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평중의 知天下 4] 웃고 즐기는 순간이 모여 충만한 삶

윤평중·한신대 철학과 명예교수 2024. 5. 18.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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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일러스트=유현호

콩국수의 계절이 왔다. 개인적으론 봄꽃이 피면 콩국수 시즌 시작이고 가을 찬 바람 불어야 시즌 끝일 정도로 ‘콩국수 중독자’다. 전에 살던 동네엔 10년 단골 콩국수 집이 있었다. 콩죽에 가까운 밀도와 고소함이 압권이었다. 평범한 가게였지만 내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식당’이었다. 교사 출신 사장님은 국산 콩과 소금만으로 매일 아침 만드는 콩물에 대한 장인적 자부심이 큰 분이었다.

유명세를 날리던 먹거리 탐사 방송에 어느 날 이 식당이 나왔다. 처음엔 사장님 열정이 인정받았다고 좋아했는데 오랜 단골로선 중대 오판이었다. 가게 앞 장사진 때문에 들어갈 엄두도 못 낸 채 몇 년이 흘렀고 난 동네를 떠났다. 혼자만의 작은 즐거움이 사라져 버린 상실감이 컸다. 그 후엔 집에서 콩물 만드는 데 정진했고 얼추 비슷한 맛을 냈을 땐 뿌듯했다. 요즘은 가정용 두유 제조기가 시판돼 콩물 제조 노동의 번거로움이 대폭 줄었다.

직접 만들어 먹는 요구르트는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매일 아침의 의례다. 마시는 요구르트를 우유에 붓고 전자레인지로 데워 하루 이틀 발효시키면 진하고 순수한 농축 요구르트가 된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최적의 조합을 찾아 주위에 비법(?)을 전수했건만 별 호응이 없다. 요구르트가 검증된 건강 장수 식품인 터에 안타까운 일이다. 견과류와 과일을 보태면 훌륭한 아침 식사다. 세계 여러 호텔에서 맛본 어떤 요구르트보다 내 수제(手製) 요구르트가 낫다는 은밀한 자부심을 가꾸고 있다.

요새는 고구마에 빠졌다. 에어프라이어로 돌리면 기막힌 군고구마가 탄생한다. 고구마 크기에 따라 시간을 조절하면 이윽고 구수한 군고구마 내음이 온 집안에 진동한다. 커피 원두 볶는 향기 뺨친다. 김 모락모락 나는 황금빛 군고구마를 후후 불며 먹을 때마다 감탄한다.

범람하는 ‘먹방(먹는 방송)’은 상업적 이윤을 노린 저질 유행의 혐의를 받고 있다. 일차원적 식욕을 부풀려 식문화를 황폐화하고 대중의 입맛을 획일화한다. 폭식과 대식, 괴식(怪食)과 미식을 부추기는 선정적 ‘음식 포르노’가 눈길을 끌 때도 있다. 하지만 화려하게 꾸민 유행 식품의 생명력은 길지 않다. 자극적인 데다 때깔만 좋은 음식은 쉽게 질리고 몸에도 해롭다. 이와 달리 콩국수나 군고구마, 인공 첨가물 뺀 수제 요구르트는 과장 없는 정직한 맛이다.

담백한 음식이 몸에 좋은 것처럼 질박한 일상이야말로 삶의 근본이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극소수 영웅들의 드라마틱한 일회적 대(大)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반복된 일상이다. 삶에서 가장 빛나는 건 작은 일들을 꾸준히 해나가는 나날의 습관이다. 우리가 평생 먹는 밥에 질리지 않는 것은 밥이 무색무취하기 때문이다. ‘국민 과일’ 대접을 받는 사과도 색색의 열대 과일에 비하면 단순 소박한 맛이다. 그 덕분에 일 년 내내 사과를 물리지 않고 먹을 수 있게 된다. 평범한 사과가 ‘과일의 여왕’이 돼 물가를 흔드는 근본적 비밀은 그 일상성에 있다. 게다가 사과는 건강에도 좋다.

작년 가을 충주 단골 과수원 사장님한테서 놀라운 전화가 왔다. 한 해 사과 농사에서 단 한 알도 수확하지 못했고 동네 과수원 전체가 같은 형편이란다. 그러면서도 ‘하늘이 하시는 일이니 어쩔 수 없지유’라고 하신다. 일생 사과 농사에 헌신한 분의 비감(悲感)이 안타까웠다.

좋은 음식을 만나는 것은 행복의 근원이다. 비싸거나 화려하지 않아도 된다. 가까운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웃고 즐기는 순간이 모여 충만한 삶을 이룬다. 나날의 질박한 먹거리는 흔들리지 않는 삶의 기반이다. 소시민의 소박한 식탁이 왕후장상의 진수성찬 부럽지 않은 이유다. 삶에서 진정 찬란한 것은 작은 일상의 조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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