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국 이어 EU도 ‘피벗’…“한은, 미국만 기다려선 안 돼”
주요국 잇단 금리 인하
스웨덴 중앙은행이 8일 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2016년 2월 이후 8년 3개월 만이다. 앞서 스위스는 3월 유럽 주요국 중 처음으로 금리 인하의 스타트를 끊었다. 스위스와 스웨덴은 미국 달러화지수(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의 평균가치)를 산출하는 주요 6개국(유럽연합·영국·캐나다·일본·스위스·스웨덴)에 속해 글로벌 통화정책에 미치는 영향이 큰 국가다. 유럽중앙은행(ECB)과 영국도 이르면 다음 달 금리 인하를 시사하고 있다.
금리 인하 랠리는 사실 신흥국이 먼저 시작했다. 칠레는 2월과 4월 두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연 8.25%에서 연 6.5%로 1.75%포인트 인하했다. 체코는 올해 들어 기준금리를 3회 연속 인하, 1.75%포인트 낮췄고 헝가리는 연 10.75%에서 연 7.75%로 3%포인트 내렸다. 선진국은 물론 자본 유출 위험성이 높은 신흥국까지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과감하게 피벗에 나서는 것은 이례적인 현상이다.
그만큼 미국을 제외한 타 국가들의 경기 침체 골이 깊다는 분석이다. 허재환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미국은 지난 1분기 3%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데 반해 유로존은 0.4%, 영국은 0.6%, 독일은 -0.2%의 부진을 겪고 있다”며 “미국의 금리 인하 시점이 지연되면서 통화정책의 각자도생 분위기가 확산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금리를 더 유지하다가는 경기를 되살릴 수 있는 타이밍을 놓칠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한 것이다.
실제 올해 들어 기준금리를 내린 칠레·헝가리의 경우 외환시장이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칠레·헝가리의 통화가치는 연초 이후 하락률이 3% 정도에 그쳤다. 멕시코 통화가치는 금리 인하 후 도리어 상승했다. 미국과의 금리 차가 더 커진 영향보다는 금리 인하로 인한 내수 회복이나 경제 성장 기대감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여기에는 미국의 통화정책이 신뢰를 잃은 측면도 작용하고 있다. 연초만 해도 금리 인하를 시사했던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최근에는 금리 인하까지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며 말을 바꿨다. 연준이 수시로 말을 바꾸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연준의 신뢰성에 금이 간 것이다.
미국은 여전히 금리 인하에 신중한 모습이다. 파월 연준 의장은 14일 클라스 노트 네덜란드중앙은행 총재와의 대담에서 “인플레이션 수치들이 기대보다 높았다”며 “우리는 더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022년 6월의 전년 대비 9%를 정점으로 3%대로 점차 안정되고 있지만, 연준의 목표치인 2%보다는 아직 높은 수준이다. 시장에서는 연준이 9월 이후 금리 인하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이날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에 따르면 7월과 9월 금리 인하 시작 가능성을 각각 25.4%, 61.2%로 예상했다.
한은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시장에서는 당장 다음 주인 23일 예정된 금통위에서는 금리를 동결(현행 연 3.5%)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지만, 이르면 하반기 첫 금통위가 열리는 7월 인하에 나설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2일 “원점이란 표현을 하기 그렇지만, 4월 (금통위) 때와 상황이 바뀌어서 (통화정책 방향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각에선 신흥국처럼 진작 금리를 내렸어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고금리 장기화로 내수 경기 침체가 심화하고 있고, 자영업자를 비롯한 중·소상공인의 폐업이 늘고 있어서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위기가 지속될 경우 금융 불안이 더 커질 우려도 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한은은 고금리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선제적으로 금리 인하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기준금리를 1%포인트 인상하면 민간소비는 3분기 이후 최대 0.7%포인트 감소하고, 그 영향은 금리 인상 후 9분기까지 나타난다. 이에 따라 지난해 하반기 이후 수출 회복세에도 내수 회복의 제약 요인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영익 서강대 교수는 “변수는 물가인데 4분기 물가는 2% 초반에 근접할 것으로 예상한다”며 “내수 회복을 위해 선제적인 차원에서 통화정책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글로벌 금융시장이 안정됐다고는 하지만 미국보다 먼저 금리를 내릴 경우 외환시장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걸림돌이다. 한국은 수출 중심의 경제 구조 영향으로 지난달 중동 사태가 터졌을 때도 달러당 원화가치가 급락(환율상승)했다. 중동 지역 불안에 따른 국제유가 상승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설상가상 외환보유액도 줄고 있다. 4월 말 기준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4132억6000만 달러로, 한 달 새 8조원이 넘게 증발했다. 지난달 원화 가치가 1400원 아래로 내려가자 외환당국이 외환보유고를 풀어 방어에 나섰던 때문이다. 김정식 교수는 “지난달 환율 개입으로 약 60억 달러가 사용됐다고 보면, 두 번만 더 개입하면 외환보유고 4000억 달러 선이 무너질 수 있다. 환율의 안정 여부를 면밀히 주시하며 통화정책을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배현정 기자 bae.hyunj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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