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쪽같죠? 책이 아니라 인테리어입니다

장근욱 기자 2024. 5. 18.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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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종이책 안 읽는 시대
모형 책의 서글픈 호황

지난 16일 인천국제공항 면세점 구역. 다음 날 개점을 앞둔 스타벅스에서 인테리어 공사가 한창이다. 커피 마시며 책을 읽다 사갈 수도 있는 ‘카페 겸 서점’.

사람들이 철제 사다리를 들고 움직이며 천장 아래 2~3m 높이 책장 선반에 책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책등만 보이게 여러 권을 겹쳐두기도 하고, 한 권씩 앞표지가 보이도록 세워두기도 했다. 이런 책이 약 1500권. 그런데 왜 사람 손이 닿지 않는 높은 선반에 책을 올려두는 것일까.

지난 16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스타벅스 벽면 책장 위쪽에 장식용 책을 설치하는 모습. 손이 닿지 않는 높이 2m 이상 선반에 있는 약 1500권은 모두 모형이다./장근욱 기자

이 책들은 모두 ‘장식용 가짜 책’이다. 겉표지만 있고 내부는 텅 비어 있다. 표지는 실제 책처럼 종이로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플라스틱 등 다른 재료를 사용하기도 한다. 내부 페이지는 종이 상자나 스티로폼으로 공간만 채운다. 이 때문에 무게는 100g 미만으로 가볍다. 실제 책의 5분의 1 수준. 가격도 그만큼 저렴하다. 대신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실제 책보다 크게 만든다.

책을 인테리어용으로 쓰는 곳은 최근 늘어나고 있다. 지난 1월 경기도 수원의 한 쇼핑몰에 들어선 ‘별마당 도서관’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높이가 22m인 대형 책장을 책 5만권으로 가득 채웠다.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서는 사진 찍기 좋은 명소로 꼽힌다.

지난 1월 경기 수원의 쇼핑몰에 들어선 '별마당 도서관'. 바닥부터 천장까지 높이 22m 책장이 책으로 가득 차있다. /신세계프라퍼티

책이 쏟아지거나 책장이 무너질 위험은 없을까?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시길. 사람 손이 닿지 않는 2만권은 가짜 책이다. 이들은 가벼워서 책장이 지탱할 무게 부담이 적다. 책이 떨어지지 않도록 책장과 접착제로 붙이고 불에 잘 타지 않도록 방염 처리도 한다고. 작년 말 리모델링한 한국은행 도서관도 같은 방식이다. 책꽂이 윗부분이 가짜 책이다. 가짜 책 인테리어는 카페와 편의점 등으로도 영토를 확장 중이다.

가짜 책을 따로 만들면서까지 책으로 포장하는 이유가 있다. 책이 진열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성 때문이다. 한 인터넷 쇼핑몰에서는 가짜 책을 ‘인테리어 치트키(cheat-key·효과적인 비법)’로 꼽기도 한다. 이달 초 수원 별마당 도서관을 방문했다는 직장인 민아영(34)씨는 “처음 보고 ‘와’ 소리가 나올 정도로 마법 같았다”며 “저 많은 책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른다는 것도 재밌었다”고 했다.

수원 별마당도서관 책장 윗부분에 모형 책을 설치하는 모습. /우진메이킹

별마당 도서관 등에 가짜 책을 납품하고 설치한 황선영 우진메이킹 대표는 “책이 있는 공간은 휑하지 않고 친숙하면서 편안하다”고 말한다. 2006년 사업 시작 당시에는 가짜 책의 용도가 모델하우스나 방송 촬영용 소품 정도였다. “이제는 인테리어 사업이 됐어요. 10년 전보다 사업 규모가 3~4배로 커졌습니다.”

단순 장식용이 아니라 기능성을 지닌 가짜 책도 개발된다. 테이스트픽 대표 차주경(43)씨는 3년 전 직장을 그만두고 ‘기능성’ 가짜 책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가짜 책 안쪽으로 지저분한 전선과 케이블들을 숨길 수 있도록 했다. 책 재질은 불에 강한 난연성 플라스틱.

차씨는 “예상보다 소비자 반응이 좋아 책에 어울리는 다른 인테리어 상품도 팔기로 했다”고 했다. 소비자 요구에 따라 책 디자인도 10종 이상으로 늘렸다. 잡화점 프랜차이즈 다이소는 작년 11월 처음으로 ‘책 모양 수납함’을 출시했다.

플라스틱 모형 책 안쪽으로 멀티탭 등을 모아 전선이 지저분하지 않게 정리한 모습. /테이스트픽

어떤 디자인이 가장 인기 있을까. 정답은 ‘심플한 디자인’이다.

‘전선 정리 책’을 만드는 차씨는 “온라인 쇼핑몰 접속 데이터를 보면 처음엔 고풍스럽거나 화려한 책을 오래 살펴보던 소비자들이 결국 구매할 때는 어느 장소에나 어울리는 무난한 디자인을 고르더라”며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은 ‘흰색’”이라고 했다.

‘책 인테리어’ 사업가인 황씨는 “창의적인 공간을 꾸미고 싶다던 고객도 다채로운 색이 ‘그러데이션(색이 조금씩 변하는 효과)’을 이루는 책장을 보여주면 손사래 치곤 한다”며 “일반적으로 무채색에 글씨만 쓰인 표지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서울공예박물관이 소장 중인 이택균 화원의 '책가도 병풍'. 1871년 이후의 1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서울시 측은 "조선후기에 상품경제가 발달하고 소비문화가 확산되던 풍조를 시각적으로 잘 대변해 준다"고 설명했다. /서울공예박물관

한국인이 ‘책 인테리어’를 사랑한 역사에도 유서가 있다. 책장 선반에 책들을 올려둔 모습을 그린 그림인 ‘책가도’는 조선에서 책이 보급되기 시작한 18~20세기에 인기를 끌었다. 당시 비싼 책을 사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림으로라도 ‘책이 있는 풍경’을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책이 흔해진 지금은 책을 읽는 사람이 드물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3 독서 실태 조사’에서 1년에 종이책을 한 권이라도 읽은 성인은 불과 32.3%로 나타났다. 역대 최저치. 별마당 도서관 방문객 민씨는 “책을 읽기보다는 사진을 찍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내면은 좀처럼 들여다보지 않고 겉모습을 꾸미느라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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