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 못하고, 히틀러가 영국 장악했다면… ‘만약’ 의 역사[북리뷰]

2024. 5. 1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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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추얼 히스토리
니얼 퍼거슨·존 애덤슨 등 9인 지음│김병화 옮김│지식향연
“케네디가 연임 성공했다면
흑인 인권 더 후퇴했을 것”
“영국 세계대전서 빠졌다면
유대인 대학살 없었을 것”
역사가 9명 사료 기반 분석
현실성 있는 시나리오 제시
‘버추얼 히스토리’를 집필한 9명의 역사가들은 미국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에 실패했다면, 히틀러가 영국 침공에 성공했다면 등 실제 역사가 가지 않은 길을 서술하고 그에 비추어 현재의 역사를 고쳐 쓴다. 게티이미지뱅크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날 법한 일”을 이야기하는 건 역사가의 일이 아니라 시인의 일이라고 말했다. 역사란 사실의 학문이므로 역사에서 ‘만약에’라는 가정은 무의미하다. 머릿속에서 다른 가능성을 아무리 떠올려도 이미 벌어진 일을 조금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일어났다고 해서 필연도, 최선도 아니다. 사실을 정당화하는 대신 다른 현실,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할 때, 우리는 현재의 한계를 넘어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시가 역사보다 더 진지하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이유다.

‘버추얼 히스토리’는 역사가가 쓴 가정법의 시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니얼 퍼거슨, 존 애덤슨, 앤드루 로버츠, 조너선 해슬럼 등 9명의 역사학자가 쓴 이 가상 역사 강좌는 주로 영국을 배경 삼아 역사를 다시 쓴다. 영국 내전이 없었다면, 미국 독립이 실패했다면, 1차 세계대전 때 영국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히틀러가 영국 침공에 성공했다면, 소련이 갑자기 붕괴하지 않았다면 등 실제 역사가 ‘가지 않은 길’을 걸어본 후 그에 비추어 현재의 역사를 고쳐 쓴다.

모든 역사는 당대인들에게 ‘열린 미래’의 형태로 제시된다. 이런 의미에서 버추얼 히스토리와 대체 역사 소설은 과거를 가능성의 장으로 본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퍼거슨은 가상 역사가 실제 사료에 기반한다면, 허구적 소설은 희망 사고나 시대착오적 가정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동의할 수 없지만) 소설은 자극적 읽을거리에 그치지만, 가상 역사는 과학적 시뮬레이션이고 있는 그대로 과거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란 뜻이다.

이 책에 따르면, 존 F 케네디의 암살은 미국 역사에 별로 비극이 아니다. 대중적 오해와 달리 그는 평범했다. 역사적 사료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그가 암살되지 않고 연임에 성공했다면 1960년대 연방 민권 정책은 오히려 후퇴해 흑인 등 유색인종의 처지가 나빠졌을 것이다. 게다가 외교 안보 정책으로 볼 때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동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을 게 틀림없다. 이처럼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모두 엄격한 사료 비판에 근거해 가상 역사를 다룬다. 저자들은 역사적 사건을 철저히 분석한 후 실제로 일어날 법한 대안을 뽑아내 그것이 일으킬 미래를 실증적으로 검증한다. 이런 ‘사실적 추측’은 우리를 결정론의 함정에서 구해내고, 다른 현실을 상상하는 힘을 길러준다.

이 책의 서술은 지도자의 결단을 중시하는 등 무척 영웅주의적이다. 가령 1639년 스코틀랜드 위기 당시 영국 왕 찰스 1세가 단호했다면 영국 내전을 피할 수 있었고, 크롬웰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며, 영국은 “강력하고 재정 튼튼하며 중앙집권적 왕국”으로 남았을 것이라는 식이다. 독일 빌헬름 황제와 히틀러, 소련의 스탈린과 고르바초프 등에게 주목하는 이유다.

논란이 큰 이야기도 있다. 가령 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을 때 영국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더 나은 결과를 빚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그랬다면 영국은 굴욕적이나 큰 상처 없이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을 것이고, 독일 제국은 승리해 유럽 전역을 지배했을 것이며, 러시아혁명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다. 약한 민주주의와 대공황이 낳은 파멸적 비극, 즉 파시즘과 나치즘, 히틀러의 등장과 2차 세계대전도 없었을 것이다.

1646년부터 1996년까지 350년간 미국 왕국, 나치 유럽, 소련 건재 등 이 책에 나오는 모든 가정이 이루어졌을 때, 세계는 어떻게 변할까? 퍼거슨에 따르면, 이 가상 세계를 지배하는 정치 이념은 민주주의, 공산주의, 전체주의가 아니라 종교와 민족주의다. 크롬웰 없는 영국과 독립 없는 미국에서 생겨난 영미 제국은 독일이 이끄는 유럽연합, 신정주의 러시아 제국에 맞서다 서서히 약해진 끝에 결국 붕괴한다. 오늘날 유럽의 정세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일찍이 요한 하위징아는 말했다. “역사가는 반드시 이미 알려진 요인이 실제와 다른 결과를 낳을지 모를 과거 지점에 서 보아야 한다.” 다르게 돌이켜 볼 때만 다르게 내다볼 수 있는 법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이 반복해서 말하는 것, 즉 아주 작은 계기만으로도 현재와 다른 역사가 존재했을 가능성은 미래를 현재의 연장이 아닌 방식으로 상상하려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용기를 준다. 600쪽, 3만5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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