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우상화 함께 막아주세요” 5·18 광주 찾는 전씨 고향 시민들

강현석 기자 2024. 5. 1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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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주민 둘로 갈라놓은 ‘일해공원’
‘생명의 숲’ 이름 복원 17년째 제자리
생명의 숲 되찾기 합천군민운동본부 소속 주민들이 지난 14일 경남 합천군 합천읍 일해공원 앞에서 ‘합천 전두환 공원, 국민이 거부권을 행사해 주십시오!’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이들은 17일 광주 금남로를 찾아 이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한다. 강현석 기자

“이렇게 두다가는 20∼30년 뒤 ‘전두환 동상’이 세워지지 않을 거라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지난 14일 경남 합천군 합천읍에서 만난 이창선씨(57)가 ‘일해공원’ 표지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합천이 고향인 그는 “광주 시민들과 국민이 힘을 보태 일해공원 이름을 반드시 바꿔야 한다”면서 “그렇지 않으면 독재자를 미화하려는 시도가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일해(日海)’는 1931년 합천 율곡면에서 태어난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 호다. | 관련기사 6면

합천 시민들이 17일 5·18 민주화운동 44주년 기념행사가 열리는 광주를 직접 찾아 ‘일해공원 명칭 변경’에 힘을 모아줄 것을 호소한다. 전씨 고향 사람들이 광주 5·18 기념식에 참석하는 것은 처음이다. 참석자는 이씨를 포함한 ‘생명의 숲 되찾기 합천군민운동본부’ 회원 39명이다.

이들은 17일 광주 동구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에서 열리는 5·18 전야제에 참석한다. 학살 현장인 금남로에서 진행되는 ‘민주평화대행진’에도 함께한다. ‘합천 전두환 공원, 국민이 거부권을 행사해 주십시오!’ 행진을 위해 준비한 플래카드 문구다. 이들은 18일 정부 주관 기념식에도 참석한다.

합천의 여러 공공장소와 시설은 전씨와 그의 출생을 기린다. 일해공원 표지석 뒷면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출생하신 자랑스러운 고장임을 후세에 영원히 기념하고자 일해공원으로 명명한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표지석 글자도 2008년 생전의 전씨가 직접 썼다. 16년 전 합천으로 귀농한 고동의씨(55)는 이날 오전에도 양배추를 수확하다가 공원으로 나왔다.

그는 “부산의 후배에게 ‘놀러 와라’ 했더니 ‘전두환 공원 있는 곳은 안 간다’고 하더라”면서 “중학교 1학년인 아이에게도 부끄러워 더는 두고 볼 수가 없다”고 했다.

합천읍을 흐르는 황강 변에 자리 잡은 이 공원은 애초 ‘새 천년’(2000년대)이 시작되는 것을 기념해 조성됐다. 1999년 경남도의 ‘밀레니엄 기념사업’ 공모 때 합천군이 ‘새 천년 생명의 숲’ 조성사업을 신청해 선정됐다.

68억원의 예산을 투입한 이 숲은 2004년 완공됐다. 5만3724㎡ 부지에 군민이 이용할 수 있는 야외공연장, 어린이 놀이터, 대종각, 3·1운동 기념탑, 체육시설 등을 세웠다. 공원이 완공되자 군은 별도 표지석을 세우지 않고 2004년 8월 ‘새 천년 생명의 숲’으로 개장했다.

합천군은 2006년 12월 돌연 ‘공원 명칭 변경’을 추진한다. 군은 일해공원과 황강공원, 군민공원, 죽죽공원 등 4개 명칭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일해공원이 55.8%로 선호도가 가장 높았다고 설명했다. 당시 설문조사는 일반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다. 우편으로 군의 ‘설문조사지’를 받은 1364명은 읍·면장, 이장, 새마을지도자, 바르게살기회장 등이었다. 군청과 업무 관련성이 큰 일부 주민들만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것이다.

지난 14일 찾은 경남 합천군 합천군청앞 화단에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의 기념식수가 안내판이 놓여있다. 전씨는 1980년 9월6일 나무를 심었다. 강현석 기자

군은 2007년 1월 ‘새 천년 생명의 숲’을 ‘일해공원’으로 바꿨다. 2008년 12월31일에는 공원 앞에 대형 바위 표지석도 세웠다. 새로운 천년을 기념해 모든 군민을 위해 조성했던 공원이 ‘전두환 1인’을 기념하는 공원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김형천 군민운동본부 간사(58)는 “어떤 사람의 호를 공공시설에 사용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행적을 기리는 것이다. 일해공원을 이대로 두면 ‘전두환 미화’의 씨앗이 될 게 분명하다”고 했다. 김 간사는 “합천은 좁은 지역이다 보니 이해관계 등으로 내부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뜻있는 주민들은 2020년부터 군청에 일해공원 명칭을 다시 돌려놓으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2021년 5월18일에는 지역 농민회, 공무원노동조합,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농협노조, 노무현재단 등 시민·사회단체 10곳이 ‘생명의 숲 되찾기 합천군운동본부’를 만들었다.

‘일해공원’은 인구 4만1000여명의 합천을 갈라놨다. 군민운동본부가 2021년 12월 ‘생명의 숲으로 이름을 돌려달라’는 주민 청원을 접수하자 이를 반대하는 주민들은 ‘공원 명칭 변경 불가 청원서’를 냈다. 공청회와 토론회도 여러 차례 무산됐다. 일부 단체에서 ‘언론인 방청 금지’나 ‘귀농인 참여 금지’ 같은 수긍하기 어려운 조건을 내세웠다.

일해공원 대신 원래 이름이었던 생명의 숲을 되찾는 일은 17년째 진전이 없다. 합천군은 올해 3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이 문제에 대한 ‘공론화’를 추진할 방침이지만 기대는 크지 않다.

경남 함천군 전두환 생가 앞 안내판 전씨 행적을 미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난 14일 촬영했다. 강현석 기자.

‘오월 광주’를 찾는 합천 사람들의 마음은 절박하다. 이창선씨는 “공원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절실함, 우리 힘으로는 해내지 못했다는 미안함 때문에 광주를 찾기로 했다”고 말했다. 고동의씨는 “생업도 있는데 수년간 해결되지 않다 보니 힘이 빠지는 게 사실”이라면서 “광주에서 다시 힘을 얻고 국민의 어깨도 빌리고 싶다”고 했다.

‘일해공원’ 문제를 외면하는 정치권에 대한 서운함도 있었다. 이씨는 “정치권에서 헌법전문에 ‘5·18정신’을 포함하겠다고 하는데, 광주지역 정치인들조차 ‘일해공원’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면서 “합천의 문제로 치부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개입해 달라”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한 주민이 말했다. “합천에 작은 영화관이 있는데 얼마 전 <서울의 봄>이 개봉했을 때 연일 만원사례였습니다. 진짜 주민들의 마음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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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khan.co.kr/local/local-general/article/202405160600021

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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