, 수병의 춤이라든가, 레퍼토리가 다양할 뿐만이 아니라….’특히 해삼위음악단은 한달 넘게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한 덕분에 경북 풍기(박용구 고향) 같은 시골에서도 ‘코백이 춤’(호팍 댄스)이 유행할 만큼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고 했다. 박용구는 ‘해삼위 음악단이 음악사나 무용사에서 제대로 조명이 안돼 유감’이라고까지 했다.

◇‘1921년 최고의 음악회’

해삼위 학생음악단이 현악4중주를 처음 소개했다는 박용구의 진술은 어떤 근거에서 나왔는지 불확실하다. 당시 공개된 프로그램이나 공연 기사를 보면, ‘5부 합주’’3부 합주’식의 애매한 표현만 나오지 어떤 악기로 구성됐는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박용구는 ‘5부 합주’ 프로그램인 ‘행진곡 회향(懷鄕) ‘을 드보르작 현악4중주 아메리카 2악장으로 추정했는데, 말그대로 추측에 불과하다. 해삼위 공연이 있었던 1921년 박용구는 경북 풍기에 사는 일곱살 소년에 불과했고, 보통학교도 입학하기 전이었다.

잡지 ‘개벽’ 학예부장이자 연극인인 현철(1891~1965)이 1921년 예술계를 결산하면서 ‘노령(露領)조선인학생음악단이 조국을 방문한 외에는 하나도 음악회라고 할만한 무슨 회합이 없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같다’(‘예술계의 회고 1년간’, 개벽 제18호,1921,12)고 쓴 것을 보면, 해삼위 학생음악단 공연이 깊은 인상을 남긴 건 사실인 듯하다.

◇전국에서 후원금 답지

해삼위 학생공연단은 29일 첫날 경성 공연에 후원금 355원을 모은 것을 시작으로 공연때마다 성금이 답지했다. 하지만 불행한 일도 있었다. 최연소 단원인 열네살 이마리아양이 강행군 탓인지 전염병에 걸려 군산에서 치료받던 중 6월4일 숨졌다. (‘금조 석왕사로 향한 해삼위학생단’, 조선일보 1921년6월6일) 공연 첫날부터 진기한’수병무’를 추어 무대에 재차 불려나온 ‘재롱스럽고 천진난만한’ 소녀였다. 해삼위 학생음악단은 숱한 사연을 남긴 채 6월5일 남대문 역을 출발해 귀로에 올랐다.

해삼위 공연단은 이듬해인 1922년에도 두 차례 내한 공연을 가졌다. 각각 ‘해삼위연예단’(4월18일~8월10일) ‘기독교청년학생음악단’(7월10일~8월9일)명의였다. 열기는 전보다 덜했고’기독교청년학생음악단’은 돌아갈 여비 마련에도 곤란을 겪었다고 한다. 하지만 해외 동포들의 딱한 처지를 끌어안으려는 민족애만큼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참고자료

현철, ‘예술계의 회고 1년간’, 개벽 제18호,1921,12

김은영, 1910~1920년대 YMCA 음악회에서 상상한 ‘민족’, ‘경성의 소리문화와 음악공간’, 서울역사편찬원,2022

조윤영, 조선인 중심의 음악회장,경성기독교청년회관, 음악학 25-2, 2017,12

유선영, 답례로서 연예: 1920년대 문화적 민족주의의 연예, 언론과 사회 22-3. 2014

박용구,’박용구: 한반도 르네상스의 기획자’, 수류산방,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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