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선데이] F의 세상에서 T가 생존하려면

2024. 5. 18.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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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세진 동국대 교수
예전엔 잘 모르는 사람의 성격 유형을 빨리 파악하려는 질문이 “혈액형이 뭐에요?”였다. 혈액형 각각에 연결되는 성격적 특징이 있다는 속설은 꽤나 인기가 있어서, ‘이 혈액형은 이러하다’를 넘어 ‘나는 특정 혈액형이랑은 안 맞는다’라는 말들도 하곤 했다. 심지어 혈액형이 들어간 영화 제목도 있었다. 영문 위키피디아에는 ‘혈액형 성격 이론’이라는 항목이 있고 ‘일본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유사과학적 믿음’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유사과학(pseudoscience)은 과학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가짜과학을 뜻한다.

「 유사과학이지만 MBTI 인기
당초 일자리 선택 위해 고안돼
F 유형이 전체의 2/3 가량 차지
소수 T 유형은 F의 감성 배워야

ON 선데이
이제 MBTI가 혈액형을 대신하고 있다. MBTI는 심리학자 칼 융의 저서 ‘심리유형론’에 영감을 받아 이자벨 마이어스와 그 어머니 캐더린 브리그스가 고안한, 성격 유형을 나타내는 지표다. 영문 위키피디아에는 MBTI 역시 유사과학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에서 여성의 노동시장 진입이 급증한 가운데 여성이 자신에게 ‘더 걸맞고 효과적인’ 일자리를 알아낼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편람으로 만들어져 출발한 MBTI는, ETS라는 기관의 지원으로 1962년 매뉴얼이 출판되면서 산업계와 교육계에 크게 확산되었다고 한다. ETS는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영어 시험인 토익, 토플, 미국 대학원 입학시험으로 유명한 GRE 등을 주관하는 회사다.

필자도 아이들 성화에 몇 년 전 무료 질문지에 응답한 결과, 스스로 인식하는 바와 다르지 않은 유형 판정을 받았다. 유형이 16가지나 되지만 그렇게 조합이 나오는 성격의 범주는 4개뿐이어서, 잘 외워뒀다가 처음 만나는 젊은이와 대화를 해야 하는 상황이면 종종 잘 이용했다. 그러다가 이렇게 만난 사람들에 쏠림이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MBTI를 구성하는 한 범주가 이성적(T)인가 감성적(F)인가를 나누는 것인데, 아무래도 F가 많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사실 경제학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거의 다 T여서 “우리가 그렇지 뭐”하고 웃어넘기곤 했는데, 익숙한 집단을 몇 발짝만 벗어나면 F가 압도적인 것 같았다.

인터넷을 통해 ‘MBTI 인구’를 검색해 보았는데, 한 사설업체에서 2021년도에 집계한 결과 16개 유형 중 상위를 차지한 8개에 T가 들어간 유형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 결과에서 F는 67.3%를 차지한다고 나왔다. 하지만 조사업체가 한 사람이 여러 번 유형 검사를 한 경우를 걸러내지 못한다고 밝혔기 때문에 결과를 온전히 신뢰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MBTI에 신뢰를 갖는다고 얘기한 적 있는 한 회사의 대표에게 직원들의 T와 F 분포를 알 수 있을지 물었다. 그 대표가 알려준 집계 결과로는 F가 65%였다. 이 회사는 IT회사이기도 하고 금융회사이기도 한 인터넷전문은행인데도 직원은 감성적 유형이 훨씬 많은 것이다.

며칠 전 중학생 둘째가 국어 시간에 배운 내용이라며 이성적 설득과 감성적 설득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감성적 설득의 예로 접한 교과서 내용은 김하나 작가의 ‘세바시’ 강연이었다. 프로야구의 양의지 포수가 경기 중 팀의 위기 상황에서 이현승 투수에게 상황을 상기시키고 힘내라고 하는 대신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해서 긴장을 풀어주고 결국 경기에서 이겼다는 일화였다. 아이는 교내 대회에 나가서 정말 떨리는 순간 그 일화를 떠올리며 긴장을 이겨낼 수 있었다며, 설득은 감성적이어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어느 면으로 봐도 T인 아이인데 말이다. 하물며 F인 사람에게는 감성적 설득이 얼마나 더 힘이 있을 것인가.

경제학자로서 이성적, 합리적 논리 전개와 이를 바탕으로 한 설득에만 골몰해 온 필자로서는 감성적 설득의 힘에 무력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느낌이 시대의 변곡점에 대한 깨달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과학과 이성이 세상을 다 잡은 것 같았던 계몽주의 시대에 대한 반발로 낭만주의가 분출했듯이, 치밀한 교육과 정책으로 현대 세계사에 유례없는 발전을 일궈낸 한국에 바야흐로 감성의 시대가 오는 것은 아닐까하는 깨달음 말이다.

‘F’가 다수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소수자인 ‘T’들은 일부러 배워서라도 감수성을 장착해야 한다. 누구라도 제대로 설득하려면 맞는 말, 옳은 말만 해서는 안 된다. 원래 F가 많았는지, F인 것이 T보다 더 당당한 사람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시대의 기세는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민세진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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