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티떡 한 입에 작설차 한 모금…초파일에 즐겼던 조상들의 입맛

2024. 5. 18.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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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가 있는 제철 음식
예수의 탄생일인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는 케이크를 준비하고 칠면조 구이 등 각 민족 특유의 음식을 즐긴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에는 석가탄신일이 있지만 정작 우리는 이날 뭘 먹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우리 조상이 사월 초파일, 봄의 절식을 놓쳤을 리 없다. 오랜 불교국가였던 우리에게는 석가탄신일이 바로 축제의 날이었다. 음력 사월 초파일, 이날은 무엇을 먹고 즐겼을까?

조선시대에도 사월 초파일은 축제의 날

제철 미나리를 삶아 상투 모양으로 감고 속에 편육 등을 넣은 ‘미나리강회’. [사진 온지음]
조선시대에는 유독 먹고 마시는 풍류를 즐겼고, 이를 세시 풍속지를 통해 널리 사람들에게 알렸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1748~1807)의 『경도잡지』에는 사월 초파일의 풍속으로 “이날 손님을 초청하여 음식을 차릴 때 ‘느티떡’ ‘볶은 콩’ ‘삶은 미나리’ 등을 내놓는다. 이것을 부처 탄신일에 먹는 소찬이라고 한다”고 나온다. 김매순이 한양의 풍속을 기록한 『열양세시기』(1819)에는 “아이들은 등을 단 장대 밑에 자리를 깔고 느티떡(楡葉餻)과 간을 한 찐 콩(鹽蒸豆)을 먹는다”고 했다.

서유구(1764~1845)가 편찬한 『임원경제지』 『정조지』에도 등석(燈夕·석가탄신일) 절식으로 ‘느티떡(楡葉餠)’과 ‘삶은 콩(煮豆)’과 ‘삶은 미나리(烹芹)’를 소개한다. 무엇보다 그는 “유엽병방(楡葉餠方)”과 “자두방(煮豆方)”이라고 하여 만드는 방법까지 세세히 기록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석가탄신일에 벌어지는 축제는 국가가 나서서 관여한 큰 행사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에게 초파일의 폐습이 심해 연등을 금지하기를 고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현종 3년에는 초파일 음주를 한 뒤 싸움을 벌여 탄핵한 사대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5월이면 지리산 일대에선 첫 찻잎을 따고, 갓딴 찻잎으로 작설차를 만든다. [사진 온지음]
▶ 느티떡 혹은 상추떡, 그리고 작설차 느티나무는 익숙한데 느티떡은 아무래도 생소하다. 요즈음 집 주변 공원을 거닐다 보면 가장 많이 만나는 나무가 푸릇푸릇 새잎을 올려 풍성해진 느티나무다. 기운 왕성한 느티나무 새순을 따 멥쌀이나 찹쌀가루를 섞어 시루에 쪄서 만든 게 ‘느티떡’인데, 어떻게 시루떡에 새순을 넣을 생각을 했을까? 느티나무 잎 향기를 맡으면서 즐기려 한 풍류였을까? 아니면 떡을 찔 쌀이 부족하니 이를 조금이라도 보충하려 했음일까? 가난을 풍류로 덮으려 한 것일까? 어쨌든 곤고했던 우리 조상은 봄이 오면 이처럼 새순을 넣은 떡을 즐기면서 봄맞이를 했다.

요즘도 주변에 느티나무는 흔하지만 막상 그 잎을 따서 떡을 만들기는 어렵다. 이런 때는 익숙한 채소인 상추를 넣고 떡을 만들면 된다. 한말 이용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1924)에 “상추떡은 사월 초파일에 쌀가루에 연한 느티나무 잎을 섞어 해 먹는 느티떡과 함께 별미로 손꼽히는 떡”이라고 나온다. 그러니 조그만 손 시루를 준비해 쌀가루와 상추를 켜켜이 깔고 상추떡을 만들어 먹어보자.

한편, 5월은 지리산 일대에서 햇차를 따는 달이다. 초파일 불교 행사에 차를 공양하는 헌다(獻茶)가 빠질 리 없다. 차는 갈증을 풀어주고 심신을 청정케 한다. 신라 흥덕왕 2년(828)에 김대렴이 중국 황제로부터 받아온 차 씨앗을 왕명으로 지리산 기슭에 심게 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고 5월 25일은 ‘한국 차의 날’이기도 하다. 이때는 차나무 잎을 따서 만든 햇차인 작설차가 좋다. 시루에서 갓 쪄낸 상추떡에, 찻잎을 갓 따 만든 작설차 한 잔을 곁들이는 호사를 누려보자.

▶ 봄엔 미나리강회 봄엔 미나리가 제철이고, 초파일 절식으로 삶은 미나리가 등장하는 이유다. 이때는 미나리강회가 제격이다. 날 생선을 먹는 형태인 ‘회(膾)’는 일본 음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 음식에는 생선뿐 아니라 채소를 이용한 회 요리가 있다. 미나리강회나 파강회가 그것이다. 채소를 끓는 물에 아주 살짝 익혀서 상투 모양으로 도르르 감아 속에 편육이나 계란지단, 실백을 넣고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채소 회다.

특히 긴 겨울을 지나고 미나리가 갓 나올 때가 가장 맛있다. “처갓집 세배는 미나리강회 먹을 때나 간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설 지나야 나오는 미나리도 먹을 겸 느지막이 세배를 간다는 의미다.

생선회의 경우 생선의 신선도가 맛을 결정짓듯, 미나리강회도 채소가 가진 본연의 맛이 중요하다. 그 맛을 극대화하기 위해 아무 양념도 하지 않고 살짝 데쳤다가 초고추장에 찍어 먹기도 한다. 생선뿐 아니라 채소에서도 회의 참맛을 즐길 줄 알았던 예민한 미각을 가진 민족이 한민족이다.

▶ 등석(燈夕)절식으로 도미찜 추가 5월의 음식을 채소만으로 구성하기 아쉽다면 제철 생선인 도미를 활용한 도미찜을 추천한다. 이화여전 가사과 교수였던 방신영은 『조선요리제법』(1917)이라는 당시 장안의 베스트셀러였던 요리책을 쓴다. 이후 개정판에서 석가탄신일 절식으로 느티떡과 화채, 화전에 이어 도미찜까지 소개한다.

도미찜은 간단히 말하면 도미에 갖은 고명을 얹고 양념하여 익힌 음식으로 심지어 ‘승기악탕(勝妓樂湯)’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초기 오랑캐를 방어하기 위해 의주로 갔던 허종(1434~1494)이 그곳 사람들의 잔칫상에 올라온 도미찜을 보고 그 맛이 기생(妓)과 악(樂)보다 좋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도미찜은 왕실 잔치 기록인 『진연의궤(進宴儀軌)』에 자주 등장하며 반가에서도 많이 먹었다. 만드는 법은 칼집 내어 통째로 지져낸 도미에 양념한 쇠고기, 미나리초대, 표고와 황백지단, 석이 고명 등을 색색이 얹은 다음 간 맞춘 육수를 붓고 끓여 내는 것이다.

그러나 각 반가에서는 그들만의 도미찜을 만들었다. 특히 경상남도 지수면 허씨 댁의 내림 음식인 도미찜은 좀 색다르다. 도미 뱃속에 온갖 양념의 쇠고기와 해산물 등을 넣고 짚으로 묶은 다음 쪄내는 방식으로 만든다. 진주 허씨 댁 반가의 내림 음식인 도미찜은 전통의 현대화를 추구하는 방식으로 변신을 거듭한다. 그렇다. 전통 시절 음식도 지금 화려하게 진화 중이다.

정혜경 호서대 식품영양학과 명예교수. 호서대학교 식품영양학과 명예교수이자 고려대 생활과학과 객원교수. 한국의 밥과 채소, 고기와 장, 전통주 문화에 관한 연구와 고조리서, 종가음식 등 다방면으로 음식연구를 해오고 있다. 현재 ‘온지음’ 맛공방 자문위원이기도 하며 『통일식당 개성밥상』 등 40여 권의 저서를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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