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초점을 맞춰, 우리의 B컷은 힘이 세니까

한겨레 2024. 5. 17.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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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의 마음극장 #세머터리 정션
왓차 제공
동그란의 마음극장은?

어떤 영화는 좀처럼 끝나지 않습니다. 내 이야기가 왜 저기 들어 있나 싶은, 나보다 내 마음을 더 잘 드러낸 것 같은, 친구에게 꼭 보라고 얘기해주고 싶은 그런 장면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영화 칼럼니스트 ‘동그란’이 격주로 마음 속에서 재편집되는 대사, 기억의 영사기에서 반복되는 장면을 이야기합니다.

대작이나 문제작으로 불리는 작품만 보기에도 한 생이 모자랄 정도로 좋은 영화가 너무 많죠. 인생의 남은 시간이 하나도 두렵지 않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가끔은 가볍게 볼 수 있는 소품 같은 작품에 마음이 끌려요. 사람들이 B급이라 치부하는 ‘스낵무비’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특별한 감정을 일으키는 자기만의 명작이 되곤 하지요. 언젠가 친구가 ‘세 얼간이 영국판’이라며 꼭 한번 보라고 추천해준 영화 ‘세머터리 정션’(감독 럭키 제바이스·스테판 머천트, 2010)이 꼭 그런 작품이에요.

‘세머터리 정션’은 영국 버크셔주의 주도 레딩의 교차로 이름이래요. 이곳을 중심으로 세 젊은이가 각자 그리고 함께 자기 인생의 교차로를 지나는 모습을 풀어가지요. 기차역에서 역무원으로 일하는 스노크(잭 둘란), 공장에서 일하며 경찰서 유치장을 집처럼 드나드는 브루스(톰 휴즈), 공장을 그만두고 비절런트 보험회사에 갓 취직한 프레디(크리스찬 쿠크)가 주인공인데요. 그냥 이대로 살기에는 벌써 지겹고, 그렇다고 다른 출구를 찾아낼 식견도 없어 보기만 해도 딱한 청춘들이죠.

이 세 친구들이 왜 그렇게 의미 없는 사고를 치며 거리를 배회하는지, 어른의 눈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한편으론 너무나 공감이 되지요. 이 작은 마을은 너무도 낡고 지쳐 있어요. 막연히 떠나고 싶다고 생각은 해도 다른 세계를 본 적이 없는 청년들로선 막막하기만 하고요. 뚜렷한 계획을 세울 수가 없어서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생활은 발목을 붙잡고 세월은 서서히 힘을 빼놓겠지요. 그런 속에서도 세 청년의 삶은 갈 길을 가고 변화는 일어납니다. 우리가 세상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고 자조하게 되었다면 그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닫고 질문을 멈추기 때문일 거예요. 그래서 이 영화가 더 소중하게 생각되는지도 몰라요. 세상을 보는 눈에 초점이 잡히는 그 멋진 순간을 담아낸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제 인생 명작에서 빼놓을 수 없는 타이틀로 남아 있어요.

왓차 제공

프레디의 삶에 카메라를 든 줄리가 나타나는 순간이 있어요. 아버지처럼 공장에서 일하며 나이 들어가는 미래를 거부하고 보험회사에 취직한 프레디는 지점장 캔드릭(랄프 파인즈)을 롤모델 삼아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려 합니다. 하루는 출근하는데 회사 로비에 줄리가 카메라를 들고 다가왔지요. 우중충한 삶의 배경이 순식간에 화사하게 생기로 가득 차요. 어린 시절의 이웃이자 동창이던 줄리. 어느날 말없이 이사를 갔었는데 지금은 지점장의 딸이자 아버지의 직속 부하인 마이크와 약혼한 상태로 프레디 앞에 나타난 거죠. 카메라로 자기를 찍는 줄리를 만난 순간부터 프레디도 흐릿하던 세상을 향해 자신만의 시선으로 초점을 맞추는 법을 배우는 것 같았어요. 줄리가 보는 세계에 대한 관심이 프레디에게 새로운 눈을 만들어준 셈이죠.

보험회사의 판매왕 파티에서 지점장 캔드릭이 젊은이들에게 일일이 계획을 물어보는 장면이 인상적이에요. “5년 뒤의 계획이 뭐지?” 그 자리에는 줄리도 있었는데 지점장은 그녀에게는 질문을 건너뛰었어요. 프레디가 왜 줄리의 계획은 묻지 않냐고 하자 지점장은 이렇게 답하죠. “알고 있으니까. 결혼해서 내 손자를 키우고 있겠지.” 프레디가 줄리에게 정말이냐고 물었고 줄리는 다른 답을 해요. 사진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좀 하고 있다고 말했죠. 그때 옆에 있던 사람이 줄리의 약혼자인 마이크를 향해 놀리듯이 이렇게 말했어요. “마이크는 여성 해방 운동가와 결혼하게 생겼군요.”

다음 장면에서는 줄리의 약혼자와 아버지가 따로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 줄리의 꿈을 비웃은 직원 때문이 아니라 줄리에게 다른 생각이 있다는 것 때문에 두 남자는 몹시 불편한 것 같았어요. 줄리의 5년 뒤를 남자들이 합의하여 결정하고 이러쿵저러쿵 의견을 달고 있다니, 프레디의 눈에는 그게 아주 이상하게 보였어요. 프레디에게는 미래 계획이 분명하지 않고 모호한 것이 문제가 되었지만, 줄리에게는 자기 삶을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요.

영화는 이처럼 세머터리 정션이라는 세계에 뿌리박혀 있는 낡은 편견들을 다양하게 건드립니다. 하지만 무엇 하나 깊이 파고들지는 않아요. 마치 세계의 다양한 파편들을 툭툭툭 던져서 엉성한 모자이크를 만들어놓은 것 같아요. 실제 우리가 사는 세계가 그렇다는 듯이요. 우리가 초점화해서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아니고, 또 그 어떤 의견도 정답은 아니죠. 그렇게 우연히 마주치는 의문들에 우리의 시간과 각자의 입장이 우연처럼 놓이고, 그때 자기 마음의 초점이 찍어낸 장면들로 삶이 길이 구성된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이 청년들은 세머터리 정션이라는 마을에서 그다지 두드러진 존재가 아니었듯이 더 큰 다른 세계로 나아간다고 해도 다르지 않을지 몰라요. 하지만 자기 눈에 들어온 세상 풍경에서 내 마음이 초점을 맞추게 되는 무언가를 발견할 때, 그게 현실을 딛고 일어설 무언가가 될 수는 있다는 걸 보여줘요.

세머터리 정션을 떠나기로 결심한 프레디가 줄리의 암실에서 마지막 밤을 함께 한 시간을 담은 사진을 인화하는 장면이 있어요. 서로의 꿈과 행복을 응원하는 두 남녀가 어둠 속에서 카메라 속 필름이 그려내는 그림들을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줄리는 그때 깨닫는 것 같았어요. 부모의 눈에, 남자의 눈에 보이기 위해 존재하던 줄리 말고 다른 줄리가 있었어요. 그 모습을 프레디와 함께 처음으로 보고 있었죠. 좋은 아내감인지 좋은 딸인지 평가하는 시선이 아니라 행복한지 아닌지 궁금해하는 프레디의 시선 속에 있을 때의 자신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지 감탄하는 듯했어요. 프레디가 보는 줄리는 너무도 많은 가능성으로 빛나는 사람이죠. 그런 줄리를 바라보는 프레디의 모습 또한 그 누구와 함께 있을 때보다 멋져 보였어요.

‘세머터리 정션’은 말썽꾸러기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세 명의 청춘이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타나는 온갖 한심하고 불안한 행동에 계속 한숨을 내쉬게 하는데도, 이들의 불안한 활기를 지켜보게 하는 매력적인 영화예요. 클리셰 범벅이지만 계속 보고 싶어요. 어쩌면 그 속에서 숨겨둔 내 비밀을 보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그렇게 애써 감출 만한 비밀이 아니라고 옆구리를 찌르는 것 같아요. 나름대로는 심각한 비밀일지 몰라도 들킨다고 해서 뭐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되지도 않잖아요.

그런 복잡하고 다채로운 인간의 찌질한 마음 풍경을 그리기에 긴 러닝타임이 아닌데도, 잘 담아서 표현해 낸 영화인들의 재능을 보면 기분이 좋아져요. 기상천외한 모험이나 훌륭한 인물만 주인공이 되고 감동을 주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부터 위로와 격려를 해주는 것 같잖아요.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자기만의 기억 속에 꼭꼭 숨겨두고픈 부끄럽고 사소한 일들을 꺼내놓는 용기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딘가 불완전하고 못났지만 나만의 초점을 잡아 방향을 찾아가는 자기만의 길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가 된다는 걸, 이 작은 영화가 속삭여주는 것 같아요. 마음의 카메라로 담아낸 진솔한 애정은 B급이어도 힘이 세요.

영화 칼럼니스트 이하영 ha02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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