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탈 아픔 간직한 폐정미소…과거·현재 잇는 사유 공간으로 : 미술가 조덕현의 춘포 정미공장 프로젝트

2024. 5. 18.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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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년된 정미소서 개인전 조덕현 작가
단가 시인 손호연(1923~2003)을 형상화한 조덕현 작가의 작품. 전라북도 익산의 110년 된 춘포 도정공장에 설치..문소영 기자
단가 시인 손호연(1923~2003)과 그 딸 이승신 시인을 형상화한 조덕현 작가의 작품. 전북 익산의 춘포 도정공장 설치. 문소영 기자
드러난 나무 대들보에 식물 덩굴이 무성하게 얽혀있고 깨진 함석 지붕 사이로 햇빛이 스며드는 110년 된 춘포 도정공장(정미소). 전북 익산에 위치한 이곳에 한복을 입은 앳된 여인의 커다란 흑백사진이 걸려있다. 흰 치맛자락이 사진에서 튀어나와 바닥으로 길게 흘러, 여인이 환영과 현실 사이를 넘나드는 신비로운 느낌이다. 잘 보면 사진 같은 연필 그림에 교묘하게 흰 천을 이은 것으로, 미술가 조덕현(67·이화여대 명예교수)의 작품이다. 그는 옛 사진에 자신의 상상을 추가한 정교한 연필 그림과 설치 작업을 통해 역사와 허구를 섞는 작업으로 유명하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실존인물일까, 허구의 인물일까?

호소카와 전 총리 조부가 정미소 지어

여인은 실존인물인 손호연(1923~2003)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학교에서 한국어를 쓰지 못했기 때문에 문학적 재능을 일본 시(詩歌)로 피워내게 되었다. 특히 도쿄에 유학 가서 일본의 전통시 단가(和歌·와카)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이제는 일본어를 쓰는 게 부끄러운 일이 되었다. 매일 단가를 쓰던 손 시인은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과 절망을 느꼈다. 이때 일본 전통문학 학자로부터 “단가의 뿌리는 백제이니 계속 쓰라”라는 격려를 받았다. 이에 용기를 얻은 손 시인은 한평생 2천여 수 이상의 단가를 남기게 되었다. 2005년에 고이즈미 준이치로(82) 당시 일본 총리가 한일정상회담에서 손 시인의 단가를 읊으며 양국 평화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110년 역사를 간직한 춘포 도정공장 내부. [사진 조덕현]

춘포 도정공장의 고즈넉한 뜰에 우거진 메타세콰이어 나무 아래에는 손 시인의 단가를 새긴 투명 모뉴먼트 여러 개가 서 있다. 일본어 원본 대신 한글 번역본이 새겨져 있는데, 손 시인의 장녀로서 그의 삶과 작품을 적극 알려온 이승신 시인이 번역한 것이다. 이 모뉴먼트 또한 조덕현 작가의 작업이다. “샛바람 막으려 걸어둔 보라색 치마 주름 사이로 달빛은 비치고” “치마저고리 곱게 단장하고 나는 맡는다 백제가 남긴 그 옛 향기를” 같은 손 시인의 단가들이 햇빛과 주변 수풀 그림자에 따라 시시각각 흐려지기도 하고 선명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손 시인의 삶은 거대 역사와 개인사가 충돌하며 빚어지는 수많은 희비극과 아이러니의 단적인 예다. 바로 그것이 3년째 춘포 도정공장에서 독특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조덕현 작가의 이번 ‘시즌3’ 전시 ‘110 and: 지평’의 주제이기도 하다. 춘포 도정공장 자체가 역사적 아이러니의 공간이다. 익산역에서 차로 20여 분 거리에 있는 이곳은 일제강점기 춘포 일대의 대지주였던 호소카와 모리다치가 세운 것으로 그는 바로 전 일본 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86)의 조부였다. 익산의 쌀을 도정해서 일본에 팔러 보낸 곳이니 교과서에 나오는 “일제의 쌀 수탈”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한 시민이 사들여 문화공간으로 활용

110년 역사를 간직한 춘포 도정공장 외관과 뜰. [사진 조덕현]

그런데 얄궂게도 공장의 뜰과 건물은 고즈넉하고 운치 있다. 진회색 지붕과 흰 벽과 암적색 문이 세련된 색채 조화를 이루고 목조건물의 형태가 아름답다. 이 곳은 해방 후에도 도정공장으로 쓰이다가 90년대 말부터 방치되었다. 몇 년 전 주택단지 재개발을 위해 헐릴 처지였던 것을, 이곳의 미학적·역사적(어두운 역사라도) 가치를 알아본 익산 시민 서문근 대표가 사들여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마침 사라져가는 마을과 유산들을 작품에 담기 위해 여러 지방을 탐사 중이던 조덕현 작가가 우연히 이곳에 도달해 독특한 공간에 매혹된 후 3년째 미술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와 허구를 결합해 신선한 시각으로 인간사를 바라보게 하는 작업을 해온 조 작가는 손 시인이 용기를 얻었던 “단가의 뿌리는 일본에 건너간 백제인들”이라는 학설에 착안해서 ‘춘포 도정공장이 백제 유물의 발굴지’라는 상상을 펼쳐 전시를 만들었다.마침 익산은 한때 백제의 수도였거나 제2수도였다는 설이 있을 만큼 백제 문화가 꽃핀 곳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듯하다. 그래서 작가는 공장 뒷뜰을 마치 백제 보살상의 발굴현장처럼 꾸몄다. 공장 내부의 한 방도 고고미술 탐사 현장으로 탈바꿈시켜 도정된 쌀이 쌓이던 구덩이를 발굴을 위한 구덩이처럼 보이게 만들고 신비한 노란 빛을 내도록 했다. 또한 허구의 유물들을 늘어놓았다.

조덕현 개인전 '110 and: Horizon 지평' 전북 익산의 춘포 도정공장 문소영 기자
가장 시각적으로 강렬한 것은 공장의 어두운 공간에 4개의 하얀 백제 관음보살상이 천정으로부터 거꾸로 매달려 있는 작품이다. 언뜻 불경스러운 작품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보살상 아래에 펼쳐진 수조를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이 수조는 보살상을 선명하게 반영하는데 그 반영에서 보살상들은 바로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광대무변의 검은 우주 공간을 유영하며 무한한 자비를 펼치는 것으로 보인다.

서로 머리를 맞댄 상하 대칭의 보살상과 그 반영은 지구의 두 대척점을 상징하기도 한다. 작가는 정확히 30년 전 한국의 대척점인 브라질의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여하러 가서 그곳에서 60대 일본인 이민자인 다구치 씨를 만났다. 다구치 씨는 그때까지도 잊지 못한 소중한 누나의 추억을 작가에게 들려주었다. 누나는 태평양전쟁 때 징집된 연인과 이어지지 못한 괴로움으로 젊은 나이에 죽었으며 당시 어렸던 다구치 씨는 누나가 숨을 거둔 시각에 슬픔에 못 이겨 괘종시계 바늘을 뜯어버렸다고 한다. 그 슬픔에 공감하는 동시에 또한 작가는 일제에 강제징집되어 미군에 전범으로 처형된 조선 청년도 떠올랐다고 한다. 그와 관련한 작품도 이번 전시에 나와있다.

춘포 도정공장에서 조덕현 작가. [사진 작가 제공]
결국 이 전시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간 작은 이들의 상처를 보듬으며 “지구를 뚫고 오가거나 백제시대로 오르내리는 등 시공간을 뛰어 넘는 상상으로 관람객의 ‘지평’을 열게 하고 싶은 것”이라고 작가는 설명했다. “멀리 백제로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아픔'이 깊이 새겨진 장소에서 상실의 마음을 사랑의 노래로 바꾸어 부르는 것입니다. 너무 커서 언뜻 진부한 듯한 주제이지만 날선 대립과 증오로 점점 파국을 향하고 있는 이 시대 보편적 인류사의 흐름에서 필히 되새겨야 할 언어가 아닌가 싶습니다.”

익산=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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