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칼럼] 살구가 익을 무렵

김용택 시인 2024. 5. 1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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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으로 이발하러 갔다. 목욕탕 안에 이발소가 있다. 이른 아침이라 나이 든 사람들이 많다. 나이가 만들어가는 육체는 움직이는 동작이 불편하고 직립의 거동이 위태위태하다. 육체는 체념하는 중인데 왕년의 일상을 포기하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한 몸들은 외롭고 슬프고 짜증나고 성질난다. 이발하고 강천사로 물 받으러 갔다. 몸에 좋다는 이 물을 받아다가 먹은 지 2년쯤 되었다. 이 물을 마시고 건강해지거나 오래 살 생각은 없다. 물이 맛나서 이 물로 아내는 고추장 담고, 나는 봄 여름에 찬물로 마신다.

물 받으러 가는 길은 순창읍 가기 전에 오른쪽으로 낮은 두 고개를 넘어 몇몇 마을들을 지난다. 낮은 산굽이를 돌 때마다 아늑한 들끝 저 멀리 산아래에 마을들이 편안하게 앉아 있다. 낮은 고개 하나를 넘어 들길을 가는데, 저쪽 마을 앞 도로에 초등학교 3학년과 2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멀리서 왼손을 번쩍 들고 길을 건넌다. 내 차 때문에 저런 강한 경고 자세를 취하고 길을 건널 텐데, 그러나 내 차하고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어서 나는 혼자 크게 웃을 뻔했다. 이 길은 차들의 왕래가 아주 뜸한 곳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학교와 집에서 단단히 교육 받은 대로 교통 도덕을 철두철미하게 준수한다. 나도 속도를 아주 줄였다. 길은 건넌 아이들이 상당히 높은 논두렁에 올라서 있다. 그 모습도 웃겼다. 아이들은 분홍색 잠바에다 짧은 치마를 입고 흰 스타킹 차림이다. 둘 다 가방 색까지 같다. 등교 차림이 주위 풍경에 약간 어색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앞뒤를 살핀 후 차를 멈추고 차창을 천천히 열었다. 나는 반갑고 명랑한 표정으로 "얘들아, 안녕!"하며 손을 흔들었다.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반가운 풍경이었다. 아이들이 서 있는 논두렁 풀잎에 이슬이 맺혀있다. 아이들이 딛고 지나간 이슬 털린 발자국이 두어 군데 보인다. 아이들 신발에 이슬이 묻어있을 것이다. 언니로 보이는 아이가 나를 향해 고개를 까닥하더니, 팔을 반 쯤 들어 두어 번 손을 흔들고, 동생은 언니 누구야, 하는 표정으로 언니를 올려다본다. "학교 잘 갔다 와" 나는 다정하고 다감하게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아이들 앞을 천천히 지나갔다. 가다가 백미러를 들여다보니, 아이들이 내 차를 바라보고 있다. 어떤 영화 장면처럼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고 크게 흔들어 주었다. 지난 봄 날 이 길 오른쪽 마을 2층 집 붉은 기와 지붕 위로 살구 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났다. 아이들이 그 집에 사나?

언젠가 평양에 갔을 때 보았는데, 개선문 부근에 가로수가 살구나무였던 것 같다. 길가에 이발소가 있어서 유리창 너머로 이발 하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의자에 앉은 사람과 이발사, 이발사가 가위질을 하다가 고개를 살짝 돌려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이발사 얼굴을?잊을 수 없다. 그때 가본 북쪽 어느 고원에 흰 감자꽃이 서늘할 때였으니,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아마 살구가 익을 무렵이었는지도 모른다.

갔던 길을 따라 집으로 왔다. 아이들 둘이 논두렁에 서 있던 단정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제 생각해보니, 그 길에서 학교 버스를 기다리는 학생을 처음 만나서 뭔가 그렇게 낯설고 인상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도시에서 시골로 이사를 온 지 얼마 안 된 것은 분명해 보였었다. 몇 가지 이런저런 사연의 경우가 생각나기도 했다. 생각이 복잡하지는 않았다. 단정하게 잘 빗어 묶은 아이들의 머리를 보면 엄마 솜씨인 것 같기도 하다.

이상하게도 종일, 살구나무가 있는 가로수 길 평양의 이발소와 북쪽 어느 고원 너른 감자밭가에 서서 희고 고운 감자꽃을 바라보던 서늘한 생각과 논두렁에 낯선 듯 서 있던 아이들의 빈틈없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아이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약간 파리하다는, 생각이 났다. 논두렁에 서 있던 아이들과 평양의 거리와 감자꽃은 서로 이어지지 않은 풍경인데도 말이다. 이상하여, 오히려 아주 이상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그 무엇인가 어떤 중요한 어떤 것들을 버려둔 채,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하게 살아간다는 생각에, 나는 허전한 어떤 구석이 사라지지 않아 자꾸 허기가 찾아왔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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