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법을 모를 때, 민주주의는 파괴된다[북리뷰]

신재우 기자 2024. 5. 17.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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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박세연 옮김│어크로스
정권교체는 민주주의의 시험대
평화로운 권력이양이 기본원칙
패배 불복, 극한 세력과 손잡아
소수였던 극단주의자들이 득세
선거불신에 정쟁은 ‘전쟁’으로
권력 얻기위해 폭력 조장·묵인
지난 2021년 1월 6일 대선 패배에 불복한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이 국회의사당을 습격하고 있다.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의 저자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이에 대한 원인으로 “패배에 대한 두려움”을 꼽았다. AP 연합뉴스

극단주의. 민주주의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단어는 최근 세계 정치의 화두다. 진보와 보수는 견제를 넘어 극한의 갈등으로 치닫고 극성 지지자들은 선을 넘어 무력을 행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극단주의가 꽃피우는 곳은 민주주의의 출발지이자 종착지인 국회다. 거리에서 소수로 존재하던 극단주의자들이 힘을 갖는 것은 국회 권력과 결탁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전작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통해 현대 민주주의 체제의 한계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하버드대 정치학자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당선이라는 현상을 중심으로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파괴되고 있다고 경고를 날렸다. 그로부터 6년 후, 후속작에 해당하는 이 책은 트럼프 당선보다 충격적인 사건으로 시작한다. 바로 2021년 1월 6일 대선 패배에 불복한 트럼프 지지자가 감행한 국회의사당 습격이다.

정권 교체는 어느 국가가 됐든 민주주의가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이다. 다만 민주주의는 정당이 필연적으로 선거에서 패배하는 시스템이고 이를 바탕으로 유지되는 체제이기도 하다. 선거 결과를 승복하고 평화롭게 권력을 이양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 중 하나인 것도 이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최초로 권력이 한 정당에서 다른 정당으로 이양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다. 1801년 3월 4일, 미국의 제2대 대통령이자 초대 부통령이었던 존 애덤스는 해가 뜨기도 전에 조용히 워싱턴DC를 떠났고 대통령 당선자인 토머스 제퍼슨은 몇 시간 뒤 상원 본회의장에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220년 사이에 미국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두 저자는 그 배경에 ‘패배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말한다. 책에 따르면 민주주의에서 잡음 없이 패배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앞으로 다시 승리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고 여겨질 때, 그리고 권력 이양이 재앙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다. 이러한 조건이 맞지 않았을 경우 발생하는 결과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하다. 정쟁은 전쟁으로 변하고 선거 제도 자체에 대한 불신이 피어난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극단주의자들은 이 틈을 놓치지 않는다.

여기서 민주주의의 또 다른 기본 원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권력 쟁취를 위해 폭력을 사용하거나 극단주의 세력과 동맹을 맺는 행위다. 이는 2021년 미국뿐만 아니라 1934년 프랑스에서 발생한 국회의사당 습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34년 재향군인회, 청년애국단 등의 단체에 소속된 수만 명의 젊은 남성들이 프랑스 국회의사당을 습격했다. 이들은 의회 해체와 이전 정부인 보나파르트파의 복귀를 주장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충격적인 것은 폭동이 끝나고 많은 보수주의자가 사건을 가볍게 치부하거나 정당화했다는 점이다. 주류 보수주의 정치인은 시위자들이 부패와 공산주의로부터 공화국을 구하고자 했던 애국자라고 치켜세우기까지 했다. 물론 미국 공화당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2021년 선거 패배에 대한 인정을 거부했고 폭동을 은근하게 조장하거나 묵인했다.

미국 정치를 중심으로 한 책인 만큼 국내 독자에게는 와 닿지 않는 내용도 존재한다. 의회 구성과 선거인단 제도 등 책에서 지적하는 민주주의의 허점은 우리나라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이야기다. 다만 미국과 같은 의회 민주주의를 근간에 두고 있는 만큼 새겨둬야 할 이야기도 많다. 이를테면 두 저자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범인으로 지목한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민주주의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폭력이나 반민주적 극단주의에 눈을 감는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들이 극단주의자를 용인하고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일 때 민주주의는 곤경에 빠진다. 법을 정치적인 무기로 사용하는 것도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경계해야 할 신호다. 대통령이 헌법이 보장한 권력을 과도하게 사용하거나 의회에서 탄핵 권한을 남용하는 것이 그 예다.

오는 11월에는 미국 대선이 돌아온다. 다시 한번 조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이 맞붙는다. 민주주의는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오를 것이고 이후에도 수차례 선거를 통해 반복될 것이다. 그 결과는 알 수 없지만 명확한 것은 한 정당은 패배를 맛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책의 한 문장은 이 시점에서 민주주의라는 체제를 지키고자 하는 저자들의 다짐처럼 느껴진다. “정당이 지는 법을 배울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뿌리를 내린다.” 440쪽, 2만2000원.

신재우 기자 shin2roo@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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