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과학기술계의 히딩크 만들자…PM에 예산 자율권도 준다
PM에 유연한 과제 관리, 예산 권한 주는 제도 개혁 추진
정부가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개발(R&D) 시스템을 ‘프로그램 매니저(PM)’ 중심으로 전환할 준비를 하고 있다. 전문성을 갖춘 민간 PM에게 연구진행 상황에 따른 예산 집행과 과제 관리 등 전권을 주겠다는 방침이다. 2002년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에게 선수 선발과 작전의 전권을 줘서 월드컵 4강의 기적을 이뤘던 것처럼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혁신이 필요하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17일 과학기술계에 따르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연구재단은 PM을 중심으로 R&D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혁신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한국연구재단 관계자는 “현재 일부 책임PM에게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유연한 사업 기획과 과제 관리, 예산 편성 등을 다른 PM에게 확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연구재단은 정부의 R&D 자금이 투입되는 과제를 기획·관리·평가하고, 대학과 기업, 연구기관의 연구자에게 연구비를 지원하는 기관이다. 한 해 예산만 10조원에 달한다.
PM은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지휘하는 민간 전문가로, 축구로 따지면 감독과도 같다. 대부분 해당 분야에서 뛰어난 연구 능력과 관리 능력을 인정받은 민간 전문가를 PM으로 선임한다. PM은 한국연구재단의 본부장이나 단장 같은 상근 PM과 과제 평가위원 같은 역할을 맡는 비상근 PM으로 나뉜다. 현재 상근 PM이 22명, 비상근 PM이 1063명이다.
현장에서는 PM 제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다. 불필요한 간섭과 규제가 너무 많고, PM에게 권한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재단에서 단장을 지낸 한 PM은 “연구관리 단계마다 각종 위원회가 개입하기 때문에 말만 PM이지 결정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며 “공정성이 수월성보다 우선시되는 문화이다 보니 내가 맡고 있는 분야에서 꼭 키워야 하는 연구자나 연구과제가 있어도 기획 연구 과제 하나 맡길 수가 없는 구조였다”고 지적했다.
PM에 대한 지원도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연구재단 단장 출신의 다른 대학 교수는 “2년 동안 연구재단에서 PM을 맡고 대학으로 돌아왔더니 연구실이 완전히 피폐해져 있었다”며 “연구실 회복 지원 사업 같은 게 있는데 PM을 하면서 입은 손실을 복구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규모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연구자들이 모두 알다 보니 실력 있는 사람은 PM을 맡길 꺼려하는 풍토가 생겼다고 했다. 수도권 정부 연구소의 한 연구자는 “PM을 하면서 받은 대우가 연구소보다 나빴다”며 “지금 상태라면 PM으로 위촉돼도 가지 않으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도 이런 문제를 알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월 16일 대전에서 열린 민생토론회에서 “우리나라 연구계가 ‘퀀텀 점프(비약적 도약)’하기 위해서는 대학과 연구소에서 행정·법률·금융 등 R&D 매니지먼트와 매니저 간 네트워크가 활성화돼야 한다”며 “DARPA(미국 국방고등연구계획국)의 연구 매니지먼트 체계를 본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후 과기정통부와 한국연구재단은 PM 제도를 혁신할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정부와 한국연구재단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출범하는 한계도전전략센터의 책임PM 제도를 다른 PM들로 확장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한계도전전략센터는 미국 DARPA를 본따서 만든 프로그램으로, 실패 가능성이 큰 혁신적인 R&D에 도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기존의 PM보다 권한을 강화한 책임PM을 둬서 R&D 전체 과정에 대한 책임과 권한을 주고 유연한 과제 운영이 가능하게 한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기존의 R&D 평가가 선정평가위원회, 사업추진위원회심의 등 여러 위원회를 거쳐야 했다면 한계도전 R&D 사업은 책임PM의 재량 하에 평가단을 꾸려서 평가 속도를 높일 수 있다. 정해진 평가 항목이 아니라 사업의 혁신성과 기획의도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평가도 가능하다. 또 기존 R&D 사업이 실적 점검과 차년도 계획 점검 등 연차점검과 평가위원회, 사업추진위원회 등 여러 단계를 거치도록 했다면, 한계도전 R&D 사업은 책임PM이 수시로 연구 진행상황을 살펴서 과제별로 재기획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한계도전 R&D 사업의 책임PM은 국가연구개발혁신법에 예외 규정을 두는 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예외 적용은 확장에 어려움이 있다. 과기정통부와 연구재단은 법 자체를 개정해서 책임PM처럼 사업 기획과 관리를 맡는 PM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려고 한다.
한국연구재단은 오는 21일 열리는 창립 15주년 특별포럼을 통해 이 같은 계획을 구체화한다는 계획이다. PM이 유연하게 과제 관리를 할 수 있도록 권한을 대폭 확대하는 방안에 과학기술계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을 생각이다. 한국연구재단 관계자는 “유연한 연구수행이 가능하도록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데 정부와 뜻을 모으고 있다”며 “혁신적이고 도전적인 연구는 불확실성이 큰 만큼 PM에게 권한을 주고, 불이익이 없도록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과기정통부 고위 관계자도 “연구 행정과 R&D 매니지먼트를 혁신적·도전적 연구에 맞게 혁신하는 건 중요한 과제”라며 “능력 있는 PM이 마음껏 연구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바꾸는 방안을 계속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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