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태기자의 책에 대한 책]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란 대가를 치러야 한다"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4. 5. 1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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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을 상상해보자.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따라서 저자의 심오한 의도가 한 권의 책에 담겼다는 믿음은 하나의 현대적 신화라고, 저자의 죽음을 통해 텍스트를 둘러싼 주체의 소실을 일으켜야만 독자가 탄생한다고 본다.

'독자의 탄생과 저자의 죽음'을 그가 거론한 건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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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소멸과 독자의 탄생을 예견했던 바르트의 명문

아주 오래전을 상상해보자. 한 500년쯤? 한 사람이 한 권의 책을 썼더라도 사람들은 대개 문맹이었다. 읽어줄 독자는 제한적이었다. 독자가 없으니 저자의 존재가 강조될 필요가 적었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책에는 반드시 저자 이름이 적혔다. 현대 독자들은 표지에 적힌 저자 이름을 보면서 저자의 의도를 상상한다. '이 소설의 결말은 뭘 의미할까?' '시집 한 귀퉁이 저 문장은 어떤 뜻일까?' 독자는 저자의 심연을 헤엄치면서 그 난제를 붙잡으려 한다.

롤랑 바르트는 의문을 제기한다. 책 '텍스트의 즐거움'에 실린 첫 번째 원고 '저자의 죽음'이 그것이다. 바르트는 이 유명한 명문에서 정의한다.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게 무슨 뜻일까.

바르트의 말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저자'란 일종의 현대적 발명품이다. 저자의 과거 위상은 현재와 달랐다. 책이란 '수많은 문화의 온상에서 온 인용들의 짜임'이며 저자는 '글 쓰는 사람'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다. 언어만이 독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해 세상을 창조하는 게 아니라 언어가 세상과 인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바르트는 독서의 진정한 '장소'는 저자의 자리가 아닌 독자의 자리라고 본다. 저자가 '근원과 '목소리'를 기재하는 자라면 텍스트가 힘을 지니는 진정한 장소는 바로 저자의 책상이 아니라 독자의 의자가 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작품'이란 단어를 쓰기를 주저하고, 대신 텍스트(text)라고 표현한다. '작품'이라고 하면 저자의 창조적 작업에 방점을 찍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텍스트는 저자와 거리를 둔 외딴 사물로서 자리한다.

그렇다면 책의 저자라는 존재는 대체 뭘까. 그에 따르면 저자는 '필사자'에 불과해야 한다. 저자는 다면체적인 세상에서 지식과 경험을 '받아쓰는 자'에 불과하다. 따라서 저자의 심오한 의도가 한 권의 책에 담겼다는 믿음은 하나의 현대적 신화라고, 저자의 죽음을 통해 텍스트를 둘러싼 주체의 소실을 일으켜야만 독자가 탄생한다고 본다. '독자의 탄생과 저자의 죽음'을 그가 거론한 건 이 때문이다.

김희영 한국외대 불문과 명예교수는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을 번역하면서 후기에 이렇게 썼다. "텍스트 안에서 저자의 자리를 배제하고 독자의 탄생을 예고하는 선지자적인 글이다."

주변을 돌아보자. 저자는 넘치는데 정작 책을 펼쳐 읽는 독자는 희귀해졌다. 모든 저자가 자신의 저자성(性)을 인정하라고 부르짖는다. 무대 위의 배우가 무대 앞의 관객보다 더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텍스트의 의도를 해석하는 시도는 욕심이 된다. 지식은 목격되어야 하는 것, 예술은 관람되다 증발하는 무엇이 돼버렸다.

질문 없는 독자들조차도 소멸해버린 시대, 저자의 죽음을 외쳤던 바르트의 말은 어쩌면 공허한 주장이 됐는지도 모른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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