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재 임박 ‘채권 돌려막기’ 당국 책임은 없었나[여의도워치]

박수익 2024. 5. 17.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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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감원, 채권형 랩신탁 돌려막기 제재심 임박
묵인해온 관행 '레고랜드' 만나 증폭에 증폭
사태 초기 당국 메시지는 '자본시장서 흡수'

지난 1년간 여의도 증권가의 이목이 쏠렸던 채권형 랩어카운트(이하 랩), 특정금전신탁(이하 신탁) 돌려막기와 관련한 금융당국의 제재가 임박했다.

금융감독원은 채권형 랩·신탁 돌려막기 사태에 연루된 증권사의 책임을 묻는 제재심의위원회(제재심)를 이달 하순 진행한다. 앞서 금감원은 지난해 5월부터 랩·신탁 운용 실태에 대한 현장검사에 착수, 7월 검사 진행 상황 공개에 이어 12월 검사 결과를 발표했다.

8개월간의 특정 테마검사에서 이례적으로 여러 번 공개발표 과정을 거친 금감원은 증권사 9곳, 운용역 30여명의 혐의사실을 적발해 수사당국에 통보하고, 다른 혐의에 대해서도 제재 절차를 진행해왔다. 금감원이 증권사의 위법행위로 판단한 건 △특정 고객계좌의 손실을 보전해주기 위해 연계·교차거래란 방식으로 다른 고객에서 손해를 전가했고 △고객의 투자손실을 증권사 고유자금을 통해 매수하는 방식으로 지급했다는 점이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 왜 이런 일이 생겨났을까. 

랩‧신탁은 다수의 투자자를 대상으로 운용하는 펀드와 달리 개별 투자자와 일대일 계약으로 자금을 굴리는 상품이다. 법인·기관투자자가 주 고객이다. 증권사들은 법인고객 자금 유치를 위해 시중 예금금리에 1%포인트 정도의 추가 금리를 더 제공하는 채권형 랩신탁 상품을 판매해왔다. 

시장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고금리 장기채권이나 기업어음(CP)을 편입해 운용하는 이른바 '만기 불일치(미스매칭)'도 관행이란 이름의 운용전략으로 시행해왔다. 가령 3개월 뒤 돌려줘야 하는 자금을 굴리는 과정에서 만기 1~3년짜리 채권도 섞어서 운용하는 방식이다. 

고객의 돈을 돌려줘야 할 시점에 편입 자산을 시장에서 처분해 지급하는 게 원칙이다. 랩·신탁은 확정 수익을 보장하는 상품이 아니므로 이익 나면 이익 난 대로 손해나면 손해난 대로 돌려주면 된다. 불법도 아니고, 금감원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런데 여러 고객계좌를 관리하는 증권사 입장에선 만기가 일치하지 않는 자산을 팔고, 비슷한 자산을 사와 다른 고객계좌에서 운용하는 방식도 사용했다. 

금리 상황이 급변하지 않을때 별 탈 없어 보였던 이런 형태의 운용은 2022년 10월 이른바 레고랜드 사태(강원도 보증 PF-ABCP 부도) 직후 시중금리가 치솟고 자금경색이 나타나면서 상황이 확 달라졌다. 우량등급 CP도 정상적인 소화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랩신탁 계좌 주인(법인고객)들의 환매 요구는 이어졌다. 시장 상황이 바뀌자 돌려막기에도 더 비싼 대가가 뒤따랐다. 

증권사들은 A 고객계좌에 편입한 CP를 시가보다 더 비싸게 팔고, 대신 B 고객계좌를 통해 만기가 유사한 CP를 더 비싸게 사 와서 대응했다. B 고객계좌를 돌려줘야 할 때도 다른 고객계좌를 활용해 유사하게 대응했다. 레고랜드 사태 직후 단기간 반복적으로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원칙적으로 뒤섞이면 안되는 고유자금을 활용해 랩신탁에 담은 CP를 시가보다 비싸게 사주는 방식으로 손실을 보전해주기도 했다.

관행이었던 만기불일치 운용은 연계·교차거래를 낳았고, 레고랜드 사태로 인해 정상적이라 볼 수 없는 고가매도·매수로 증폭됐고, 급기야 고유자산까지 활용해서라도 수익률을 보전해주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우리 자금만큼은 절대 손실볼 수 없다'는 큰 고객들과 증권사간 영업적 관계도 작용했을 것이다.

어떤 단추부터 잘못 끼워왔더라도 처음부터 다시 옷을 고쳐 입으면 된다. 증권업계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금감원이 작년 8개월간 검사를 진행한 이후 현재 제재 절차에 돌입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다만 사태가 이렇게까지 증폭에 증폭을 거듭하는 동안 당국의 초기대응은 문제가 없었던 걸까.

레고랜드 사태는 2022년 10월 15일 강원도 보증 레고랜드 ABCP가 부도 처리된 이후 한동안 한국전력 등 공기업 채권마저 잇단 유찰되며 자금시장 경색이 심화한 사건이다.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그해 11월 11일 서울 은행연합회에서 개최한 금융시장 현황 점검회의(사진)에서 "경제 전반적인 신용축소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측면보다는 추가적으로 시장 불안감을 조성할 수 있는 이벤트를 선제적 식별하는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사진: 금융위원회)

금감원이 제재를 예고한 랩신탁 연계·교차거래 및 고유자산을 통한 손실보전 행위는 2022년 10월 발생한 레고랜드 사태 직후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발생한 현상이다. 2022년 7월 주요국 통화긴축 가속화로 시장 변동성이 커졌을때도 수면 아래 존재해왔지만, 레고랜드 사태로 수면으로 크게 치솟은 건 사실이다.

레고랜드 사태 직후 금융당국이 쏟아낸 메시지는 이렇다. 

정상 CP를 최대한 자본시장 내에서 흡수할 것. 시장심리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도 자율적으로 모색해 시행할 것 (2022.10.26.금감원 자본시장감독국 발표)
채권시장안정펀드에서 CP 매입조건을 보다 유연하게 운영하겠음. 경제 전반적인 신용축소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측면보다는 추가적으로 시장 불안감을 조성할 수 있는 이벤트를 선제적 식별하는 것이 중요함. (2022.11.11 김소영 금융위 부위원장, 금융시장 현황 점검회의)
금융회사 임직원들이 제재에 대한 우려 없이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시장안정을 위해 노력할 수 있도록 뒷받침(2022.11.14. 금융위, 금감원 공동 발표)

특정 거래유형을 꼭 집어서 얘기한 건 아니지만, 랩신탁 시장에서 거래하는 상품 대부분이 정상 CP이고, 금감원 표현대로 자본시장 내에서 (일부의 묵인해온 관행이 뒤섞여) 흡수해왔다.

레고랜드 사태 직후 일련의 당국 메시지를 종합하면 이런 의문도 든다.

정부와 금융당국은 알고 있지 않았을까. 정상적 투자심리, 합리적 거래를 통한 방법으로 대응이 안 되는 상황, 가뜩이나 자금경색이 굳어진 상황에서 수백조원의 법인자금을 다루는 랩신탁 시장마저 복잡하게 엉켜버렸을 때 정부와 금융당국이 추가로 부담해야할 혼란과 막대한 추가 비용을 말이다.

이런 의구심도 든다. 금감원이 작년 초 검사 방침을 밝히기 전까지 랩신탁 운용 시 연계 교차거래 사실을 전혀 몰랐을까. 그렇다면 그 자체로 무능인데 그 보단 혹시 알고도 의도적으로 묵인한 건 아닌지. 레고랜드 사태 초기 빠른 수습을 위해서 말이다. 그로 인해 사태를 더 키우는데 의도적으로 방관한 건 아닌지도.

함용일 금감원 자본시장·회계담당 부원장은 레고랜드 사태 6개월 뒤인 2023년 4월 28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증권업계 CEO 간담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함 부원장은 작년(2022년) 랩·신탁 환매요구에 대해 장단기자금운용 미스매치 등으로 대응이 원활하지 못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랩·신탁 관련 내부통제기준 마련과 작동 실태, 위법행위 발생 여부 등에 대해 점검할 계획을 증권업계에 전달했다. / 사진 이명근 기자

금감원은 2023년 초 레고랜드 여파가 어느 정도 진정됐다는 금융시장 판단을 내린 이후 랩신탁 관련 메시지를 시장에 던진다.

작년 랩·신탁 환매 요구에 대해 장단기 자금운용 미스매치 등으로 대응이 원활하지 못했던 점. 이에 대해 우선 랩·신탁 관련 내부통제기준마련과 작동 실태, 위법행위 발생 여부 등에 대해 점검할 계획을 증권사에 전달했음.(2022.4.28 함용일 부원장 증권업 CEO 간담회)

이때도 대응이 원활치 못했다는 것이지 당장 멈추란 얘긴 없었다. 금감원이 더 명확한 메시지를 던진 건 5월 말, 그러니까 레고랜드 사태 7개월 이후다.

일부 증권사들이 만기 미스매칭을 통해서 과도한 목표수익률을 제시하게 되면 자금시장 경색 및 대규모 계약해지 발생 시 환매 대응을 위해 연계거래 등 불법·편법적인 방법으로 편입 자산을 처분할 수 있으며. 이는 법상 금지하고 있는 고유재산과 랩·신탁재산간 거래, 손실보전·이익보장 등에 해당할 소지가 있다.(2023.5.24. 금감원 랩신탁 검사 진행상황 설명자료)

그래서 다시 의문이 든다. 이런 메시지가 2022년 10월에 나왔더라면. 

당시 아무리 시장 상황이 힘들었더라도, 아무리 사태 수습이 먼저였더라도 이런건 위법이라고, 원칙대로 하라고 명확한 메시지를 줬다면 말이다.

증권사 책임이 가볍거나 없다고 얘기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위법행위에 대한 책임은 응당 무겁게 져야 한다. 

그럼에도 제재절차가 임박한 상황에서 이런 의구심을 가져보는 건 감독당국과 금융회사 간 특유의 갑을관계, 특히나 엄중한 제재 절차를 진행하는 과정, 몇개 증권사 몇 명이 제재를 어느수위로 받느냐에 관심을 쏠리는 현 상황에서 누구도 2022년 10월 중순으로 시계를 돌려 감독당국의 책임에 대한 얘기는 쉬이 꺼내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금융당국의 의도적 방관은 없었나.

박수익 (park22@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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