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의 말과 글] [354] 두부와 평양냉면

백영옥 소설가 2024. 5. 17.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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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없이 처지고 열이 나는 날이 있다. 그런 날 해열제를 먹듯 보는 드라마가 ‘심야 식당’이다. 좁은 골목 안 식당 주인은 재료만 있으면 손님이 원하는 음식은 뭐든 다 만들어 준다. 어느 날 ‘비프 스트로가노프’라는 이름도 이상한 음식을 만들어달라는 손님이 나타난다. 볶은 쇠고기에 러시아식 사워(sour)크림을 넣은 요리인데, 맛을 묻는 주인에게 손님은 “그냥 그렇네요!”라고 답한다. 흥미로운 건 이 얘기를 들은 주인의 답변이다. “다음에 혹시 그냥 그런 비프 스트로가노프가 먹고 싶어지면 미리 연락 줘요.” 작가 입장에서 이런 캐릭터는 줄거리에 지장을 준다. 갈등이 일어나지 않아 이야기가 밋밋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식과 ‘먹방’ 시대에 가끔 된장찌개 속의 두부나 고기를 감싼 상추 한 장처럼 스스로 내세우지 않고 흩어진 것을 조용히 감싸는 것들을 생각한다.

젊었을 때는 ‘단짠’의 강렬한 맛에 이끌린다. 하지만 점점 함흥냉면보다 심심한 평양냉면이 그리워지는 날이 온다. 요리사 박찬일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평양냉면의 맛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전 국민이 다이어트 중인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는 먹방이다. 자극적인 먹방에 열광했다가 요즘 토끼나 거북이가 야금야금 딸기를 먹는 영상을 보며 스트레스를 푼다고 말한 후배가 있다. 고작 밤톨만 한 딸기 하나를 씹고, 씹는 존재를 보면 자신도 고민도 잘게 부서지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술 퍼마시고, 고래고래 노래 부르고, 울면서 친구에게 하소연하지 않아도 가능한 무해한 처방들. 나는 이것을 ‘두부적인 삶’이라 부른다. 두부적이란 건 일종의 태도다. 반찬 국물이 여기저기 튄 밥을 감싸는 잘 구운 김처럼 말이다. 도파민 범벅의 자극적인 것들의 시대에 내가 원하는 건 밥 옆에 가지런히 놓인 소금이나 김 가루 통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싱거우면 치고, 부족하면 넣으라는 태도. 맛이 그저 그런 음식을 내놓아도 심야 식당이 롱런한 이유를 알겠다. 때로 중요한 건 맛 이전의 이런 무심한 상냥함이다.

기고용 / 백영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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