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재다능한 소설가는 왜 AI에 주목할까

임지영 기자 2024. 5. 17.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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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작자, 칼럼니스트, 소설가…. 조광희 변호사를 거쳐간 직함이 여럿이다. 요즘의 정체성은 변호사와 소설가로 요약된다. 그가 세 번째 장편소설 〈밤의, 소설가〉를 펴냈다.
세 번째 장편소설 <밤의, 소설가>를 출간한 조광희 변호사가 4월30일 <시사IN> 편집국을 찾았다. ⓒ시사IN 신선영

‘올라운더.’ 출판사에서 조광희 변호사를 소개한 글에 적혀 있는 단어다. 정작 조 변호사는 그런 표현을 처음 봤다고 했다. ‘저 말이 (내게) 맞나’ 의아해했다. 영어로는 다재다능한 사람을 의미한다(All-rounder). 어떤 면에서 그와 꼭 어울리는 말이기도 하다. 변호사이자 영화 제작자, 칼럼니스트인 데다 한때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이었고 대선후보 비서실장, 한참 더 과거에는 술집 주인이었다. 몇 년 전 추가된 영역이 하나 더 있다. 소설가. 그가 최근 세 번째 장편소설 〈밤의, 소설가〉를 펴냈다.

서울 서대문구 모래내 인근에서 태어난 조광희 변호사는 법률가가 되길 바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을 전공했다. 엄혹한 시대였던 탓에 법조인이 되는 걸 꺼렸으나 판검사 말고 인권변호사가 되겠다는 다짐과 함께 사법시험에 응시했다. 2000년대 초반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자문 변호사로 활동하며 영화등급보류제 위헌판결을 끌어냈다. 한국 영화산업이 급격하게 성장하던 시기, 영화계의 주요한 소송을 도맡았다. 2006년 아예 영화사 ‘봄’의 대표가 되어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 이윤기 감독의 〈멋진 하루〉를 제작했다.

2006년,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인연을 맺은 강금실 당시 서울시장 후보 캠프의 대변인을 맡았고 18·19대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의 비서실장으로 뛰었다. 그 사이 계간지 〈창작과비평〉에 한명숙 전 총리의 변호인단으로서 소회를 담은 글을 비롯해 에세이 네 편을 기고하며 본격적인 집필 활동을 시작했다. 매체에 칼럼을 쓰다가 2017년 19대 대선이 끝나고부터 소설을 썼다. 쉰 즈음이었다. 현재는 법무법인 원 소속으로 영화를 비롯해 엔터테인먼트 산업 분야를 주로 담당하고 있다.

〈밤의, 소설가〉는 AI(인공지능)와 소설을 공동으로 집필하다 돌연 사망한 소설가의 이야기다. 어느 날 변호사 한건우에게 의뢰인 윤밤의가 찾아오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의뢰를 수락한 뒤 우연히 밤의의 소설을 읽게 된 건우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밤의의 정체를 궁금해하며 스토리를 좇는 사이 갑자기 새로운 목소리가 나타난다. “제 얘기가 괜찮은가요?” 인공지능의 등장과 동시에 이야기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나아간다. ‘현실과 소설이 서로 뒤엉킨 이야기’다.

조광희 작가 자신은 ‘일상의, 소설가’에 가깝다. 스스로 중독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자주 한다는 산책 중에 주로 소설을 구상하고 평일 중 이틀, 주말에 반나절 정도 쓴다. 그가 4월30일 〈시사IN〉 편집국을 찾았다. 재택근무를 하다 잠깐 시간이 남아 집에서 달걀을 삶다가 왔다는 그는 위아래 녹색 계열의 옷을 입고 있었다. 이날만은 ‘봄의, 소설가’였다. 그에게 소설, 그리고 올라운더의 삶에 대해 물었다.

지하철 2호선이 배경인 소설을 쓰려고 몇 시간 동안 지하철을 탔다는 근황을 SNS에 올렸다. 취재를 열심히 하는 편인가 보다.

(소설) 창작을 한 지 몇 년 안 되었다. 취재를 하면서까지 쓰기에는 시간적 부담이 있고 가급적 내가 아는 영역 내에서 썼다. 법률적인 것은 거의 주저없이 썼는데 AI에 관해서는 취재를 해야겠더라. 법률적 논의나 EU(유럽연합)에서의 법 제정 경과 같은 걸 찾아보는 식이다. 취재를 하면 할수록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쓰려는 단편소설이 2호선 주변의 역과 관계된 내용인데, 취재를 안 한다고 해도 디테일한 부분의 앞뒤는 맞아야 한다. 틀린 걸 쓰고 싶지는 않아서 잠깐 취재를 했다. 지하철에서 영어와 일본어 안내방송이 들려 요즘은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일부 구간만 그렇다는 것도 그래서 알게 되었다.

전작 〈인간의 법정〉도 안드로이드가 주인을 살해한 사건을 다룬다. 이번에는 소설가와 AI가 같이 글을 쓰는데 이런 소재에 끌리는 이유는?

(전작에서) 안드로이드가 주인을 살해한다는 콘셉트를 잡았을 때는 SF에 깊이 들어간다기보다 내가 아는 범주 내에서 법정 다툼을 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번에는 굳이 그 얘기를 하려던 건 아니다. 이미 생활 속에 들어온 인공지능의 존재를 감초처럼 넣어보자는 생각으로 했는데 애초 설계한 방향과 다르게 흘러갔다. 작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을 양적·질적으로 확장시켜서 썼다. 소설가 관점에 여자 주인공, 소설가와 인공지능의 관점을 더했다.

AI가 소설을 쓰는 건 지금도 가능하다. 소설에서처럼 협업이 가능할 정도의 ‘질적’ 도약이 가능할까?

나도 한두 번 시도해봤는데 쓸 수(사용할 수) 없는 수준의 얘기를 해준다. 의미가 별로 없는 쓰기는 가능하다. 공학적인 것은 모르지만 관련 기사나 외국 저널을 보면 글쓰기 전문 AI가 개발 중이라는 말도 들린다. 어떤 작가가 개발 업체의 도움을 받아 AI에 자신의 작품 전체를 학습시킨 다음 쓰게 했더니 작가가 썼던 단어나 문체를 흉내 내서 쓰기도 했다. 문체를 흉내 내는 건 놀랍지만 그럼에도 있었던 걸 가공하기 때문에 한계는 분명하다. 현재로선 전문 창작자가 같이 뭘 하기는 어렵지만 조금 지나면 협업이 이루어질 것 같다. 인간의 창조성을 신비주의적으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개발자나 엔지니어들이 로직을 찾아내면 또다시 도약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 전망해본 거다.

문학에 대한 생각도 곳곳에 나온다. 소설가 한건우는 한 사람이라도 더 읽게 만들면서도 작가가 지향하는 본질적 가치가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말하고, AI는 읽는 사람이 없어도 좋은 글을 남기면 된다고 한다. 소설가로서 본인의 목표가 있나?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좋은 예술이 되는 데에는, 실제로 예술이 그렇지 않을지언정 예술의 위대성과 순수함을 믿는 것이 그 확률을 높인다는 묘한 아이러니가 있다는 생각은 든다. 인생을 걸고 할 일인지 모르겠으나 그런 사람들이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느낌이랄까.

소설에 변호사가 자주 등장한다.

잘 모르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려면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다. 피상적으로 그리게 될 가능성도 높다. 내가 잘 아는 직업이 변호사이고 오류를 좀 덜 저지르는 길이기도 하다. 물론 나중에 다른 직업군을 선택해 쓰기로 작정하면 연구를 할 것 같다. 또 역으로 변호사는 의뢰인을 만나기 때문에 다른 직업들을 좀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은 직업이긴 하다.

쉰 즈음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왜 소설인가.

한참 전에 소설을 쓸 수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야겠다는 견해를 하고 어떤 줄거리 하나를 써놨는데 감이 없어서 말이 되는지 모르겠더라. 그냥 묻어놨다. 2017년 대선이 잘 안 되고 나서 마음이 우울하고 일이 손에 잘 안 잡힐 때 자료를 정리하다 그걸 발견했는데, 말이 된다고 판단했다. 패배의 슬픔을 승화시켜 2017년 가을, 겨울에 썼다. 소설을 쓸 때 영화로 치면 ‘트리트먼트’를 쓰고 시작한다. 이야기를 구조화시키는 면에서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한 게 도움이 되었다. 왜 소설이냐면 젊을 때 로망 같은 게 남아 있었던 것 같고, 20대에 시도 써봤지만 적어도 내게는 시가 훨씬 더 어려운 장르다. 어쩐지 영화 각본보다는 소설에 끌렸다.

남들이 읽는 글을 쓴 건 2010년 〈창작과비평〉에 글을 기고하면서부터인데.

2000년대 중반까지 종종 글을 요청받아 일회성으로 기고한 적은 있었다. 그즈음 안식년이라 1년간 외국에 나가 있었는데 언젠가 내게 기회가 오면 글을 써보고 싶더라. 돌아온 뒤 청탁이 와서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창비는 편집위원 중 한 분이 ‘주간논평’이라는 칼럼을 제안했고 쓰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그때 쓴 건 좀 정치적인 글이었는데 이명박 정부에 화가 났을 때다. 긴 글을 처음으로 썼고 고생했지만 단련이 되어서 계속 쓸 수 있었다.

후퇴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분노로 쓰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눈에 보이는 게 없었을 때인데(웃음), 오히려 세월이 지나 어느 시점부터는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고 포섭할 수 있는 논지를 잡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맞고 저기는 틀렸다는 관점은 가급적 덜 가지려고 한다. 가령 ‘태극기 부대’를 보더라도 저들이 문제가 있다고 단정할 게 아니라 어떤 경험과 어떤 정보가 모이면 저렇게 될까 생각해본다. 옳고 그름이 없다는 취지는 아니고 자신의 감정, 사상을 형성하는 것에 관해 좀 더 겸손하고 깊게 바라봐야 한다는 의미다.

2012년 2월 조광희 변호사(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시사IN>이 주최한 <토크 콘서트-3인3색, 삼삼한 수다>에 참석했다. ⓒ시사IN 조남진

두 번의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의 비서실장을 했다. 어느 인터뷰에서 더 이상 정치적 관여는 안 하지만 인간관계는 유지한다고 말했는데 여전한가.

책을 보냈더니 잘 받았다고 오랜만에 전화를 하셨다. 잠깐 또 옛날 얘기를 했다. 인간적으로 잘 지낸다.

정치적 관여를 안 하는 이유는?

2012년, 2017년 선거를 도왔는데 결과를 못 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성과를 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거기에 투신을 해야 한다. 본인이 정치를 할 생각이 없으면서 관여하기에는 정치의 세계가 녹록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뛰어들어 같이 할 게 아니면 여기까지가 맞겠다 싶었다. 사람, 또는 그 지향에 공감해서 도와주는 방식으로는 결과를 내기 쉽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정치인 안철수는 어떤 사람인가?

여러 부정적인 얘기를 많이 듣는다. 솔직히 말해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거기에 대해 억울한 측면이 제 개인이 이해한 바로는 있는데 그것조차 책임지고 감당하는 게 정치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적인 선의나 능력에 관해, 사회변화를 바라는 열망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건 있고 사실 캐릭터 자체가 정치인의 캐릭터는 아니다. 마음 먹고 노력하면서 맞추는 건데 그것 때문에 갖는 어려움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난감한 점도 있고 대중이 실망할 수 있는 포인트를 이해한다. 그건 본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런데 10년 넘게 (정치인으로) 살아남았다. 그런 점에서 아주 안 맞는 것도 아니지 않나.

캠프에 갈 당시에는 정치를 할 생각이 있지 않았나.

민변 일을 하면서 정치적인 일과 연관된 적은 있지만 현실 정치는 모른다. 강금실 후보가 서울시장 선거에 나갔을 때도 마침 내가 영화사 대표로 가는 게 정해진 때라 휴직을 했기 때문에 선거를 도와주기로 한 거고, 선거 때 후보가 왜 돌아다녀야 하는지(유세)도 모르는 채 돌아다녔다. 2012년에는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 되는 걸 막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였고 문재인 후보 쪽에는 정치인이 워낙 많았다. (안철수 후보는) 인기는 높지만 주변에 정치인들이 별로 없을 때라 내가 도와줄 수 있겠더라. 물밑에서 도와주다가 출마선언을 한 날, 갑자기 비서실장을 해달라고 해서 (경력이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고 여겨 한두 시간 고민하다 인생 뭐 있나 싶어서 수락했다. 그렇게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는 흙탕물 속에 피어나는 연꽃이라고 했는데 흙탕물이 일단 피곤하고, 앞에 나서는 것도 잘 안 맞는다.

선거에 관여한 경험이 남긴 것은 무엇인가?

얻은 건 명백히 있다. 선거를 치르며 사람 욕망의 끝을 보게 되는데 선의를 가진 사람도 많지만 욕망이 들끓는 사람도 굉장히 많다. 욕망, 좌절, 그 안에서의 싸움 이런 걸 눈으로 보게 되었다. 전에는 볼 수 없던 것들이다. 욕망의 용광로 같은 장소에서 사람에 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고 할까. 또 매우 짧은 시간, 엄청난 압박감을 가지고 하는 일이라 그것이 주는 경험치도 있다. 대중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이해도 생겼다. 진실하다고 다 통하는 게 아니다. 변호사로서 주로 엔터테인먼트 관련 일을 하지만 위기관리 업무 영역이 추가되었는데 선거 경험을 통해서 얻은 부분이다. 가령 유명인의 경우 평판의 위기가 발생했을 때 법률적으로도 돕지만 대중에게 어떤 메시지를 줘야 하는지까지 결합시켜서 일을 한다. 소송에서 이기고 평판을 잃으면 상처뿐인 영광이다. 법률적 측면과 대중의 이해를 얻기 위한 전략을 믹스하는 게 중요하다.

영화계에 오래 몸담았는데, 발 들이게 된 계기가 있나.

연수원 시절 영화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동아리를 만들었다. 영화진흥법도 만들고 법률 문제 대응을 할 때 도와주면서 인연이 생겼다. 업무도 그쪽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2000년 전후만 해도 영화 관련 계약서가 굉장히 미비했다. 영화사나 감독들에게 법률 조언을 하면서 미국의 영화 스튜디오 계약서를 참고해 구체화했다. 그때 책(〈영화인을 위한 법률 가이드〉)을 냈더니 업계에 죽 퍼졌다. 한국 영화가 산업화되던 시기 마침 변호사 역할이 필요할 때 운 좋게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다. 크게 검열 문제, 계약서를 산업화하는 문제, 저작권 관련 법리가 보편화되지 않았을 때 소송이나 논리를 정립하는 일들을 했다.

법조계 사람들과 영화인은 결이 다를 것 같다. ‘삶보다 영화를 우위에 두는 사람들’과 지내는 건 어땠나.

변호사를 하고 있지만 낭만적 기질, 내러티브나 문화예술과 관련된 기질이 있었던 것 같다. 거기에 관여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들하고 잘 맞았고 지금도 친구들 상당수가 영화 하는 선후배다. 영화는 공동 작업이라 의외로 사회성이나 리더십도 중요하다.

영화사 대표로서 겪은 즐거움과 어려움은?

영화 만드는 과정을 전면적으로 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있었는데 한국 영화가 좀 어려울 때였다. 영화는 돈을 구해와야 하는 거라 그런 게 쉽지 않았다. 변호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좀 젊을 때니까 ‘인생 뭐 있나, 다양하게 살아볼 수 있지’라는 마음으로 했다.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역시 또 뭔가를 남겼다. 세상에 마이너스만은 없다. 선거도 마찬가지고 새로운 일을 하면 반드시 어떤 흔적을 남기는 것 같다. 그 흔적을 본인이 긍정적으로 잘 소화할 경우, 나머지 삶에서 좋은 자원이 된다. 내 개인은 진취적이지 않은 편이지만 뭔가 해야 하거나, 제안이 왔을 때 도망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과감하게 선회했다.

2009년 1월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영화 저작권 침해 방지와 온라인 부가시장 확립을 위한 기자회견’에 참석한 조광희 당시 영화사 봄 대표(맨 왼쪽). ⓒ연합뉴스

사법고시를 보지 않으려다가 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판검사를 지원하지 않는 선에서 타협했다고.

그 시점에서 검사는 선택하면 안 되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사법고시에 붙고 나서도 몇 년 동안 비슷한 상황이었다가 어느 시기가 지나 민주화되면서 판사도 검사도 하기 나름이고, 사회적 역할이 있다고 인식이 바뀌었다. 내가 선택을 해야 하는 시점에는 철학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웠다. 아버지는 그 이후로도 전혀 토를 달지 않으셨다. 그냥 아들이 안정적으로 살기를 바랐던 것 같다.

글쓰기와 변호사 일을 언제까지나 병행하고 싶다고 했는데.

변호사는 현실적인 선택지였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렇게만 치부할 수 없고 인간 삶에서 되게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이구나 싶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예술도, 법률도 중요한 거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직업이나 일이라는 건 그 자체로 비윤리적인 게 아니라면 삶에서 의미가 있고,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변호사는 내 생계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직업이다. 내가 돕고 싶은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고, 글쓰기는 지향하는 바가 있어서 병행하며 살아가려고 한다.

나이가 든다는 것에 압도될 만한 시기일 법도 한데 오히려 새로운 걸 시작했다.

만으로 따지면 58세인데, 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 시대가 조금 젊게 사는 걸 허락하는 것 같다.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소설 서너 권은 더 쓰고 싶다. 어쩌다 보니 글 쓰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좋은 점은 그냥 혼자 하면 된다는 것이고 이 역시 성취와 무관하게 주는 게 많다. 수행이 된달까.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을 관찰해야 하고 확인하고 연구해야 하기 때문에 책을 읽어야 한다. 소설은 어쩔 수 없이 자기가 드러나잖나. 첫 소설을 출간하며 든 걱정 중 하나가 ‘분명 나란 인간의 무늬가 드러날 텐데 어떻게 감당하지’였다. 할 수 없고, 내가 괜찮은 사람이면 괜찮게 될 것이고 아닌 사람이면 그걸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못나고 미성숙하면 글에 그게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수행인 측면이 확실히 있더라. 결과치를 못 내도 과정에서 그런 걸 발견한 건 뜻밖이었다. 예전 같으면 사람을 가리느라 안 나갔을 자리에도 사람들이 뭘 하는지 구경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간다. 그렇게 마음이 열리는 것도 좋은 점이다.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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