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더 빨리 뛰도록 진화해… 치타도 가젤도 괴롭다

황지윤 기자 2024. 5. 18.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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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영국의 과학 칼럼니스트 “수많은 생물은 불완전하게 진화”
/포레스트북스

고래는 물에서 숨 쉬지 않는다

앤디 돕슨 지음|정미진 옮김|포레스트북스|392쪽|2만2000원

1988년 10월 미국 알래스카 북쪽의 보퍼트해. 한 이누이트족 사냥꾼이 두꺼운 얼음 아래에 갇힌 세 마리 귀신고래를 발견한다. 이 고래들은 얼음에 난 작은 구멍 사이로 번갈아가며 숨을 쉬고 있다. 얼음이 없는 가까운 바다는 8km나 멀리 있고, 기온이 더 떨어져 구멍이 얼어붙으면 고래들은 익사할 위기다. 이 소식이 알려지며 전 세계가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고래 이야기로 떠들썩해진다. 그린피스가 나서고, 냉전 중이던 미국과 소련 정부가 힘을 합쳐 고래 구출 작전을 벌인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고래가 바다에서 익사할 위기에 처했다고? 이 거대한 수중생물은 왜 물속에서 숨을 쉬지 못하는가? 영국의 차세대 생물학자이자 과학 칼럼니스트인 앤디 돕슨이 그의 저서 ‘고래는 물에서 숨 쉬지 않는다’(포레스트북스)에서 ‘진화’에 대한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저자는 묻는다. “수많은 생물이 완벽은커녕 어딘가 불완전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은 진화이다. 그러나 위대한 성공작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지금껏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프리카 초원으로 가보자. 생태계 먹이사슬에서 치타(포식자)는 가젤(먹이) 위에 있다. 두 개체가 만나는 순간만 조명하면 마치 승자와 패자의 구도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종 차원에서의 상호작용을 간과한 것”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1993년부터 2011년까지 탄자니아 북부에서 진행된 ‘세렝게티 치타 프로젝트’에 따르면, 치타의 사냥 성공률은 41%에 불과하다. 대체로 사냥에 실패하는 것이다.

하지만 치타는 비교적 여유롭다. 실패하더라도 바로 굶어 죽지 않고 다시 사냥에 도전할 수 있다. 반면 치타와의 경주에서 진 가젤은 죽는다. 빠른 가젤만이 살아남기 때문에 가젤의 몸은 승리를 위해 자연 선택에 의해 더 미세하게 조정된다. 즉, 치타를 피하기 위한 가젤 유전자가 가젤을 잡기 위한 치타 유전자보다 더 강한 선택 압력(외부의 힘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택하는 진화의 방향)을 받는 것이다. 결국 가젤은 후대로 갈수록 더 빨라지고, 이 때문에 치타도 빨라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서로 살아남기 위해 ‘비효율적 군비 경쟁’을 무한히 벌인다.

자연의 성(性) 선택은 비생산적인 경우가 일상다반사다. 저자는 작은 물고기 구피의 사례를 소개한다. 수컷은 암컷을 유혹하는 밝은 색과 커다란 지느러미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다. 하지만 매력적인 수컷은 눈에 띄어 살아남을 확률이 낮다. 달리 말하면 암컷 구피는 생존율이 낮은, 신체적 품질이 낮은 수컷에 끌리는 셈이다.

북아메리카에 서식하는 물고기 소드테일도 비슷하다. 수컷은 꼬리지느러미 아랫부분이 길게 늘어지면서 검 모양으로 뾰족해지는 특성이 있다. 암컷은 더 긴 검을 가진 수컷을 선호한다. 하지만 이 긴 검은 암컷을 유인하는 것 외에는 수컷 소드테일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헤엄을 칠 때도 걸림돌이 돼 느려진다. 암컷 소드테일은 비효율적으로 헤엄치고, 더 먹힐 확률이 높은 수컷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진화는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가장 적절한 사례는 인간이다. 인류 역사에서 먹을 것이 귀했기 때문에 벌집 꿀 같은 고열량 먹거리를 발견했을 때 재빨리 먹어치우는 것이 이득이었다. 그러나 이런 음식을 실컷 먹도록 진화한 신체의 자연적 성향은 오늘날 문제가 된다. 단 음식의 과다 섭취는 당뇨병, 심장병 등 여러 건강 문제를 유발한다. 과거에 적응적이고 진화적이었던 행동이 새로운 조건에서는 부적응적인 행동이 되는 상황. 인간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피해야 하는 종이 됐다.

원제는 ‘Flaws of Nature(자연의 결함)’. 저자는 이 책이 “진화의 함정, 커다란 장벽, 사각지대, 절충안, 타협, 실패작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진화가 반드시 ‘최선’을 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가 닳으면 굶주리는 코끼리, 노예를 만드는 개미, 암컷의 생식기를 훼손하는 거미, 숙주를 자살로 내모는 병원체…. ‘자연스러운 것’이 곧 ‘좋은 것’으로 흔히 여겨지는 오류에 대해서도 우리는 의문을 품어야 한다. 그리고 되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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