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살까지 뛰라는 큰딸…‘그러면 죽어’ 웃어넘겼죠”

심진용 기자 2024. 5. 18.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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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배구 ‘대한항공 통합 4연패’ 주역 한선수
남자 프로배구 4시즌 연속 통합우승을 이룬 대한항공의 주장 한선수가 최근 스포츠경향과 인터뷰에 앞서 다음 시즌 ‘통합 5연패’를 이루겠다는 포부를 드러내며 손가락 다섯개를 펼쳐 보이고 있다. 조태형 기자


한 곳서 20년 생활
고민 없지 않았지만
내 선택은 대한항공


벤치워머는 싫어
경쟁력 없다 느끼면
미련없이 떠날 것


너무 오랜 국대 생활
AG 금 아쉽지만
후배들이 잘해주겠죠


시즌 마지막 날까지 ‘경우의 수’를 따져야 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최근 몇 년간 없던 경험이었다. 대한항공 세터 한선수(39)는 지난 3월 16일 우리카드와 삼성생명의 V리그 정규시즌 최종전을 숙소에서 지켜봤다. 우리카드가 이기기만 하면 우승 확정, 대한항공이 기적 같은 정규시즌 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우리카드가 져야 했다. 운이 따랐다. 우리카드는 풀세트 접전 끝에 패했다. 대한항공이 승점 1점 차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했다. OK금융그룹을 만난 챔피언결정전은 시리즈 전적 3-0으로 끝냈다. 대한항공은 전례 없던 통합 4연패의 주인공이 됐다.

■“시즌 점수는 50점…다행히 우승했다”

마지막 날까지 남의 경기를 지켜봐야 했던 기억이 유쾌할 수는 없었다. 스포츠경향 창간 19주년을 맞아, 지난 9일 서울 용산역 한 커피숍에서 만난 한선수는 “안타까웠다. 돌이켜 보면 이길 수 있는데 못 이긴 경기가 너무 많았다”고 했다. 시즌 전체 점수를 매겨달라는 말에는 “50점”이라고 했다. ‘그래도 우승을 했는데 점수가 너무 박하지 않느냐’는 말에는 “다행히 우승한 것”이라고 받았다.

어수선한 시즌이었다. 한선수는 “부상자가 많았고, 주축들도 많이 빠졌다. 외국인선수들도 아팠다”면서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시즌을 치르다 보면 힘든 순간은 언제든 온다. 지난해까지 통합 3연패를 이루던 때도 고비는 늘 있었다. 그런데 이번 시즌에는 유독 고비를 잘 이겨내지 못했다. 한선수는 “어려울 때마다 최대한 점수를 적게 주면서 버텨냈는데, 이번 시즌에는 그런 힘이 부족해서 무너지는 경기가 많았다”며 “선수들이 바깥 눈치를 보고, 주눅이 들고, 자기 배구를 잘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도 대한항공은 대한항공이다. 챔피언결정전 스윕으로 저력을 과시했다. 한선수는 “챔프전 들어서야 선수들이 자신을 믿고, 자기 배구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돌이켰다.

최근 한선수는 대한항공과 3년 재계약을 했다. 만 42세까지다. 2007~2008시즌 대한항공에서 프로 데뷔했으니, 계약 기간을 다 채우면 한 팀에서만 20년 이상 뛰는 셈이다. 함께한 역사가 워낙 길고 상징성도 크다 보니 모두가 ‘당연히 대한항공’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본인은 고민했다. 한선수는 “시즌을 치르면서 ‘내가 팀에 필요한가’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고 했다.한선수의 선택은 결국 대한항공이었다. 그는 “대한항공이 저를 만들었기 때문에 대한항공과 항상 가장 먼저 이야기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며 “고민이 없지는 않았지만, (구단주) 조원태 회장님이 제가 필요하다고 말씀해주셨고, 그 믿음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딸은 쉰 살까지 뛰라지만 “구경만 하다 은퇴하긴 싫어”

한선수의 현역 생활이 언제까지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본인도 모른다. 50세까지 뛰라는 큰딸의 말에 “아빠 그러면 죽어”라고 웃으며 답한 것 말고 구체적으로 시점을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다만 원칙은 있다. 프로 선수로 경쟁력이 없다고 느껴진다면 현역 연장에 미련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선수는 “코트 바깥 웜업존에서 구경만 하다가 은퇴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이날 한선수는 일본 애니메이션 ‘하이큐’ 극장판 시사회에 초청을 받아 용산역에 왔다. 고교 배구가 배경인 인기작이다. 주인공 2명 중 1명이 한선수와 같은 세터다. 중학 시절만 해도 독선적이던 천재 세터가 고교 무대에서 동료들과 함께하며 팀 전체를 살릴 줄 아는 세터로 성장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만화 속 주인공에게 한선수 자신이 겹친다. 그도 한때는 비슷했다. 한선수는 “나뿐 아니라 세터라면 한 번씩은 다 그런 시절이 있었을 것”이라며 “토스가 잘 올라갔다는 걸 세터는 안다. 그런 토스가 점수로 이어지지 않으면 공격수가 모자라서 그렇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이며 변했다. 한선수는 “어렸을 때는 자만해서 그런 생각을 했다”며 “나를 위한 토스를 하다가, 점점 시야도 넓어지고 공격수들 하나하나를 위한 토스를 하는 쪽으로 바뀌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만 지금도 용납할 수 없는 건 있다. 공격수라면 언제 어느 때든 최선을 다해 공을 때려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AG ‘금’ 아쉽지만, 이제는 후배들이 역할해줘야

어느덧 선수 생활 황혼기, 한선수는 그간 못해 본 것 없이 다 이뤘다. 차고 넘치게 우승을 했고, 지난해는 역대 최고령에 남자부 세터로는 역대 최초로 정규시즌 최우수선수상(MVP)까지 받았다. ‘국내 최고 세터’라는 칭호가 붙은 지도 이미 오래다. 그런 한선수가 딱 하나 못 해본 게 아시안게임 금메달이다.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가 전부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대회 때 결승까지 올랐지만 이란의 벽에 막혔다.

지난해 항저우 대회가 사실상 마지막 금메달 기회, 그러나 대표팀은 참사에 가까운 결과를 남겼다. 조별리그에서 인도에 충격적으로 패했고, 12강 토너먼트에서 파키스탄에 ‘셧 아웃’ 패배를 당했다.

한선수는 유소년 배구부터 전체적으로 다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은 솔직히 어른들, 지도자들을 위한 배구 아니냐”며 “유소년 때부터 선수들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항저우 대회 때 파키스탄을 이끌고 대표팀을 격파했던 브라질 출신 이사나예 라미레스 감독이 최근 대표팀 새 사령탑으로 부임한 데 대해서는 일단 긍정적이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아닐지라도, 선수들이 지금까지와 다른 배구를 접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은 기회가 될 거라는 이야기다.

한선수는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대표팀 은퇴 의사를 밝혔다. 그는 “제가 정말 필요하다면 언제든 들어갈 생각은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이제는 물러나는 게 대표팀을 위해서도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아직도 뒤를 이을 세터가 잘 안 보인다’는 말에 그는 “대표팀에 제가 너무 오래 있어서 그랬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며 “가능성 있는 후배들이 없지 않다. 대표팀에서 경험 쌓고, 더 성장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심진용 기자 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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