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가 시계까지 잘 만들었을 때

최보윤 편집국 문화부 차장 2024. 5. 17.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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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스앤원더스2024]에르메스 Hermès
매끄러운 원형 실루엣의 에르메스 컷. 에르메스가 즐겨 사용하는 기하학적 테마가 돋보이는 아이템이다. /에르메스 제공

패션 브랜드로 인해 시계 전문 제조사가 위기감을 느낀다면, 그건 에르메스 때문이다. 수십 수백년 전통의 시계 전문 제조사가 ‘뒤처진다’는 압박을 받는다면, 그것 역시 에르메스 때문이다.

그간 위협적인 조짐이 몇번 보이긴 했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지난 4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워치스 앤 원더스 현장에서 기자들 사이에서, 혹은 바이어나 현장 소비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브랜드 중 하나가 에르메스였다. 패션 부문의 ‘부속품’처럼 여겼던 브랜드가 있다면 아마 남몰래 에르메스에 대해 연구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에르메스 특유의 전위적인 절제미를 바탕으로 한 ‘도전’ 정도로 애써 외면했던 이들 조차도 ‘갖고 싶다’고 연발했으니 말이다.

요즘 너도 나도 떠드는 ‘조용한 럭셔리’의 궁극적인 의미를 파고든다면 바로 에르메스 시계를 두고 말하는 게 아닐까. 단순히 로고를 없애고, 두드러지지 않는 디자인을 추구한다고 조용한 럭셔리가 되는 건 아닐 것이다. ‘조용하다’ 못해 ‘지루하다’고 토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조용한 럭셔리’는 말 그대로 남들이 인식하지 못하게 차근차근 디자인과 기술력을 개발해 보는 이에게 감탄사를 유발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질리지 않아야 한다. 이 어려운 저울추의 균형을 에르메스가 해내고 있는 것이다.

◇기계식 여성 시계의 판도를 바꿀 에르메스 컷(Hermès Cut)

워치스 앤 원더스에서 선보이는 수많은 브랜드들 중에서 에르메스 시계를 주목받게 한 건 우선 에르메스 컷(Hermès Cut)이란 제품이다. 이름에서 보이듯 에르메스 특유의 복잡성과 간결함을 오가는 위트있는 재단을 짐작케 한다. 무척이나 단순해 보이지만, 결코 단순할 리 없다는 것이 바로 에르메스 적인 관점이다.

에르메스 컷은 인하우스 무브먼트 H1912를 탑재한 기계식 시계로 그간 업계를 지배했던 기계식 여성 시계의 지위를 바꿔놓을 것이란 찬사를 이끌어냈다. 메종을 이끌어갈 대표적인 여성 라인으로 꼽히긴 하지만, 36mm사이즈는 남성들도 착용가능하다. 지난 2021년에 출시된 메종의 첫 번째 스포츠 시계이자 대대적인 성공을 이룬 H08에 이어 또 다시 업계를 뒤흔들 타자로 꼽힌다. 글로벌 시계 전문 매체 호딩키는 “의상 뿐만 아니라 시계에서도 완벽함을 추구하는 이들을 위해 만들어져 우아한 방식으로 스포티(경쾌)하다”면서 “에르메스 대표적인 라인 중 하나인 에이치 아워(Heure H) 보다는 덜 딱딱해 보이고 케이프 코드 보다는 덜 패션스러운 완벽한 스타일”이라고 설명했다.

매끄러운 원형 실루엣의 에르메스 컷. 에르메스가 즐겨 사용하는 기하학적 테마가 돋보이는 아이템이다. /에르메스 제공

시계를 좀 아는 이들이라면 에르메스가 2006년에 무브먼트 제조업체인 보쉐 매뉴팩처 지분 25%(나머지 75%는 역시 세계적 시계 브랜드 파르미지아니가 소유)를 인수해 기술력을 한결 높였다는 걸 알수 있다. 이를 통해 기계식 무브먼트 H1912(에르메스 컷)와 H1837(H08용)을 선보였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번 에르메스 컷 출시는 시계 부문의 지속적인 성장에 힘입어 기계식 시계 제조를 추구하는 장기적인 전략의 일환”이라고 해석했다. 에르메스 시계 매출은 애플 워치 브레이슬릿을 제외하고, 2023년 기준 전년대비 23.2% 증가한 6억 1100만 유로( 9018억 3600만 원)로, 2022년 기준 그룹 내 향수와 미용제품 매출을 추월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필립 델로탈이 디자인한 에르메스 컷은 ‘둥근 형태 안에 담긴 완벽한 원’이 꼬리를 문다. 케이스와 베젤, 다이얼, 핸즈 등의 동그라미는 크기와 형태를 변주한다. 둥글게 보이지만, 케이스 옆의 에지(edge) 부분의 컷된 날렵한 라인으로 개성을 한층 더해준다. 1시 30분 방향에 대담하게 배치된 크라운(용두)은 H라고 새겨진 디테일로 한 눈에 알아보게 한다. 에르메스 컬러 팔레트에서 가져온 블랑, 오렌지, 그리스 펄, 그리스 에땅, 글리신, 베르 크리켓, 블루 진, 카푸친으로 이루어진 여덟 가지 컬러의 러버 스트랩이 함께 제작됐다. 브레이슬릿과 스트랩을 교체할 수 있는 독창적인 인터체인저블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덕분에 다양한 스타일을 손쉽게 연출할 수 있다.

스틸 또는 스틸과 로즈 골드 소재로 출시되며, 다이아몬드가 없는 버전 그리고 56개의 다이아몬드가 베젤에 세팅된 버전으로 선보인다. 스틸 모델의 초침에는 회색과 주황색으로 강조된 미닛 트랙 위로 빛나는 에르메스 오렌지 도트가 장식되어 있다. 투톤 모델의 다이얼은 오렌지색 액센트가 없는 대신 약간 더 차분한 톤을 유지한다.

유명 시계전문 매체인 어블로그투워치(aBlogtoWatch)에 오른 댓글을 주목할 만 하다. “나는 에르메스 시계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들은 세부 사항에 주목할 만한 주의를 기울이고, 주로 자신의 무브먼트를 이용하고, 혁신적인 재료를 사용하고, 미묘하게 그들의 혈통을 일깨우고, 절제된 것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균형을 잡는다. 다이얼 색상 조금 바꾸거나 베젤을 살짝 변형해 ‘새로운 출시’라며 미미한 투자로 마치 큰 변화가 있는 듯 꾸며대는 몇몇 브랜드와 달리 실제로 놀래키려는 과감한 시도를 한다. 에르메스가 무조건 완벽하다고 말한다는 건 아니지만, 칭찬할 때는 칭찬해야 한다. 그들은 시계를 디자인한다. 그리고 그들의 부티크 직원들은 솔직히 대부분의 롤렉스 광고들보다 더 박식하고 흥미로워 보인다.”

매끄러운 원형 실루엣의 에르메스 컷. 에르메스가 즐겨 사용하는 기하학적 테마가 돋보이는 아이템이다. /에르메스 제공

◇에르메스 방식을 상기시키는 아쏘 딕 아뜰레·아쏘 코러스 스텔라룸

무엇보다 에르메스의, 에르메스 시계의 장점은 자신의 길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는 데 있다. 말이 쉽지, 그게 브랜드가 됐든 정치인이든 작가든 예술인이든 자신이 가야할 바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설계하는 이는 많지 않다. 자신이 잘하는 것 혹은 잘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만 자랑하는 건 어리석다. 상대를 설득시키면서 다음 번에 대해 더욱더 기대하게 만들고, 일관된 품질을 유지할 수 있는 저력이 있어야 한다.

이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제품 중 하나였던 아쏘 딕 아뜰레(Arceau Duc Attelé)는 에르메스의 하이워치메이킹(고도의 복잡 기술)과 승마 세계 미학을 조화시켰다. 자체 제작 H1926 매뉴얼 와인딩 무브먼트가 장착돼 있으며, 43mm 폴리싱 된 티타늄 혹은 로즈 골드 케이스에 중앙의 3축(Triple-axis) 뚜르비용(중력으로 인한 오차를 줄이기 위한 기계 장치)과 튜닝 포크(소리굽쇠) 미닛 리피터(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가 특징. 3축 뚜르비용은 세 개의 별도의 축과 각기 다른 회전 속도(300초, 60초, 25초로 1회전)를 갖고 있다.

오뜨 오롤로제리(하이 워치메이킹)와 승마의 상징이 어우러진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아쏘 딕 아뜰레. /에르메스 제공

티타늄 또는 로즈 골드 두 가지 모델이 각각 24개 한정판. 티타늄 모델에 적용된 기요쉐 장식은 말 머리 모양으로 완성한 미닛 리피터의 해머에서 발하는 소리가 전파되는 파동 모양을 연상시킨다. 시간을 알려주는 말 머리 모양의 해머들은 다이얼 가장자리 주변에 자리한 길고 단단한 강철 공에 장착된 튜닝 포크의 U자 형태의 가지를 치는 방식으로 작동되며, 그 소리는 대성당 종소리를 연상시킨다.

뒷면 기어 트레인의 디자인은 1920년 에밀 에르메스가 구매한 알프레드 드 드뢰(Alfred de Dreux)의 그림 ‘딕 아뜰레(Duc Attelé·에르메스 로고에서 볼 수 있는 마차)’의 바퀴에서 영감을 받았다.

아쏘 코러스 스텔라룸(Arceau Chorus Stellarum)은 에르메스 스카프 디자이너 다이스케 노무라가 디자인한 코러스 스텔라룸 실크 스카프에서 영감 받았다. 직경 41mm로 대담한 말과 그 말을 힘차게 타고 있는 해골 기수들은 인그레이빙(새기는 것)과 페인팅 등으로 구현됐으며, 샹르베(바탕에 새겨 에나멜을 입히는 것) 기법을 통해 만들어진 황금 별자리 주변을 돌아다니며 춤 춘다. 여자 해골 기수가 있는 버전에는 70개의 다이아몬드가 세팅돼 있다. 케이스의 중심에는 에르메스 매뉴팩처 H1837 무브먼트가 탑재돼 있으며 각각 6개 한정판으로 선보인다.

앙리 도리니가 디자인한 아쏘 컬렉션. 다이스케 노무라가 디자인한 코러스 스텔라룸(Chorus Stellarum) 실크 스카프에서 영감을 받은 아쏘 코러스 스텔라룸 시계. /에르메스 제공

올해 워치스 앤 원더스에서 선보인 에르메스 시노그래피(장소)는 건축가이자 시각 예술가인 에린 오키프가 에르메스 컷에서 영감 받아 디자인 했다. 에르메스는 “관습적인 습관에 대한 도전과 시선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며 걸음마다 변화해 예상치 못한 시각이 열리게 한다”고 설명했다. 에르메스는 이렇게 끊임없이 연구한다. 이것이 에르메스를 더욱 에르메스답게 만드는 비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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